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를 혐오한다(2010)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읽었다

대중 교양 서적보다는 학술 서적에 가깝지만 예시를 들어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어렵다는 인상은 들지 않았다

우에노 치즈코는 이브 세즈윅이 19세기 영국 문학을 분석하여 남성의 '호모소셜'을 설명한 이론을 일본 사회에 적용했다고 서두에서 설명한다

재미있었던 것이 내가 얼마 전에 19세기 영국 문학인 <드라큘라>를 읽으면서 딱 그런 점을 느꼈던 터라,

역시 너무 노골적이고 솔직하게 언피씨한 작품은 오히려 남성의 심리를 분석하는 요긴한 자료가 된다는 걸 느꼈다

치즈코가 말하기를, 마치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이 아닌 서양인들의 판타지에 대한 교훈적 자료가 되듯,

남자가 여자에 대해 쓴 텍스트들에서는  '여자의 진짜 모습' 대신에 '남성의 성환상'을 관찰 할 수 있다

항상 괜찮은 책만 읽게 되지는 않으니 이런 관점으로 독서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하여간 글이 딴길로 샜는데, '호모소셜'이라는 것이 여성혐오를 설명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개념이다

호모소셜은 대충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알탕연대라고 할 수 있겠다

남성간의 진하고 지독한 연대를 가리키는 말로, 남성간의 성적 사랑을 의미하는 동성애와는 구분된다

남성이 남성이 되기 위해서는 이 호모소셜 공동체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치즈코는 '성'이라는 것이 결코 자연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호모소셜리티는 끊임없이 여성을 타자화 시키며 '남성'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한다

저자는 '자기 마누라 한 명 휘어잡지 못하는 게 남자냐?'라는 흔한 말에서

여성을 지배하지 않으면 남성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닌 '휘어잡는다'라는 말에서는 여성을 종속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여성을 주체로 인정하지 않으며 객체화, 타자화, 멸시하는 것이 여성혐오라고 설명한다

남성됨을 인정받는 남자는 무리에서 서열이 높고, 경제적 이익과 권력을 손에 쥔다

여성혐오를 통해 남성들이 유대감을 나누는 상황은 굉장히 흔하게 볼 수 있다

남성들끼리 있을 때 하는 음담패설, 군대에 가면 총각딱지를 떼야 한다며 성매매 업소에 데려가는 것

음담패설은 정말 어떤 성적 욕구를 채운다기보다는 내가 이렇게 여성을 잘 멸시한다는 훈장같은 것으로

호모소셜의 유대를 끈끈하고 돈독하게 만든다

 

요즘 한국에서는 '여성들의 연대'가 뜨거운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책이나 영화에서 서로를 질투하고 남성에 집착하는 여자들 대신, 여성들이 서로 돕고 우정을 나누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사실 그런 컨텐츠들을 보면서 조금 낯설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되었다

저자는 남성들의 호모소셜에 비견될만한 여성연대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성연대는 남자들의 의리니 충성이니 그런 말로 포장되지만, 뜯어놓고 보면 모든 것이 경제적 이익 때문이다

남성은 다른 남성들의 끈끈한 유대 안에 들어감으로써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그 이익을 받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회사의 임원은 거의 다 남자다(2021년 상장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단 5.2%)

간단히 말해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는 남자한테 줄을 서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여성을 여성과 연대하게 하는 경제적인 동기가 없는 것이다

뜨거운 마음으로 연대하고 싶더라도 경제적 동기가 없는 연대는 그것을 가진 연대보다 유대감이 약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이렇게 남성의 것만큼 강렬한 여성연대가 출현하지 못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서

한편으로는 최근 진정한 여성연대를 시도하는 사례가 늘고 있음을 언급하며 미래를 낙관한다

나 또한 최근 김초엽, 천선란 같은 한국 여성 작가들의 책에서 새롭게 시도되는 여성연대 서사를 목격했다

아직 현실에 그만큼의 여성연대가 있느냐 묻는다면 확실히 긍정할 수는 없지만

창작이 현실의 반영인 만큼이나 현실도 창작물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남성들의 담타'에 버금가는 끈끈한 여성연대가 등장하길 기대해본다

 

책에서 또 흥미로우면서도 공감이 많이 갔던 부분은 어머니와 딸에 대한 챕터였다

작가는 근대의 가부장제를 아주 설득력있게 쉬운 언어로 설명한다

근대 이전에 사람들은 대를 이어 비슷비슷한 삶을 살았으므로 자식에게 더 뛰어나게 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에 사회가 격변하며 아버지는 농부였으나 아들은 지식인이 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어머니는 무능하고 자신을 억압하는 아버지를 보며 한탄하고, 그 기대를 아들에게 쏟는다

