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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8 비뚤어진 집(1949)
- 2023.01.03 올리버 트위스트(1839) 1
- 2022.12.28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2021)
- 2022.12.26 저주토끼(2017)
- 비뚤어진 집(1949)
- 독서록
- 2023. 1. 8. 22:56
휴가에는 역시 추리 소설이 제격인 법
애거서 크리스티의 <비뚤어진 집>을 읽었다
전후의 어지러운 상황과 급변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이 책은
인간에 대한 뛰어난 분석력을 보여주는 추리 소설인 동시에
당대의 사회 변화를 관찰하기도 좋은 흥미로운 책이다
주인공한테는 카이로에서 만난 똑부러진 여자친구 소피아가 있는데
카이로에서 만날 당시에는 도무지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몇년후에 그들은 소피아 할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소피아는 할아버지가 죽은 과정이 무엇인가 석연치 않음을 알고, 주인공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은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면서 말이다
애리스티드 레오니데스는 소피아의 할아버지로, 2차 세계 대전과 전후의 어지러운 사회에서
법망을 요령있게 피해다니며 크나큰 부를 쌓은 뛰어난 기량의 사업가다
하지만 그런 할아버지와 달리 자식들은 겉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실은 아무런 사업감각도 현실감각도 없어서
할아버지에게 붙어사는 처지다
가족이 서로를 미워한다는 건 분명히 나쁜 일이지만, 어떤 때는 서로 뒤얽힌 애정 속에서 살아가는 게 더 나쁠 수도 있어요. 예전에 당신한테 우리 가족이 비뚤어진 작은 집에서 산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의미였어요. 물론 비뚤어졌다는 의미를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보는 건 아니에요. 그저 우리 가족이 각자 혼자 힘으로 꼿꼿이 일어나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었어요. 우린 모두 조금씩 뒤틀리고 뒤엉켜 있는 것 같아요.
작중에서 주인공에게 소피아가 자신의 가족에 대해 하는 말이다
서로 미워하는 가족만큼이나, 서로를 사랑하는 가족도 괴로울 수 있다
인간에 대해 정말인지 잘 아는 작가구나 싶었다
레오니데스 집안의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해서 자꾸만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예를 들어, 장남은 아무런 사업감각도 없는데도 존경하는 아버지의 기대를 따르기 위해 자꾸 사업에 도전했다가 망하고
할아버지는 장남이 망할 때마다 도와줘서 결코 사업을 그만두지 못하게 된다
끊임없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이런 가족 관계가 흥미롭기도 하고 또 굉장히 현실에 있음직해서 작가의 관찰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작중에서 은근하게 보여지는 시대의 변화도 눈에 띈다
사실 이 책만 읽었으면 나도 잘 몰랐을 것 같지만, 요즘 영국 고전을 많이 읽어서 확실히 시대 별로 차이가 크구나 싶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여자들의 경제 활동이다
19세기에 쓰여진 책들을 보면 여자들은 대부분 직업 없이 재산을 상속받아 결혼하는 것이 미덕으로 나와 있으며,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라봤자 하녀, 가정교사, 매춘부 정도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에 쓰여진 이 책을 보면 연구실에서 일하는 여성, 외교부에서 일하는 여성 등
전문적이고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대거 등장한다
고작 한세기만에 이런 변화가 일어났다는게 너무 신기했고
확실히 전쟁 때문에 여성의 사회활동이 증가했다는게 보였다
심지어 현실감각 없는 아들들 대신에 명석한 손녀에게 전 재산을 물려준다는 파격적인 설정까지
전쟁 전과 후의 유럽 사회의 변화가 얼마나 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몰입되는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던 작품
다만 '비뚤어진 가족'이라는 테마를 깊게 파고들어서 끝장을 봤으면 더 재밌었을 것 같다
가족간의 비틀린 관계 묘사가 정말 기가 막힌데, 초중반에 분위기 조성용으로만 좀 쓰고 그다지 파고들지는 않는다
막 흥미진진해지는데 짠 하고 범인이 나오니까 조금 아쉽다
