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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1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2010) 1
- 2022.12.20 아노말리(2020)
- 2022.12.18 그들의 말 혹은 침묵(1977)
- 2022.12.16 최애, 타오르다(2020) 1
-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2010)
- 독서록
- 2022. 12. 21. 22:24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읽었다
대중 교양 서적보다는 학술 서적에 가깝지만 예시를 들어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어렵다는 인상은 들지 않았다
우에노 치즈코는 이브 세즈윅이 19세기 영국 문학을 분석하여 남성의 '호모소셜'을 설명한 이론을 일본 사회에 적용했다고 서두에서 설명한다
재미있었던 것이 내가 얼마 전에 19세기 영국 문학인 <드라큘라>를 읽으면서 딱 그런 점을 느꼈던 터라,
역시 너무 노골적이고 솔직하게 언피씨한 작품은 오히려 남성의 심리를 분석하는 요긴한 자료가 된다는 걸 느꼈다
치즈코가 말하기를, 마치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이 아닌 서양인들의 판타지에 대한 교훈적 자료가 되듯,
남자가 여자에 대해 쓴 텍스트들에서는 '여자의 진짜 모습' 대신에 '남성의 성환상'을 관찰 할 수 있다
항상 괜찮은 책만 읽게 되지는 않으니 이런 관점으로 독서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하여간 글이 딴길로 샜는데, '호모소셜'이라는 것이 여성혐오를 설명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개념이다
호모소셜은 대충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알탕연대라고 할 수 있겠다
남성간의 진하고 지독한 연대를 가리키는 말로, 남성간의 성적 사랑을 의미하는 동성애와는 구분된다
남성이 남성이 되기 위해서는 이 호모소셜 공동체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치즈코는 '성'이라는 것이 결코 자연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호모소셜리티는 끊임없이 여성을 타자화 시키며 '남성'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한다
저자는 '자기 마누라 한 명 휘어잡지 못하는 게 남자냐?'라는 흔한 말에서
여성을 지배하지 않으면 남성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닌 '휘어잡는다'라는 말에서는 여성을 종속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여성을 주체로 인정하지 않으며 객체화, 타자화, 멸시하는 것이 여성혐오라고 설명한다
남성됨을 인정받는 남자는 무리에서 서열이 높고, 경제적 이익과 권력을 손에 쥔다
여성혐오를 통해 남성들이 유대감을 나누는 상황은 굉장히 흔하게 볼 수 있다
남성들끼리 있을 때 하는 음담패설, 군대에 가면 총각딱지를 떼야 한다며 성매매 업소에 데려가는 것
음담패설은 정말 어떤 성적 욕구를 채운다기보다는 내가 이렇게 여성을 잘 멸시한다는 훈장같은 것으로
호모소셜의 유대를 끈끈하고 돈독하게 만든다
요즘 한국에서는 '여성들의 연대'가 뜨거운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책이나 영화에서 서로를 질투하고 남성에 집착하는 여자들 대신, 여성들이 서로 돕고 우정을 나누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사실 그런 컨텐츠들을 보면서 조금 낯설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되었다
저자는 남성들의 호모소셜에 비견될만한 여성연대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성연대는 남자들의 의리니 충성이니 그런 말로 포장되지만, 뜯어놓고 보면 모든 것이 경제적 이익 때문이다
남성은 다른 남성들의 끈끈한 유대 안에 들어감으로써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그 이익을 받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회사의 임원은 거의 다 남자다(2021년 상장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단 5.2%)
간단히 말해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는 남자한테 줄을 서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여성을 여성과 연대하게 하는 경제적인 동기가 없는 것이다
뜨거운 마음으로 연대하고 싶더라도 경제적 동기가 없는 연대는 그것을 가진 연대보다 유대감이 약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이렇게 남성의 것만큼 강렬한 여성연대가 출현하지 못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서
한편으로는 최근 진정한 여성연대를 시도하는 사례가 늘고 있음을 언급하며 미래를 낙관한다
나 또한 최근 김초엽, 천선란 같은 한국 여성 작가들의 책에서 새롭게 시도되는 여성연대 서사를 목격했다
아직 현실에 그만큼의 여성연대가 있느냐 묻는다면 확실히 긍정할 수는 없지만
창작이 현실의 반영인 만큼이나 현실도 창작물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남성들의 담타'에 버금가는 끈끈한 여성연대가 등장하길 기대해본다
