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랜드(2022)

 

천선란 작가의 단편집 노랜드를 읽었다

천 개의 파랑이라는 장편을 인상깊게 봤었다

기술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 속에서 인간이 어떤 상처를 입을지,

그 상처 속에서 또 어떻게 서로를 치유해나갈지 이야기한다

SF장르지만 과학보다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 점이 참 좋았다

 

'따뜻한 외로움'

소설집을 다 읽고 들었던 나의 감상이다

하얀 설원이 그려진 표지처럼 차갑고 포근하다

차가운 세상에서 서로를 꿋꿋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각 단편들은 대부분 반쯤, 아니면 거의 다 망해버린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그 곳에서 사람들은 아파하지만 또 서로를 지켜주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모든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그러나 마냥 천진하지도 않은 정서가 기분 좋았다

총 열 편의 소설이 실려있는데, 그 중 마음에 들었던 네 개의 이야기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흰 밤과 푸른 달>

인체 강화 시술을 받아 외계 생명체가 침공한 지구를 지켜낸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후 그 위험한 신체 능력 때문에 인간들의 불안한 눈초리를 받게 되고,

결국 골칫덩이가 된 그들은 지구를 떠나게 된다

이야기는 시술을 받은 명월을 배웅하러 온 강설의 이야기다

만성적인 외로움을 타는 둘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좀처럼 솔직하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명월은 강설을 지키기 위해 괴물이 되었지만 강설은 변해버린 그녀가 낯설게 느껴지기만 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기 힘든 늑대인간과 인간 연인의 딜레마를 공상 과학의 틀에서 풀어냈다

흰 눈이 오는 가운데 소녀가 소녀였던 늑대를 만나러 간다

명월에게 얼마가 걸리든 언젠가 꼭 돌아오라고 먼 미래의 재회를 약속한다

 

<바키타>

쓰레기를 모조리 먹어치우는 외계 생명체 '바키타'를 사람들은 환경 오염의 완전한 해결책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쓰레기 이외의 것도 먹어치우기 전까지는

지구를 덮고 있던 인간 문명의 흔적은 사라지고 바키타는 환경을 해치지 않는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 살아간다

인간은 바키타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원시적인 삶을 사는 형태로 진화한다

냉동되었다가 깨어난 주인공은 원시인이 된 후손들의 삶을 관찰한다

사람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반전시켜 보여주는 이야기다

바키타는 마치 사람이 숲을 벌목하듯 원시인들을 죽이고,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애완인간을 데려간다

인간이 평소에 하는 일을 바키타의 모습을 빌려 보여주었을 뿐인데 소름끼친다

다른 생명들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하는 일이 그렇게 보이겠구나 싶었다

문학적 상상력은 때때로 이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를 다시 보게 한다

 

<제, 재>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질환이지만

창작의 세계에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주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선량한 지킬이 사악한 하이드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이드의 입장이 어떤지 사람들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는 사라져 마땅한 그림자일 뿐이고, 지킬의 몸을 불법적으로 점유한 영적 법법자다

 

이 이야기의 '제'는 천재적인 주 인격 '재'에 딸려사는 처지로

재가 똑똑한 두뇌로 과학계의 이목을 한몸에 받고 있을 때

뒤에 숨어서 살아야하는 껄끄러운 존재다

외출도 사람을 만나는 일도 절대 하지 못하며,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은 오직 재의 것이다

부모님조차 불편해하는 제를 유일하게 아끼는 건 동생인 선

냉정한 천재인 재보다 평범하고 다정한 제를 사랑하는 선은

제를 영원히 없애려는 재의 계획을 제에게 알려준다

 

제는 어쩌면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순리에 맞는 게 아닌지 고민한다

재와 달리 똑똑하지도 재능도 없는 제는 정녕 살아갈 가치가 없는 걸까?

요즘 사회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똑똑한 의대생의 죽음은 비극이고 일하다 죽은 가난한 노동자는 알 바 아니다

목숨에 쉽게 가치를 매기고 능력주의라는 말로 감싼 폭력을 휘두른다

"재가 천재인 것과 네가 사는 건 다른 거야. 재가 천재여서 네가 죽어야 한다는 건 정말 다른 문제야."

"나한테 형제가 있을 거라면 남을 죽인 천재보다 그냥 네가 훨씬 좋아."

"네가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자고."

이런 사회를 사는 나에게 선의 말이 너무 따뜻하게 와닿았다

목숨의 값을 함부로 매기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선의 말은 제를 향한 것이었지만 마치 사회를 향한 유쾌한 반란 선언처럼 들렸다

 

<이름 없는 몸>

주인공은 잊혀져가는 깊은 산골 마을에 시집 온 외국인 신부의 딸이다 

모두 그곳이 아이가 살 곳은 못된다고 했다 

음침하고 폐쇄적인 그 마을을 주인공의 어머니가 몰래 도망쳐 나오려던 그때,

놀랍게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차마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산모를 떠나지 못하고 그를 돕는다

주인공과 '너', 그리고 어머니들은 그 끔찍한 마을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버티고 또 버틴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생각난 영화가 하나 있었다

폐쇄적인 시골에서 가족과 이웃에 의해 학대당한 여성이 피의 복수를 하는 내용인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다

책에서도 '너'의 아버지가 가족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마을의 누구도 막지 않는다

오히려 그 폭력에 은근히 동조하기까지 하고, 오히려 아버지를 불쌍히 여긴다

주인공은 죽은 '너'를 자기 손으로 묻고 넓은 세상으로 나갔는데

다시 돌아온 마을에는 '너'가 다시 살아있다 안개 낀 눈을 한 채로

'너'는 마을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었고 마을에 아무도 살아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웃으며 죽음을 맞는다

좀비물이라는 장르를 유독한 가부장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활용한 점이 정말 참신하고 강렬했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과 조금 다른 점은, 김복남은 친구 해원과 결국 연대를 이루지 못했지만

이름 없는 몸의 주인공과 '너'는 폭력적인 환경에서도 서로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점이다

힘없고 외로운 여성들의 연대는 언제나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주제다

물론 현실의 여성들이 언제나 연대하는 것은 아니다 

속이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며 꼭 이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문학이 현실의 반영인 만큼 문학을 읽은 사람들이 또 현실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민폐끼치다가 남자에게 구해지는 여자' 이야기 대신 여자와 여자가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를 읽고 자란 사람들이 만들어 나갈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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