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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작가의 단편집 노랜드를 읽었다
천 개의 파랑이라는 장편을 인상깊게 봤었다
기술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 속에서 인간이 어떤 상처를 입을지,
그 상처 속에서 또 어떻게 서로를 치유해나갈지 이야기한다
SF장르지만 과학보다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 점이 참 좋았다
'따뜻한 외로움'
소설집을 다 읽고 들었던 나의 감상이다
하얀 설원이 그려진 표지처럼 차갑고 포근하다
차가운 세상에서 서로를 꿋꿋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각 단편들은 대부분 반쯤, 아니면 거의 다 망해버린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그 곳에서 사람들은 아파하지만 또 서로를 지켜주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모든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그러나 마냥 천진하지도 않은 정서가 기분 좋았다
총 열 편의 소설이 실려있는데, 그 중 마음에 들었던 네 개의 이야기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흰 밤과 푸른 달>
인체 강화 시술을 받아 외계 생명체가 침공한 지구를 지켜낸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후 그 위험한 신체 능력 때문에 인간들의 불안한 눈초리를 받게 되고,
결국 골칫덩이가 된 그들은 지구를 떠나게 된다
이야기는 시술을 받은 명월을 배웅하러 온 강설의 이야기다
만성적인 외로움을 타는 둘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좀처럼 솔직하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명월은 강설을 지키기 위해 괴물이 되었지만 강설은 변해버린 그녀가 낯설게 느껴지기만 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기 힘든 늑대인간과 인간 연인의 딜레마를 공상 과학의 틀에서 풀어냈다
흰 눈이 오는 가운데 소녀가 소녀였던 늑대를 만나러 간다
명월에게 얼마가 걸리든 언젠가 꼭 돌아오라고 먼 미래의 재회를 약속한다
<바키타>
쓰레기를 모조리 먹어치우는 외계 생명체 '바키타'를 사람들은 환경 오염의 완전한 해결책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쓰레기 이외의 것도 먹어치우기 전까지는
지구를 덮고 있던 인간 문명의 흔적은 사라지고 바키타는 환경을 해치지 않는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 살아간다
인간은 바키타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원시적인 삶을 사는 형태로 진화한다
냉동되었다가 깨어난 주인공은 원시인이 된 후손들의 삶을 관찰한다
사람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반전시켜 보여주는 이야기다
바키타는 마치 사람이 숲을 벌목하듯 원시인들을 죽이고,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애완인간을 데려간다
인간이 평소에 하는 일을 바키타의 모습을 빌려 보여주었을 뿐인데 소름끼친다
다른 생명들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하는 일이 그렇게 보이겠구나 싶었다
문학적 상상력은 때때로 이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를 다시 보게 한다
<제, 재>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질환이지만
창작의 세계에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주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선량한 지킬이 사악한 하이드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이드의 입장이 어떤지 사람들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는 사라져 마땅한 그림자일 뿐이고, 지킬의 몸을 불법적으로 점유한 영적 법법자다
이 이야기의 '제'는 천재적인 주 인격 '재'에 딸려사는 처지로
재가 똑똑한 두뇌로 과학계의 이목을 한몸에 받고 있을 때
뒤에 숨어서 살아야하는 껄끄러운 존재다
외출도 사람을 만나는 일도 절대 하지 못하며,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은 오직 재의 것이다
부모님조차 불편해하는 제를 유일하게 아끼는 건 동생인 선
냉정한 천재인 재보다 평범하고 다정한 제를 사랑하는 선은
제를 영원히 없애려는 재의 계획을 제에게 알려준다
제는 어쩌면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순리에 맞는 게 아닌지 고민한다
재와 달리 똑똑하지도 재능도 없는 제는 정녕 살아갈 가치가 없는 걸까?
요즘 사회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똑똑한 의대생의 죽음은 비극이고 일하다 죽은 가난한 노동자는 알 바 아니다
목숨에 쉽게 가치를 매기고 능력주의라는 말로 감싼 폭력을 휘두른다
"재가 천재인 것과 네가 사는 건 다른 거야. 재가 천재여서 네가 죽어야 한다는 건 정말 다른 문제야."