책에서 또 흥미로우면서도 공감이 많이 갔던 부분은 어머니와 딸에 대한 챕터였다
작가는 근대의 가부장제를 아주 설득력있게 쉬운 언어로 설명한다
근대 이전에 사람들은 대를 이어 비슷비슷한 삶을 살았으므로 자식에게 더 뛰어나게 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에 사회가 격변하며 아버지는 농부였으나 아들은 지식인이 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어머니는 무능하고 자신을 억압하는 아버지를 보며 한탄하고, 그 기대를 아들에게 쏟는다
아들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를 살해하여(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어머니의 기대를 완수할 수 있다
한마디로 아버지보다 성공해서 아버지의 권력을 능가하여 어머니를 구원하는 것
딸은 전통적으로 교육의 기회도 없고 경제적 능력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본디 어머니의 기대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교육을 받고 사회 진출에 있어서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차별이 없어진 지금
딸은 어머니에게 아들의 역할까지 요구받게 된 것이다
그러면 딸이 열심히 해서 성공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상황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모든 어머니와 딸은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경향이 있다
끝나지 않는 동일화가 모녀 관계에서 일어난다
어머니는 딸이 자신처럼 무력하게 살지 않고,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딸이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행복해질 때, 어머니는 질투를 한다(질투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느끼는 자기혐오는 덤이다)
자신은 집구석에서 이렇게나 불행한데, 자신의 분신인 딸은 행복하다는 것이 견디기 쉽지 않은 것이다
아들에게 '너는 이렇게 살지 마라'라고 하는 어머니를 본 적 있는가? 나는 적어도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자신과 동일하다고 느끼는 존재인 딸에게 자신처럼 되지 않을 것을 당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처지에 딸의 책임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 너무 공감이 갔다
우리 엄마를 너무 사랑하지만 때때로 엄마는 남동생에게는 절대 주지 않는 죄책감을 자꾸 나에게 준다
마치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나라는 듯, 그러면서도 그런 죄책감을 딸에게 부과하는 당신을 스스로 미워하며 자제한다
엄마는 나를 응원하지만 동시에 집을 떠나지 않고 자신과 함께 해주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한편 나는 어머니처럼 되기 싫다는 생각을 한다
집에서 경제력없이 집안일을 하고 아빠가 하라는 대로 따르며, 그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이런 감정이 들때 너무 무겁고, 어머니가 미운데 또 미운 감정이 드는 내가 혐오스럽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줄곧 혐오해왔는데, 이 책을 읽고 그것 또한 여성혐오라는 것을 알았다
여성혐오는 여성에게는 자기혐오로 나타난다고 한다
나와 엄마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던 일이 실은 가부장제의 구조 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되니
그동안 까닭 모를 죄책감과 자기혐오로 시달렸던 날이 억울하다
치즈코가 밝혀준 원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수는 없지만 내 문제를 설명할 언어를 획득하는 일은 언제나 도움이 된다
그는 어머니와 딸이 마주보고 서로가 다른 사람임을 통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엄마는 내 모습에 자신을 비추며 이루지 못한 꿈을 투영하지 말아야 하고, 나는 엄마를 내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언으로 삼는 것을 멈춰야 한다
책 맨 처음에 있는 작가의 말이 인상 깊었다
"만약 당신의 경험을 설명해주는 신선한 언어를 얻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여자의 경험을 언어화하기 위해 노력해온 페미니즘이 그동안 당신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실망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치즈코의 책이 나에게 아주 신선하게 와닿았으므로, 페미니즘은 그동안 나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나보다
이렇게 명쾌하게 여성혐오의 원리를 설명해주는 책이 번역되어 있음에도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그다지 많은 사람에게 도달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이 책을 번역한 나일등씨 마저도 그렇다
옮긴이의 말을 읽는데, '보슬아치'가 한국 남성 경험의 언어화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당황스러웠다