물론 더 파고들면 내 취향에는 맞겠지만 추리소설로서는 지루해질수도 있으니 이렇게 끝맺음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여튼 페이지를 펴는 순간 아무 노력하지 않고도 몰입되니 휴가지에서 읽을 책으로는 최고다
다음 여행에도 애거서 크리스티를 빌려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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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리버 트위스트(1839)
- 독서록
- 2023. 1. 3. 13:02
연말과 연초에 걸쳐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었다
이 재미없어보이는 고전을 갑자기 읽게 된 경위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아가씨>의 원작 소설 <핑거 스미스>가
<올리버 트위스트>의 포스트모던한 재해석이란 리뷰를 읽어서 였다
자고로 어떤 책에 영향을 준 원본을 읽으면 그 책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지는 법이다
최근에 고전 몇 권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도서관에서 멀쩡한 <올리버 트위스트>를 찾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도서관에 한 열댓 권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있는데 딱 한 권을 빼고 모두 어린이 다이제스트 판이다
고전 다이제스트판은 부모의 허영심과 출판사의 상술의 이해관계가 맞아 탄생한 말도 안되는 촌극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유튜브 3분 요약보고 영화 다봤다고 하는 사람은 미친 놈 취급하면서 고전 다이제스트 판은 왜 도서관에 열 몇권이나 있는거임ㅡㅡ
특히 그게 찰스 디킨스일때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이 작가는 태생이 지독한 떠벌이로 말이 많고 19세기 런던을 통째로 책이 집어 삼킨 것처럼 집요하게 묘사를 한다
사회 세태에 대한 풍자와 특유의 말솜씨로 풀어내는 블랙코미디는 덤이다
그리고 내용도 아동학대며 매춘부, 살인, 각종 범죄 등 자극적인 요소로 가득한데, 아동판으로 만들면서 그런 면을 검열하면 책의 정수가 사라지는 셈이다
특히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 중 하나인 낸시는 매춘부 신분이라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인데 그 부분을 생략하면 캐릭터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하여간 이 말도 안되는 책들 사이에서 딱 한 권 있는 완역본 <올리버 트위스트>를 예약까지 걸어서 어렵게 구해왔다
바로 이 책인데, 현대지성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근래에 읽은 책 중에 손꼽히게 번역이 좋았던 것 같다
고전은 전문번역가 대신 논문 꽤나 썼다는 교수들이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솔직히 전문번역가보다 가독성도 나쁘고, 오역도 많고(교수라 지적하는 사람이 없나봄) 작품 해설에 문학계의 일반적 해석 대신 본인의 해설만 욕심 그득하게 채우는 경우가 많아서 굉장히 불호다
유수아라는 전문번역가분이 번역한 이 책은 아주 깔끔하고 충실한데다 주석도 꼭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만 달아놓은 것이 마음에 든다
예전에 어떤 교수가 번역한 책을 읽었는데 주석과 작품 해설이 책 내용보다 많았다^^
페이지를 넘기기만해도 숨이 막히는데 이걸 읽으라고 만들었나 싶었음
작품 해설에도 작중의 유대인 차별이나 여성 차별같은 요소를 애써 부정하거나 변호하지 않으면서도 당시 사회상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을 통해 이해를 돕는 점이 좋았다
처음 보는데 느낌이 좋은 출판사...! 앞으로는 고전 읽을 거 있으면 여기 껄로 읽어야지
하여간 작품 외적 이야기는 이쯤으로 해두고 본격적으로 <올리버 트위스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제목이 올리버 트위스트인데 올리버를 중심으로 사건이 돌아가기는 하지만 사실 비중은 크게 없다
이 고아 소년을 소재로 해서 구빈원이나 고아원 같은 당시의 복지 시설 실상을 고발하거나
런던 뒷골목에 있는 암흑가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낸다든가 한다
'가난하지만 선한 소년이 역경을 이겨내고 행복해지는 이야기'가 맞긴 한데
솔직히 그보다는 막장 범죄 신파극으로서의 재미가 더 크다
왜 전자로만 책을 소개하는지 모르겠다 도파민이 뿜어져나오는 자극 가득한 재밌는 책이란 말이다
개막장 출생의 비밀 범죄 활극이라고 소개했으면 <올리버 트위스트>를 사람들이 좀 더 읽지 않았을까?