"나한테 형제가 있을 거라면 남을 죽인 천재보다 그냥 네가 훨씬 좋아."
"네가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자고."
이런 사회를 사는 나에게 선의 말이 너무 따뜻하게 와닿았다
목숨의 값을 함부로 매기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선의 말은 제를 향한 것이었지만 마치 사회를 향한 유쾌한 반란 선언처럼 들렸다
<이름 없는 몸>
주인공은 잊혀져가는 깊은 산골 마을에 시집 온 외국인 신부의 딸이다
모두 그곳이 아이가 살 곳은 못된다고 했다
음침하고 폐쇄적인 그 마을을 주인공의 어머니가 몰래 도망쳐 나오려던 그때,
놀랍게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차마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산모를 떠나지 못하고 그를 돕는다
주인공과 '너', 그리고 어머니들은 그 끔찍한 마을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버티고 또 버틴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생각난 영화가 하나 있었다
폐쇄적인 시골에서 가족과 이웃에 의해 학대당한 여성이 피의 복수를 하는 내용인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다
책에서도 '너'의 아버지가 가족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마을의 누구도 막지 않는다
오히려 그 폭력에 은근히 동조하기까지 하고, 오히려 아버지를 불쌍히 여긴다
주인공은 죽은 '너'를 자기 손으로 묻고 넓은 세상으로 나갔는데
다시 돌아온 마을에는 '너'가 다시 살아있다 안개 낀 눈을 한 채로
'너'는 마을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었고 마을에 아무도 살아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웃으며 죽음을 맞는다
좀비물이라는 장르를 유독한 가부장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활용한 점이 정말 참신하고 강렬했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과 조금 다른 점은, 김복남은 친구 해원과 결국 연대를 이루지 못했지만
이름 없는 몸의 주인공과 '너'는 폭력적인 환경에서도 서로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점이다
힘없고 외로운 여성들의 연대는 언제나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주제다
물론 현실의 여성들이 언제나 연대하는 것은 아니다
속이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며 꼭 이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문학이 현실의 반영인 만큼 문학을 읽은 사람들이 또 현실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민폐끼치다가 남자에게 구해지는 여자' 이야기 대신 여자와 여자가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를 읽고 자란 사람들이 만들어 나갈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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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짜리 소설의 후기를 쓰려니까 골치가 아프다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길고 메시지도 많고
무엇보다 초반에 읽었던 부분은 기억도 잘 안난다는게 문제다
그래서 그냥 대강 마음에 들었던 포인트만 정리하려고 함
1. 주제의식
인간의 자유의지와 행복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
대충 이런 주제였던 것 같다
황제 라세는 사람이 죽고 죽이는 것을 그만두도록 하기 위해
1만 6천년동안 사람의 운명에 인위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두고 다투는 다양한 관계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마지막에 인물들은 황제가 사람에게 앗아가려고 하는 죄를 되찾는다는 결정을 한다
죄를 되찾는다니 조금 이상한 소리 같지만
물이 끓고 어는 것에 도덕을 따질 수 없듯이, 죄가 없으면 도덕도 없어진다는(?) 이야기 같다
죄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해준다는 것
주제의식이 작품에서 상당히 비중있게 언급되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쉽고 선명하게 나타나있지는 않아서 무슨 소리인지 계속 고민하면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치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모호함이 책의 매력 같았다
2. 여성캐릭터
이 책이 매력적이었던 이유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좋은 여성캐릭터들
전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는 아예 성별이 반전된 나가 사회를 보여줬는데,