'보슬아치'라는 말에 여성혐오가 있음을 비판하는 듯한 스탠스를 조심스럽게 취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남자도 고생이 많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인상은 숨겨지지 않았다
찾아보니 물론 나일등씨는 남자였다
이런 책을 번역하려면 공부도 많이하고 이론을 빠삭하게 분석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워지지 않는 것이 여성혐오구나 싶었다
인터넷에 좀 검색해보니, 저자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독자들이 옮긴이의 말에 대해 항의해서 저자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고
출판사와의 협의를 통해 해당 부분 삭제와 리콜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1판 1쇄라 문제의 부분이 그대로 남아있던 것이었다 ㅋㅋㅋ
여성혐오는 어디에나 있다는 치즈코의 주장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증거하고 있어서 좀 웃겼다
책을 읽고 여성혐오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나름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내 안에도, 심지어 옮긴이의 말 안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치즈코는 페미니스트가 여성혐오자라는 주장에 쾌활하게 긍정한다
여성혐오적 사회에서는 누구도 여성혐오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페미니스트는 자기 안의 여성혐오를 인식하고 맹렬하게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
저자는 자신이 개념을 설명할 뿐, 그것이 현실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개념은 현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점도 지적한다
저자에게 맹렬하게 맞서 싸울 무기를 하나 받은 든든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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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노말리(2020)
- 독서록
- 2022. 12. 20. 11:54
에르베 르 텔리어의 2020년작 <아노말리(L'anomalie)>를 읽었다
공쿠르 상을 수상한 SF소설이지만 인생의 의미에 대한 성찰 어쩌고라고 뒷표지에 써있어서
테드 창 소설처럼 차가운 이과의 언어로 머리를 띵하게 하는 감동이 퍼지는 그런 느낌을 기대했건만
그냥 저냥 읽을 만한 오락 소설 느낌이다... 여행가서 가볍게 한 권 읽기 좋을 듯
주말 아침에 보는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 나올 것 같은 현상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3월에 파리에서 뉴욕으로 가는 에어프랑스 항공기가 엄청난 난기류를 만나고 겨우 무사히 착륙한다
그런데 6월에 같은 항공기가 또 나타난 것이다
완전히 똑같은 탑승객, 흘린 음료수 자국마저 똑같다
갑작스럽게 도플갱어를 마주하게 된 사람들과 주변 인물들이 각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한 내용이 주다
SF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이야기는 풀어가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중요한 것 같다
근데 그다지 나로서는 공감가는 통찰은 아니었다
책에는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많은 탑승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나이지리아의 성소수자 뮤지션 이야기는 좀 흥미롭긴 했는데, 아무래도 당사자성이 부족해서 어디서 아프리카의 성소수자 현실이라는 기사 하나 읽고 쓴 느낌이 강했다
나머지는 사랑 이야기가 많은데 너무 프랑스 남자가 쓴 것 같아서(맞지만) 별로였다
여자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성적으로 묘사하고, 섹시하고 매력적인 여성들이 늙고 찐따같은 남자들을 자꾸 좋아한다
여성 화자의 시점으로 쓰인 챕터들은 누가봐도 '남자가 생각하는' 여자의 생각이 나타나서 위화감이 심했다
인간에 대한 관찰 역량이 전반적으로 부족한데 왜 굳이 이런 형식을 취했는지 모르겠다
'어느날 나의 도플갱어가 나타난다면?'이란 주제는 이제 문학에서 그다지 새로운 주제는 아니지 않은가
아이디어가 무난하다면 디테일로 승부를 봐야할텐데 이 책의 디테일이 뛰어난가? 잘 모르겠다
차라리 현상에 대한 과학적 해석을 제시하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사실 글을 문학이 아닌 사고실험으로 활용하는 부류의 SF소설들은 별로 내 취향은 아닌데
이 작가의 경우에는 본인의 장기가 그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책에서는 비행기가 두번 착륙한 이상현상이 시뮬레이션 설의 근거라고 말한다
시뮬레이션 이론은 지구가 인류의 먼 후손 또는 다른 지적 생명체에 의해 시뮬레이션 되고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한다