작품에는 올리버, 브라운로씨, 로즈 등으로 대변되는 선역과 페이긴, 사익스, 멍크스로 대표되는 악역이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선역은 고결하고 선량하며 악역은 비열하고 추악하다
근데 이상하게 악역들 얘기가 더 재밌다 솔직히 디킨스도 악역 얘기 쓰면서 더 재밌었을듯
암흑가 패거리의 보스인 페이긴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고스란히 담겨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입체적이고 인상적인 캐릭터로 많은 후대의 소설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예를 들어 <핑거 스미스>의 석스비 부인은 바로 이 캐릭터를 여성 버전으로 쓴 격이다
페이긴은 암흑가에서 성공적인 사업을 벌이는 노인인데, 그 사업이란 바로 갈 곳 없는 어린 애들에게 소매치기를 시키거나
불한당들을 고용하여 강도질을 하거나 매춘부를 부리는 식이다
디킨스는 강경한 어조로 이런 범죄 행위를 비판하면서도, 어째서 어린 아이들이 페이긴의 마수에 빠질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어린 올리버는 고아원과 구빈원에서 지독한 아동학대를 받고, 도제로 팔아 넘겨진 장의사 집에서도 가혹한 학대를 받다가
아무런 계획 없이 런던으로 도망간다
이 가엾은 소년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쫄쫄 굶고 지쳐서 탈진 직전인 올리버에게 잘 대해준 유일한 사람은 소매치기 소년뿐
올리버를 잘 먹이고 달래서 페이긴의 아지트로 데려간다(아직 올리버는 그곳이 범죄자 소굴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고아원과 구빈원이라는 사회 제도가 부패하여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린 아이의 배를 유일하게 채워주는 것이 범죄자 집단이라는 것은 꽤 충격적이다
디킨스는 사악한 범죄자들을 엄격하게 단죄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너진 복지 제도 속에서
범죄 외에는 생존 방법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보여준다
페이긴은 아직은 도덕심이라는 것이 있는 꼬마들을 어떻게 하면 잘 구슬려 훌륭한 소매치기로 만들지 잘 알고 있다
윽박지르거나 때리는 폭력적인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외로운 처지의 소년에게 먼저 범죄를 저지르게 해서, 원래의 세계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죄책감을 안겨주고
가족같이 따뜻하게 대해주어 정서적으로 의존하도록 만든다
마치 본인이 범죄자 패거리에 들어가본양 수법을 능수능란하게 묘사하는 디킨스에게 혀를 내둘렀다
디킨스의 뛰어난 점은 혼란스러운 현실을 이상적인 형태로 왜곡하는 대신 아수라장 그대로 지면에 옮겨놓는다는 것이다
산업혁명과 급격한 도시화로 생겨난 빈민들의 불쾌한 실상이라든가,
슬슬 물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여성과 남성간의 갈등
범죄로 몸살을 앓는 동시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인 런던
이런 당시의 난장판을 재현한 책을 읽고 있노라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작가 본인조차 어떤 소재들은 무슨 판단을 내리는 것이 맞는지 헷갈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 현실을 재단하는 대신 일단은 써내려간다
예를 들어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낸시'는 기존 가부장 사회의 성녀와 창녀 프레임으로 단순히 구분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매춘부로, 범죄자 일당의 행동대원으로 씩씩하게 활약하지만 동시에 올리버를 가여워하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올리버를 돕는 인물이다
사익스가 지독한 불한당임에도 그를 사랑하여 떠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당시의 문학적 전통에 따라 여성 캐릭터를 자애로운 어머니 또는 요부로 나누는 대신에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의 복잡하고 입체적인 모습을 담아낸다
이 소설이 딱히 여성혐오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낸시라는 캐릭터는 당시 사회상에 비추어볼때 상당히 세련되고 현대적인 서사를 지녔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디킨스 또한 당대 사회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었으므로 낸시를 어떻게 다룰지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결말을 맺기는 한다
솔직히 올리버를 비롯한 선역 캐릭터들은 평면적이고 아무 욕망이랄게 없어서 재미가 없다
그래서 이들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원래 막장드라마는 선역보다 악역이 재밌어야 잘 팔리는 법이다
다른 후대 작가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페이긴과 사익스, 낸시, 소매치기 소년들의 관계성은 많은 문학작품에서 변형되며 재생산되고 있다
뒷골목 인생들의 유사가족 관계는 꾸준히 인기가 있는 테마이지 않은가
그 원형을 알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 물론 600페이지의 압박을 견뎌야하지만 의외로 도파민 듬뿍 막장소설이라 보다보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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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2021)