이번에는 나가 이야기는 많지 않지만 중요하게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수는 더 많고 다채롭다
주인공 격인 엘시와 대적하는 장군 베로시 토프탈은 굳이 여자라고 말하지 않으면
전혀 알지 못할 정도로 성별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이 쓰여졌다
두억시니에 대한 학문적인 호기심이 강하고, 야망있으며 전술적으로 뛰어난 장군이다
또 니어엘 헨로는 툭하면 주정뱅이가 되지만 가공할만한 위력을 가진 활 기술을 가졌고
천재적인 작전 수행 솜씨를 가진 사람이다
책에서 가장 정이 많이 갔던 캐릭터다 짠한 가족사까지 있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캐릭터임 ㅠ
암살공의 사생아로 등장하는 헤어릿은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떠날 수 없는 묘한 처지의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도깨비감투를 가지고 더는 이용당하지 않고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려한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낮은 신분의 소녀를 지키겠다 맹세하는 이이타를 보고
그를 돕겠다고 스스로의 결정을 내린다
배다른 형제인 스카리 빌파가 도깨비감투를 가지고 망나니짓만 하고 다니는 것과 대조적이다
비나간의 왕으로 스스로를 추대한 지키멜 퍼스도 중반부 부터 상당히 비중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치밀한 음모로 할아버지를 끌어내리고 스스로 왕이 된 손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도덕이고 목숨이고 뭐든 이용하는 추진력이 대단하다
특히 후반부에 납치극 벌이는 장면이 인상적... 완전 도라이같은 인물이다
3. 세계관
탄탄한 세계관이란 표현이 진부하지만 그보다 어울리는 말이 없다
탄탄하다 못해 단단해서 어딘가 실존할 것 같은 세계관이다
암살성이 있는 도둑들의 고장인 발케네, 무사들의 고장인 무향 규리하
제국 전역으로 세력을 넓힌 유료도료당과 그에 경쟁하는 자유무역당
단순한 선악구도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개성과 신념을 가진 세력들이
서로 반목하고 협력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동양이나 한국의 전통적인 요소가 분명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중세부터 이미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각 지방을 쥐고있는 권력자가 각각 따로 있는 아라짓 제국과는 성격이 다르게 느껴졌다
하늘치라는 소재를 허투루 쓰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든다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을 보면 꼭 거대한 하늘을 나는 동물을 넣어놓고 멋있는척하다가
결국 그냥 간지나는 배경 아니면 생긴 것만 멋진 전용기정도의 역할만 부여한다
껍데기만 조금 바꿔놓고 판타지라고 우기는 이런 작태를 매우 싫어하는 편인데
이 책에서는 하늘치의 역할을 깊이 생각하다 못해 끝없이 파고 들어간 것 같았다
사람이 올라갈 수 있으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생물이 하늘을 날아다닌다면 뭘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그렇다면 '제국의 수도를 그곳에 건설하여 고정된 중앙없는 제국을 건설한다'라고 대답을 내놓는다
판타지라는 장르는 뭐든 마음대로 상상해서 쓸 수 있으니 쉬울 것 같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장르보다 구축하기 어렵다.
세계를 이루는 법칙을 대강 만들면 이야기는 붕 떠보이고 설득력이 없다
소재 하나하나를 선택할 때 그 소재가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작품에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지 깊게 고민한 흔적이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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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록
- 2022. 10. 3. 16:04
1. 음식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며칠 전 잠들기 직전 11시 즈음이었다.
표지와 목차를 넘기자마자 페이지 가득한 음식에 대한 묘사가 나를 허기지게 했다.
매콤하고 야채가 가득 들어간 짬뽕이며 달콤 짭쪼름하고 부드러운 갈비를 미친듯이 갈망하게 됐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한식을 싫어하지도 않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아왔다.
아침에는 간단하게 달걀을 요리해 먹거나 빵을 구워 먹는 편을 선호한다.
외식 메뉴를 고를 때도 한실을 따로 찾아먹지는 않는다.
그랬던 내가 한밤중에 고슬고슬하고 따뜻한 흰쌀밥을 떠올리고 있었다.
결국 배가 고파져서 야식을 참을 수 없게 되기 전에 책을 덮어야만 했다.
다음날 다시 책을 폈을 때도 미셸의 한식 묘사는 계속 내 입맛을 돌게 했다.