흥미로웠는데 책에서 그 이론에 대해서 별로 근거를 많이 제시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그 쪽으로 끝장나게 파봤으면 좀 더 재밌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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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말 혹은 침묵(1977)
- 독서록
- 2022. 12. 18. 22:50
아니 에르노의 1977년작 <그들의 말 혹은 침묵(Ce qu'ils disent ou rien)>을 읽었다
지난 번에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 <부끄러움>,<한 여자>를 읽고 나서, 나는 거의 아니 에르노를 숭배하게 되었다
그가 지구에서 현실을 가장 잘 재현하는 작가라는 확신에 차서 이 책 또한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내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했다
솔직히 1977년에 나왔는데 왜 올해 번역 됐는지 알 것 같다
전성기 작품들에 비해 좀 평범하고 특유의 현실을 날카롭게 관찰하는 눈과 솔직함에서 나오는 강렬한 감정도 없다
하... 그리고 무엇보다 지나치게 '프랑스'적이다
책은 '안'이라는 갓 중학교를 졸업하고 여름 방학을 가지는 사춘기 여자아이가 주인공인데
주된 내용은 안이 어떻게 하면 섹스 한번 해볼까 안달복달 하는 내용이다
주인공 안이 직접 있었던 일을 서술한다는 컨셉인데, 덕분에 시간도 뒤죽박죽이고 글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
안이 인상적으로 읽었다고 언급되는 까뮈의 <이방인>을 오마쥬한 느낌도 있다
근데 솔직히 난 그 형식이 그다지 헷갈리지도 않았고 딱히 어떤 문학적 효과를 불러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멋부린 느낌
어떻게든 촌스러운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가고 싶은 사춘기 여자애의 안달은 익숙한 소재지만
그게 프랑스 배경일때는 섹스가 빠지지 않게 되나 보다
유교국가의 흔한 유교걸로 자라온 나는 안의 이런 소망에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아서 그냥 떨더름하게 읽었다
안이 섹스를 대하는 태도는 좀 흥미롭긴 했다
이 아이는 섹스를 정말 하고 싶다기 보다는, 그냥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친구로부터 앞서간다는 인정을 받고 싶은 거다
사귀는 남자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도 안하면서 그 일에 대해서 엄마와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만 이야기한다
<한 여자>에서도 볼 수 있는, 아니 에르노가 어머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증은 이 소설에서도 선명히 드러난다
사실 너무 <한 여자>에서와 설정이 비슷해서 이것도 자전적 소설인 줄 알았다
에르노는 진짜 어머니와의 관계가 강렬하고 특별했나보다 ㄹㅇ다른 얘기 안하고 맨날 어머니 얘기만 함..
별로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없는데, 나쁜 방향으로 인상적이었던 건 있다
번역에서 자꾸 되도않는 유행어며 속어를 쓰는데 한번도 안써봤으면서 검색해서 넣은 것 같았다
그 단어는 그런 용법으로 쓰면 안된단말입니다 ㅠㅠ 찐사랑을 그렇게 쓰는 사람 없다고요
옮긴이의 말을 보니까 일부러 원문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어색함과 불편함이 들게 옮겼다는데,
그건 알겠지만 일부 속어들은 그냥 틀리게 썼고, 일단 배경이 1977년도인데 그런 말투가 어울릴 턱이 없다
속어에도 문법이 있다 '이건 찐사랑과 닮은 듯했다' 이렇게 쓰는 게 아니라
' A랑 B ㄹㅇ 찐사인듯ㅅㅂ' , '와 쟤네 찐사네' 이렇게 써야한다
아니 에르노도 이런 책을 썼다니
나의 문학적 우상도 초기에는 이런 글을 썼다는 것에 희망을 느낀다
글쓰기는 정말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거구나
나도 희망을 가지고 정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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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애, 타오르다(2020)
- 독서록
- 2022. 12. 16. 23:47
우사미 린의 <최애, 타오르다>를 읽었다
주인공 아카리는 늘 압도당해있는 기분을 느낀다
학업도 교우관계도, 미래 진로 설정도, 남들은 쉽게 하는 일이 아카리에게는 항상 어렵다
그런 아카리가 유일하게 숨을 쉬는 것 같을 때는 혼성 아이돌 그룹의 멤버 마사키를 좋아할 때다
같은 굿즈를 3개씩 사고, 무리를 해서라도 모든 콘서트와 팬미팅에 참석하며
앨범을 사면 주는 투표권으로 최애를 1위로 만들기 위해 무리한 소비를 감행하는 아카리
일반인 뿐만 아니라 아이돌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아카리는 맹목적으로 애정을 쏟아붓는다
아이돌을 좋아하느라 가족과 학교, 자신의 미래를 내버린 채 산다
덕질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일부 부모나 선생들은 덕질을 멈추게 하면 아이가 정상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과관계를 잘못 파악한 결론이다
"반년 넘게 시간이 있었지. 왜 아무것도 안 했니?"
"못 한 거야."
내가 대답하자 엄마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콘서트에 갈 여유는 있으면서."
어쨌든 나는 몸을 깎아 쏟아붓는 수밖에 없다. 최애는 내가 살기 위한 수단이었다. 생업이었다.