- 독서록
- 2022. 12. 28. 11:45
천선란 작가의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를 읽었다
기본적으로 뱀파이어 이야기고, 세 명의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고, 사랑과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다
철마재활병원에서 일어나는 연쇄 자살사건을 조사하는 형사 수연
그 사건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는 듯한 완다
빚쟁이에게 쫓기며 뭔가 수상한 일을 벌이는 간호사 난주
주인공 세 명 중에 흡혈귀는 없지만, 모두 흡혈귀와 관련된 강렬한 사건들을 겪는다
재활병원에 입원되어 가족도 찾아오지 않는 외로운 치매 노인들에게 흡혈귀가 접근한다는 설정이다
흡혈귀라는 설정은 참 오랫동안 이리저리 변주되면서 재미있게 쓰이는 것 같다
오리지널인 <드라큘라>에서는 남성들의 성적 공포의 화신으로 등장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사람들의 외로움을 파고드는 매혹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외로운 노인들은 이미 괴로운 삶에 지쳐, 자신을 죽여주겠다는 흡혈귀의 제안을 구원으로 느낀다
흡혈귀를 무서워하기는 커녕,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주지 않겠다는 협박에 벌벌 떤다
죽음보다 끝나지 않는 외로운 삶이 더 무서운 사람들이라니 좀 서글펐다
책에는 여러가지 테마들이 나오지만 재활병원 이야기가 가장 감정적으로 와닿았는데
작가의 말을 들어보니 직접 재활병원을 겪어보고 쓴 이야기라고 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역시 자신의 경험에서 가장 진정성 있는 울림이 나오는 것 같다
주인공 중 한명인 완다는 릴리라는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지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나온다
고작 며칠을 같이했을 뿐인데 평생 그리워하는 건 벌이나 다름없다고, 모든 관계는 처음부터 불평등하다. 더 오래 사는 쪽이 불리했다. 언제나.
서로의 피를 나누어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건 가히 로맨틱한 설정이라 할 수 있다. 개나 고양이가 소설을 썼다면 그들도 이런 내용을 쓰지 않았을까. 주인을 물면 주인과 수명이 같아질 수 있어. 주인을 물어서 오래도록 함께 살자, 하는.
자신이 되어보지 않은 입장에서 글을 쓸 때, 글이 쉽게 허세스럽고 텅비게 된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데
작가는 어떻게 뱀파이어가 되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이런 입장에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신기했다
어쩌면 반려동물을 떠내보내고 그리워했던 경험에서 느꼈던 감정을 풀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천선란 작가는 쓸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련하게 풀어내는 일을 잘한다
이번 작품에서도 북받혀 오르는 감정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전해졌다
조금 아쉬웠던 건, 어쨌든 수사물이고 뱀파이어물인데 이 장르에 기대되는 긴장감이나 흡입력이 부족했다
사건을 전개하는 방식이 좀 전형적인 수사물들을 어설프게 따라가는 느낌이었다
또 완다가 입양갔던 해외에서의 에피소드는 뭔가 서프라이즈 외국인 배우들의 어색한 재연 연기를 보는 듯한 인상
서양식 이름을 가졌고 곳곳에 서양 문화를 집어넣지만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너무 한국인스럽다
하여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모든 단점을 뛰어넘을 만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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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록
- 2022. 12. 26. 00:09
정보라 작가의 단편집 <저주토끼>를 읽었다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없이 빌렸는데 빌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판타지였다
개인적으로는 구병모 책이 많이 떠올랐다
동유럽 느낌의 어두운 환상소설인데 이제 한국식 노란장판을 섞은 그런 느낌
근데 구병모는 조금 팬픽스러운 감성이 있는데 정보라 작가한테는 없다
책을 읽고 나서 작가 이력을 보는데 러시아 및 동유럽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는 걸 보고 뭔가 이해가 됐다
솔직히 동유럽 환상 문학에 대해 뭐 아는 게 있냐고 하면 쥐뿔도 없긴 하지만
어렸을 때 크라바트라는 동화책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런 으스스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분위기가 가장 매력적이었던 작품은 책 제목이기도 한 단편 저주토끼였다
<저주토끼>의 주인공은 대대로 저주 물건을 만드는 집안 출신이다
주인공은 어느 늦은 밤, 할아버지에게 예쁜 토끼 스탠드에 관한 피비린내나는 이야기를 듣는다
동네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던 할아버지의 친구는 전통 방식으로 좋은 술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성실한 사업가였다
하지만 싸구려 알콜로 술을 대량생산하는 경쟁 기업에서 친구의 회사에서 공업용 알콜을 쓴다는 헛소문을 퍼트린다
회사는 부도나고, 좋은 전통주의 명맥은 끊기고, 친구의 일가족은 모두 참담한 최후를 맞이하고...