내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인지 미식 칼럼을 읽는 것인지 계속해서 헷갈렸지만,
읽다보니 그 두가지가 결국 같은 것을 말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미셸에게 음식은 이제는 없는 어머니와 연결되어있음을 상기시킬 수 있는 대상이자,
상실의 슬픔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또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때 자신의 뿌리를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2. 보고싶은 외할머니
미셸과 어머니의 이야기는 모든 문화권에서 공감할만한 보편적인 것이지만,
특히나 어머니를 가진 한국의 모든 딸들에게는 더욱 와닿을 것 같다.
엄마를 미워하고 부끄러워 하면서 또 사랑하는 복잡미묘한 감정.
책을 읽으면서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많이 떠올랐다.
이 책은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홍차와 마들렌처럼 나를 순식간에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젖게 했다.
그 추억은 큰외삼촌이 멋대로 쓴 추도사의 '자애로운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외할머니는 제멋대로의 독불장군이었지만, 다른 가족들이 내리기 어려워하는 결정을 혼자 턱턱 잘 내렸다.
다른 가족들이 그 결정에 항상 만족했느냐고 물어보면 그 대답은 반드시 긍정은 아닐 것이지만 말이다.
외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2월에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그때 우리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가장 많이 운 사람이었다.
늘 제멋대로에 과대망상적인 걱정을 하는 외할머니에 대해 불평을 하던 엄마가 그렇게까지 슬퍼할 줄은 몰랐다.
외할머니는 특유의 전라북도 억양으로 맘에 들지 않는 물건을 "내쏴"버리라고 자주 말했다.
또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거시기" 좀 가져와보라고 했는데, 엄마는 항상 외할머니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찾아왔다.
외할머니는 미셸의 어머니처럼 냉혹한 비판으로 내 맘을 자주 상하게 했다.
특히나 예민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는 외할머니가 "너 살 좀 빼야 쓰겄다."라고 한 말에 꽤 오랫동안 앙심을 품고 있었다.
내가 어리광을 부리거나 고집을 쓰면, 너그럽게 달래주던 다른 어른들과 달리 외할머니는 "너 그러면 안돼야."라고 하면서 어린 내가 울든지 말든지 웃음을 터트렸다.
미셸이 어머니에게 가지고 있는 그리움이 꼭 내가 외할머니에게 가진 것과 같게 느껴졌다.
나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모두가 그를 자애로운 어머니이자 천사같은 여사님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그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이 올바른 추모의 방식처럼 느껴졌다.
욕심 많고 강단 있으며, 상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인 애정을 퍼부었던 외할머니로 기억하고 싶었다.
미셸이 어머니의 묘비에 loving 대신 lovely라는 말이 적히기를 바랬던 것처럼 말이다.
1. 케이건 드라카
키탈저 사냥꾼의 후예, 아라짓 왕족, 나가 살육자
각각의 정체성은 어우러지기 보다 책이 진행될 수록 더욱 더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모순된 정체성을 한 몸에 가진 인간. 칼 두개를 하나로 합한 바라기를 든 인간.
친절하면서도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이성적이면서도 돌아있는 것 같은 상반된 성격을 가진
이 사람은 키탈저 사냥꾼들이 좋아하는 모순을 인간으로 만든 것 같다.
그의 이런 모습은 등장인물과 독자에게 끊임없는 혼란을 준다.
이 이야기가 주는 큰 과제 중 하나는 케이건 드라카라는 인물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케이건 드라카의 과거, 그가 사랑했던, 그리고 증오하는 대상에 대해 알게된다.
그가 증오했던 대상은 나가라는 종족 전체. 나가의 배신과 속임수로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내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남성. 어디서 백번쯤 본 내용 같지만 놀랍게도 케이건 드라카는
'자기연민에 빠진 추레한 중년남' 클리셰를 빗겨간다.
그가 뻔한 캐릭터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변명하거나 이해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도깨비 비형은 케이건이 나가를 죽이고 먹는다는 것을 알고, 그 행위를 비판하며 멈출 것을 요구한다.