아이돌 때문에 아이가 이상해진 것이 아니라, 죽지못해 간신히 살고 있는데 아이돌이 겨우 삶을 붙들어 놓는 것이다
아카리의 어머니는 아카리가 여유가 있어서 콘서트에 간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갔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카리는 자신의 최애 마사키를 척추라고 표현한다
없으면 곧바로 쓰러져 버릴, 자신의 몸을 지탱하는 중심
일상에서 아카리는 늘 기력이 부족하고 모든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다
타고나길 그렇게 난 아카리는 세상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
다른 사람은 쉽게 해내는 일이 벅차서 게으르다고,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혼이 난다
최소한을 해내려고 힘을 짜내도 충분했던 적이 없었다. 언제나 최소한에 도달하기 전에 의지와 육체의 연결이 끊어진다.
깎아도 뽑아도 또 자라는 것과 왜 영원히 마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항상 그랬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그랬다.
이런 아카리의 고민에 공감이 갔다
남들은 쉽게하는 노력이 내게는 생각만 해도 막막하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정신머리를 고쳐먹으면 된다고 수백번을 다짐해도 결국 남는 건 난 할 수 없다는 자괴감 뿐이다
'넌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거야'라는 말이 자극이 되기 보다 아픔이 된다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일을 못하는 나는 병신인가하는 비뚤은 생각만 들고,
그걸 또 건강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뚤게만 보는 내가 등신같다
아카리가 유일하게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듣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곳은 덕질 뿐
아이돌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아카리가 심적으로 이해가 가는 이유다
언제나 자신이 관계를 망친다고 생각하는 아카리는 아이돌에게만큼은 무한한 애정을 걱정없이 쏟을 수 있어 좋아한다
내가 뭔가 저질러서 관계가 무너지지도 않는, 일정한 간격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끝없이 느끼는 것이 평온함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애를 응원할 때, 나라는 모든 것을 걸고서 빠져들 때, 일방적이라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충족된다.
나 또한 아이돌을 좋아할 때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것이 좋다
보통의 사람 관계에서는 내가 한 사람에게 애정을 가져도 그 사람이 똑같이 나를 좋아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연애 관계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친구 가족 등 모든 관계에 해당된다
아이돌과 팬의 일방적인 관계에는 거절당하는 상처가 없다
그런데 아카리를 지탱하던 유일한 척추인 아이돌 마사키가 어느 날 '타오른다'
일본에서는 사고를 쳐서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는 것을 '타오른다'고 한다고 한다
마사키가 팬을 때렸다 게다가 그 일에 대해 부정하지도 않는다
바로 여기서부터 책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카리의 중심이 서서히 무너지는 이야기
붕괴는 처음부터 빠르게 진전되지는 않는다
사고를 친 아이돌의 팬들이 으레 그렇듯이 오해가 있었을 거라며 정신승리를 하고,
최애를 공격하는 사람들로부터 최애를 보호하며 오히려 결속을 단단하게 다진다
얼핏보면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보인다
균열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그룹의 인기 투표 결과가 공개되었을 때부터다
언제나 1위 자리에서 환히 웃던 마사키가 최하위의 성적을 받자 아카리는 그제서야 무너져버리고 만다
최애가 사고를 친 순간에는 어떻게든 팬들끼리 똘똘 뭉쳐 했던 정신승리가 깨진다
최애가 아이돌로서 몰락했다는 객관적인 지표에 아카리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 와중에도 내가 앨범을 몇 장만 더 샀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아카리다
내가 봐도 환장스러운데 아카리와 함께 사는 가족들은 말도 못할 것이다
아카리가 이해가는 면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모두 이해받을 만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아카리는 학교에 너무 자주 빠져서 결국 중퇴를 결정하게 되고, 그 길로 가족들에게 떠밀려 독립한다
음식물에 곰팡이가 피고 물건에 먼지가 쌓이도록 치우지 않은 방에서 아카리는 최애만 본다
그룹이 해체를 발표하자 어쩐지 아카리는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다
아카리는 최애의 상징색인 파란색으로 온 몸을 감싸고 마지막 콘서트에 결연하게 향한다
파란 야광봉의 바다, 수천 명을 수용한 돔이 비좁게 느껴졌다. 최애가 우리를 따뜻한 빛으로 감싼다.