아들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를 살해하여(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어머니의 기대를 완수할 수 있다

한마디로 아버지보다 성공해서 아버지의 권력을 능가하여 어머니를 구원하는 것

딸은 전통적으로 교육의 기회도 없고 경제적 능력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본디 어머니의 기대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교육을 받고 사회 진출에 있어서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차별이 없어진 지금

딸은 어머니에게 아들의 역할까지 요구받게 된 것이다

그러면 딸이 열심히 해서 성공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상황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모든 어머니와 딸은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경향이 있다 

끝나지 않는 동일화가 모녀 관계에서 일어난다

어머니는 딸이 자신처럼 무력하게 살지 않고,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딸이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행복해질 때, 어머니는 질투를 한다(질투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느끼는 자기혐오는 덤이다)

자신은 집구석에서 이렇게나 불행한데, 자신의 분신인 딸은 행복하다는 것이 견디기 쉽지 않은 것이다

아들에게  '너는 이렇게 살지 마라'라고 하는 어머니를 본 적 있는가? 나는 적어도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자신과 동일하다고 느끼는 존재인 딸에게 자신처럼 되지 않을 것을 당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처지에 딸의 책임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 너무 공감이 갔다 

우리 엄마를 너무 사랑하지만 때때로 엄마는 남동생에게는 절대 주지 않는 죄책감을 자꾸 나에게 준다

마치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나라는 듯, 그러면서도 그런 죄책감을 딸에게 부과하는 당신을 스스로 미워하며 자제한다

엄마는 나를 응원하지만 동시에 집을 떠나지 않고 자신과 함께 해주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한편 나는 어머니처럼 되기 싫다는 생각을 한다 

집에서 경제력없이 집안일을 하고 아빠가 하라는 대로 따르며, 그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이런 감정이 들때 너무 무겁고, 어머니가 미운데 또 미운 감정이 드는 내가 혐오스럽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줄곧 혐오해왔는데, 이 책을 읽고 그것 또한 여성혐오라는 것을 알았다

여성혐오는 여성에게는 자기혐오로 나타난다고 한다

나와 엄마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던 일이 실은 가부장제의 구조 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되니

그동안 까닭 모를 죄책감과 자기혐오로 시달렸던 날이 억울하다

치즈코가 밝혀준 원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수는 없지만 내 문제를 설명할 언어를 획득하는 일은 언제나 도움이 된다

그는 어머니와 딸이 마주보고 서로가 다른 사람임을 통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엄마는 내 모습에 자신을 비추며 이루지 못한 꿈을 투영하지 말아야 하고, 나는 엄마를 내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언으로 삼는 것을 멈춰야 한다

 

책 맨 처음에 있는 작가의 말이 인상 깊었다

"만약 당신의 경험을 설명해주는 신선한 언어를 얻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여자의 경험을 언어화하기 위해 노력해온 페미니즘이 그동안 당신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실망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치즈코의 책이 나에게 아주 신선하게 와닿았으므로, 페미니즘은 그동안 나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나보다

이렇게 명쾌하게 여성혐오의 원리를 설명해주는 책이 번역되어 있음에도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그다지 많은 사람에게 도달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이 책을 번역한 나일등씨 마저도 그렇다 

옮긴이의 말을 읽는데, '보슬아치'가 한국 남성 경험의 언어화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당황스러웠다

'보슬아치'라는 말에 여성혐오가 있음을 비판하는 듯한 스탠스를 조심스럽게 취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남자도 고생이 많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인상은 숨겨지지 않았다

찾아보니 물론 나일등씨는 남자였다

이런 책을 번역하려면 공부도 많이하고 이론을 빠삭하게 분석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워지지 않는 것이 여성혐오구나 싶었다

인터넷에 좀 검색해보니, 저자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독자들이 옮긴이의 말에 대해 항의해서 저자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고

출판사와의 협의를 통해 해당 부분 삭제와 리콜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1판 1쇄라 문제의 부분이 그대로 남아있던 것이었다 ㅋㅋㅋ

여성혐오는 어디에나 있다는 치즈코의 주장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증거하고 있어서 좀 웃겼다

책을 읽고 여성혐오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나름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내 안에도, 심지어 옮긴이의 말 안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치즈코는 페미니스트가 여성혐오자라는 주장에 쾌활하게 긍정한다

여성혐오적 사회에서는 누구도 여성혐오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페미니스트는 자기 안의 여성혐오를 인식하고 맹렬하게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

저자는 자신이 개념을 설명할 뿐, 그것이 현실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개념은 현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점도 지적한다

저자에게 맹렬하게 맞서 싸울 무기를 하나 받은 든든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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