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끄러움(1997)
- 독서록
- 2022. 11. 27. 15:56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La Honte)>를 읽었다
지난 번에 읽었던 에르노의 작품인 <남자의 자리>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줄기를 더듬으며
당시 하층민의 생활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이야기였다면,
이 책은 에르노가 사립학교에 진학하면서 느꼈던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직공 출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둔 에르노에게
사립학교에 입학하며 접한 환경은 하늘이 두쪽나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는 그 두 세계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기분을 느꼈다
정체성의 혼란과 교양있는 세계에 대한 선망,
자신의 가족과 동네에 대한 부끄러움을 강하게 느꼈다
'어린 마음에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살았던 우리 정많은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겼다. 아아...아버지 그때는 왜 그 마음을 알지 못했을까.' 식의 신파와 자기연민, 반성의 글이 아니다
어떤 불행포르노도 아니며, 아버지의 죄에 대해 단죄하려는 태도도 아니다
그때 느꼈던 감정에 대해 감정적이지 않은 태도로 재현한다
감정을 감정적이지 않게 다룬다니 모순적이지만 에르노는 그것을 해낸다
자신이 그 당시 느꼈던 부끄러움을 어떤 왜곡없이 전달하려 한다
1.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책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에르노는 "아빠가 내 불행을 벌어놓은 거야."라고 말한다
찾아보니 원어로는 "Tu vas me faire gagner malheur."라고 한다
불행을 벌다(gagner malheur)는 노르망디 지방의 사투리로
공포스러운 일을 겪은 후 영원히 미치거나 불행해진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가 경험한 트라우마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는 말인 것 같다
에르노는 그 사건을 결코 자신에게서 떼어놓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2.
...나는 더 이상 다른 여학생과 같지 않았다.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만 것이다. 순진무구한 사립학교에서는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았고, 그것을 통해 말끝마다 "아무튼 그런 걸 보고 사는 게 불행한 일이야"라는 이야기 속에 범람하는 폭력, 알코올의존증, 정신병의 세계 속에 딱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식으로 소속되고 말았다.
나는 사립학교,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움 속에 편입된 것이다.
에르노의 트라우마는 '부끄러움'이라는 형태로 각인된다
그가 말하는 부끄러움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아니 에르노도 그래서 책으로 썼을 것이다
자신의 부끄러움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3.
세상 어디에도 6월 일요일 사건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가 겪은 사건은 사립학교에서 배우는 모두에게 읽혀도 괜찮을만한 건전한 책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사립학교에서 배운 '올바르고 교양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자신이 실제로 속한 가족과 동네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은
안그래도 남들과 다르면 조바심에 휩싸이고는 하는 사춘기 여자아이가 겪기에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었을 것이다
에르노는 그의 '부끄러움'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계급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속사정을 이야기함으로서 계급의 문제를 재현하는 것은
에르노만이 부릴 수 있는 문학적 마술이다
가난에 대한 통계와 취재 기사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점을 포착한다
4.
선생님과 다른 학생들 앞에 너저분한 차림으로 잠에서 깬 채 나타난 어머니
교양있는 사람들 앞에서 재치있는척 음담패설을 하는 아버지
여행에 익숙치 않아서 덤터기를 쓰고, 돈을 더 내지 않기 위해 선택관광을 하지 않는 아버지와 자신
살다보면 너무나 부끄럽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뇌리에 박혀버리고는 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도 이상하게 아빠와 둘이 영화를 보러가서 핫도그를 주문했던 기억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아빠는 요깃거리로 영화관 매점에서 핫도그를 주문했다
영화관 음식들이 다 그렇듯이 가격은 비싸고 맛은 대충이었고 양은 적었다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나온 형편없는 핫도그를 보고 아빠는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사악한 프랜차이즈의 술수에 별 생각없이 넘어가주는 젊은이들과 달리
아빠는 적당한 돈을 내면 그만큼의 음식을 주는 우리 동네의 식당들에 익숙했다
인심이 후하다고 할 것까진 없었지만 어쨌든 정직한 식당들이었다
터무니없이 비싼 영화관 음식을 무신경하게 들고다니는 도시의 젊은 사람들과
눈뜨고 코를 베여버린 시골쥐 아빠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아빠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조그마한 핫도그를 먹어치웠다
영화관 매점이 형편없다는 점을 미리 경고하지 않아서 아빠가 괜히 우스워졌다는 것이 미안해서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고작 핫도그 한개 따위에 그런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이 열이 뻗치고 뭔가 진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별 거 아니라고 애써 생각했다
그저 아빠가 '창렬'한 핫도그를 시켰던 것 뿐이라고
5.
책이 나온 뒤에는 다시는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 나는 항상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에르노는 보통 사람들이 자기합리화를 통해서 빠져나가버리는
일상의 사소한 부끄러운 순간들을 집요하게 재현하는 고행의 길을 걷는다
그는 정신이 강인한 사람임이 틀림 없는 것이,
보통 사람이라면 이불을 걷어찼을 부끄러운 일들을 책으로 모아서 내기까지 한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아빠의 핫도그 사건이 글감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그것은 이유도 모른 채 감추어져야 하는 찌질함이었고,
될 수 있으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에르노 또한 사립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자신의 가족에 대해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권장하는 책들에는 결코 6월의 사건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르노는 기어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정말인지 용감한 개척자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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