산업이 한창 발달할 시기에 한국에서 어느 동네서나 있었을 법한 비열하지만 흔한 이야기
그러나 이 책의 희생자는 범상치 않은 친구를 두고 있었으니, 바로 주인공의 할아버지였다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를 사용하지 말라는 집안의 금기가 있지만 이런 일을 겪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저주에 쓰일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버릇대로 아주 예쁜 토끼 스탠드가 어느 날 경쟁 회사의 사장실로 배달된다
보통 토끼는 순하고 귀엽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내가 키워봐서 아는데 토끼들이 참 정신사납다
풀어놓으면 완전히 정신나간 것처럼 발정을 하면서 짝짓기를 하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잠깐 사이에 우리집 화초를 다 갉아먹어버리고 온 구석에 똥을 갈겨놓는다
작가가 토끼를 저주의 테마로 써먹은게 되게 기묘하면서도 위트있었다
토끼가 회사의 중요한 문서를 모조리 갉아먹어서 회사가 기울어버리고
토끼 스탠드를 만진 사람들은 서서히 아파지게 되면서 잘 때 토끼처럼 코를 찡긋거리면서 숨을 쉰다든지
왜 옛날 동화보면 꼭 사람이 죄를 지으면 동물이 된다는 테마가 있지 않은가
그런 으스스하면서도 웃긴 동화를 보는 분위기가 났다
토끼의 저주는 지독한 연좌제로, 잘못한 사장뿐 아니라 잘못없는 직원들과 가족, 특히 어린아이에게까지 잔혹한 복수를 한다
알다시피 연좌제는 근대 이후로 없어졌고, 잘못한 사람 이외의 죄없는 사람을 징벌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게 여겨진다
하지만 '저주'는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근대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개념이다
마치 사소한 실수로 일가족을 멸해버리곤 했던 그리스로마신화의 신들처럼,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무시무시한 벌
멀쩡하던 아기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하루아침에 농사가 망하고, 자연재해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런 일들에 원인이 있다고 밝혀진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그 전에는 불행한 일이 있으면 그저 신의 형벌이구나하고 하늘에 싹싹 빌어야 했던 것이다
원인도 알 수 없고 해결도 불가능한 무시무시한 저주라는 점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오싹하게 만들었다
<저주토끼>이외에 다른 단편 중에서는 <흉터>와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가 좋았다
<머리>라는 단편은 읽다가 비위가 상해서 중단했는데 잘한것같다.... 정말 기분이 나빠진다
<흉터>는 괴물에게 산 제물로 바쳐진 소년이 복수하는 이야기인데, 복수 후에 반전이 묘했다
마을과 괴물의 관계는 대체 뭐였을까 선악조차 흐릿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이야기였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모래사막과 황금배라는 어휘가 주는 몽환적인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동화처럼 사랑에 빠져 저주에 걸린 왕자를 구하기 위해 몸소 나서는 용감한 공주,
힘겨운 모험을 떠난 끝에 저주를 풀지만 결국 왕자에게 배신당한다
역경을 헤치고 결혼으로 가부장제에 안정적으로 편입되는 결말이 아닌,
가부장제에 배신당하고 새로운 자신의 길을 찾는 공주의 이야기라는 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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