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었다
보통의 책은 살짝 녹은 투게더같다
입에서 공기처럼 살살 녹아 넘어가는 아이스크림처럼 글이 부드럽게 읽힌다
다만 그만큼 주제의식이 무겁거나 성찰이 깊지는 않다는 인상이다
그래도 나는 읽기 쉬운 책을 좋아하니깐 호불호를 따진다면 호에 가깝다
특히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작은 감정들에 대한 포착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불안>은 보통의 전공분야인 '개인의 내면 성찰'보다 조금 더 거시적인 내용을 포함한다
불안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사회적인 배경, 그리고 그 해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첫번째로, 불안이라는 감정이 단순히 우리의 불안정한 자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쟁사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통의 또다른 주특기인 화려한 인문학적 인용을 통해 설득하고 있다
플로베르부터 토크빌, 루소까지 한가닥하는 사람들을 풍성하게 인용한 것을 보고 있으면
사실 그 사람들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는데 유식해진 기분이 든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 p.78
보통은 불안의 원인을 단순한 개인의 심리적 나약함으로 모는 것을 경계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등장때문에 사람들이 주변인보다 적게 가질 때 불안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했으나 불안에 있어서는 현대인들보다 나은 상태였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열심히 한다고해서 더 나은 지위를 갖거나 부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현대의 능력주의라는 신앙은 누구나 열심히만 한다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모두에게 불어넣었다
이는 현대 사회의 눈부신 발전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에 죄악을 덧씌우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가난할 뿐만 아니라 가난이 자신의 무능력에서 오는 것이라는 자괴감까지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그 불안에 대한 해법 파트가 이어진다
해법이라고 해서 자기개발서마냥 불안을 없애기 위한 지시사항을 쓰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인류가 역사적으로 제시해왔던 불안의 해법 정리본에 가깝다
그 중 예술파트를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다
비극은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 p.191
보통은 비극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불안이란 사회가 그를 존중할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대할 때 생긴다
현실에서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과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나뉘고,
후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에서는 이러한 권력 관계를 반전시킬 수 있다
가장 추악하거나 한심하게 여겨지는 사람조차도 예술의 세계에서는 중요도를 가진 인간으로 그려질 수 있다
플로베르는 빚을 내어 사치를 일삼던 간통녀가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읽고 <마담 보바리>를 썼다
현실에서는 모두 그녀를 한심하고 비도덕적인 인간으로만 여겼으나
플로베르는 소설 속에서 그녀의 결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독자가 그녀에게 경멸만을 갖기 전에 얼른 그녀의 몽상적이고 순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결코 성자는 될 수 없지만 독자는 그녀를 도저히 미워할 수도 없다
예술은 이렇게 평소에 공감할 생각도 필요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에 대한 뜻밖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지위와 관련된 이상 때문에 생기는 불편이 기적적으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치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기후 위성으로 기상 상태의 위기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늘 문제를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용한 것을 가르쳐준다. 그 결과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 p.266
저자의 목적을 가장 명료하게 설명한 대목인 것 같다
이 책은 당장 닥쳐오는 태풍같은 불안을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아무 대비도 하지 못한채 멍청하게 휩쓸려다니고 쓸데없는 곳에 화를 돌리는 일을 피하게 해준다
그것도 아이스크림같은 읽기 편한 문체로 말이다!
떠먹여주는 불안사회 해독서, 안읽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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