케이건은 그의 비판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멈출 생각은 없다.
멈추고 싶다면 자신을 죽여 멈출 기회를 주겠다는 무서운 말을 한다.
그의 살짝 돌아버린 것 같은 섬뜩한 매력은 그 차분하게 무서운 소리를 하는 점에서 오는 것 같다.
2. 나가
각 종족들의 세계관이 그저 인간의 겉모습만 바꾼 피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꽤 구체적이고 있음직하게 그려져 있는 점이 좋았다.
상상력은 세심한 관찰력과 결합될 때 가상의 세계에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도깨비라는 종족은 도깨비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날아다닐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종족이다.
그런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들이 다른 종족을 모두 정복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피를 무서워하기 때문.
레콘은 엄청난 괴력을 가진 호전적인 종족이나, 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자이기 때문에 국가를 이루지 않는다.
'판타지'라는 장르에 무책임하게 개연성을 묻어가는 대신 이 종족들이 하나의 대륙에 공존할 수 있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섬세한 관찰력으로 보고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여성이 가문의 상속자가 되는 나가들의 여존남비 세계관은 언뜻 이갈리아의 딸들을 떠올리게 되지만
남녀 구도를 뒤바꾼 풍자소설의 인상이 강한 이갈리아 딸에 비해,
눈물을 마시는 새는 여성 상속제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설득력 있을지 고민한 흔적이 크다.
아기의 성장속도가 아주 느린 인간의 경우 여성이 임신하고 아이를 기를 때
그를 보호하고 먹을 것을 구해올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결혼제도라는 것이 성립한다.
그러나 나가는 그러한 보호의 역할을 가문이 완전히 대신하기 때문에 결혼 제도가 필요 없다.
남성이 여성과의 결혼을 통해 종속되는 그림도 상상해볼 수 있겠으나, 그것은 그 세계에서 낭비일 수 있겠다.
남성은 체액을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으나 여성의 임신은 몇달의 기간을 거치기 때문이다.
남성이라는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또한 그들에게 아무런 권위를 주지 않기 위해서
가문의 일원이 여성과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남성만으로 이루어진 모습이 흥미롭다.
나가라는 종족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발견되는 신화에서 따온 것같다.
나가는 신화에서 인간의 상체와 뱀의 하체, 또는 머리가 일곱개 달린 뱀으로 묘사되고는 한다.
그래서 나는 나가들의 도시를 머릿속에 그려볼 때 앙코르와트를 떠올리고는 했다.
열대 지방의 빽빽한 밀림 속에 있는 도시라 꽤 어울리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여행갔던 앙코르와트의 유적에는 돌로 조각된 나가가 꽤 많았다.
3. 눈물을 마시는 새
눈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빨리 죽는다고 한다. 몸에는 해로워서 모두 흘려버리는 것을 마시니 오래 살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세계관에서 눈물을 마시는 새는 곧 왕을 뜻한다.
모든 사람들의 원망이나 소망 따위를 받아내는 존재를 이 책에서는 진정한 왕이라고 하는 것 같다.
왕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아니다.
솔직히 읽으면서 그래서 왕이 왜 중요한데?? 라는 생각을 계속 했다.
여전히 왜 사모페이가 왕이 되어야 하는지, 그것이 이야기에서 왜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4.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이야기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
세계관의 모두가 알고있는 오랜 격언 같은 것으로, 한 종족을 상대하려면 다른 세 종족이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격언은 현실의 물리 법칙처럼 이야기의 세계관에서 단단하게 작용하는 규칙이다.
말 그자체로 멋지기도 하지만, 이런 부분 때문에 세계관이 더욱 치밀하게 느껴졌다.
판타지는 작가의 상상을 마음대로 그려내기 때문에 쓰기 쉬울 것 같지만
오히려 정해져있는 규칙이 없으므로 어설퍼지기 십상이다.
이런 규칙 덕분에 이야기는 작가의 어설픈 망상이 아닌, 어딘가에 실존하는 견고한 세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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