그렇게 콘서트가 끝나고 그룹은 해체, 마사키는 연예계를 은퇴한다
그러지 말아줘, 내게서 척추를 빼앗아가지 마. 최애가 사라지면 나는 정말로 살아갈 수 없다. 나는 나를 나라고 인정하지 못한다.
최애의 노래를 영원히 내 안에서 울리게 하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고 난 뒤 곁에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최애를 파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다. 최애 없는 인생은 여생일 뿐이다.
척추가 없어진 이제 아카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
무작정 최애의 집으로 달려간다
그 곳에서 최애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베란다로 빨래를 들고 나오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카리는 그 여자보다 빨래가 더 신경쓰인다
나를 명확하게 아프게 한 것은 그 여자가 안고 있던 빨래였다. 내 방에 있는 엄청난 양의 파일과 사진, CD, 필사적으로 긁어모은 수많은 것들보다 셔츠 단 한 장이, 겨우 양말 한 켤레가 한 사람의 현재를 느끼게 한다.
이 감정이 이해갈듯 말듯 슬펐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 사살 당하는 느낌
그래서 내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고 느끼는 감정
나도 덕질하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고 관둔 일이 있다
탈덕(연예인을 좋아하는 일을 그만 두는 것)의 순간은 항상 뜻밖이다
아이돌이 사고를 치거나, 무대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아니라
갑자기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구나, 그저 환상이었구나 느낄 때다
아카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몇달째 방치해서 엉망진창인 집을 치우기 시작한다
기어 다니면서, 이게 내가 사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이족보행은 맞지 않았던 것 같으니까 당분간은 이렇게 살아야겠다. 몸이 무겁다. 면봉을 주웠다.
자신의 척추라고 생각했던 최애를 떼어낸 아카리는 이제 기어다니는 수밖에 없다
언뜻 보면 절망적인 결말같지만, 그래도 희망적인 끝이다
늘 누워만 있던 아카리가 자신의 힘으로 아주 미약하지만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힘내라는 말 대신 아카리에게 그걸로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심스럽지만, 나 또한 저렇게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경험이 있기 때문에
움직일 용기를 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결심인지 안다
개판인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아카리가 책 마지막에 드디어 엉망진창인 방을 청소하기 시작한 일이 희망적이라고 생각한 이유다
여담으로 책을 읽으면서 아니 에르노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 에르노는 글을 통해 자신이 자라온 하층 계급의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회복과 고발을 동시에 하려고 한다
하층 계급이 마냥 천하다고 비난 받길 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현실과는 다르게 행복하기만 했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복합적인 입장을 가진 글은 쓰기가 어렵다
나쁘면 나쁘고 좋으면 좋은거지,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 라는 반응을 얻기가 쉽다
오타쿠 또한 사람들의 고운 시선을 받는 집단은 아니다
그들의 광적인 열광과 몰입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쉽게 비하되고는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타쿠들은 자기들 집단 내부의 곪아있는 이야기를 잘 꺼내지 못한다
꺼내는 순간,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면서 더 큰 비난과 편견으로 위협받는다
대부분의 오타쿠들은 자신을 열심히 변호하면서 글을 쓴다
"아이돌에게 유사 연애를 하지 않는다, 그저 건전한 취미 활동일 뿐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건강한 행위다"
그런 류의 글을 읽으면 내가 아는 덕질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덕질에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런 묘사가 내가 보았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았다
덕질을 하면서 미래 따위는 될 대로 되라는 태도로 대책없이 아이돌에 모든 자아를 위임한 사람들을 많이 봤다
솔직히 삶이 불행하고 애정이 결핍돼서 아이돌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사람도 많았다(당연히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우사미 린은 아니 에르노처럼 어떤 변형없이 오타쿠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무리한 소비를 하면서도 서로 어쩔 수 없었다고 다독이고, 현실을 내팽개치는 것을 훈장처럼 여기는 그들의 현실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시선에 비판만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지 집요한 심리 묘사로 독자에게 설득력을 제공한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이 태어날 때부터 무거웠던 아카리는 최애라는 척추로 겨우 살아가는 인물이다
덕질이 나를 망치고 있지만 동시에 나를 살려 놓는다
마치 무엇인가에 중독되는 심리와 비슷하다
(물론 일반적인 덕질이 그렇게 유해하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 병적인 덕질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
어떤 쾌락에 대한 중독은 사실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개판인 삶을 눈뜨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고, 쾌락을 차단하면 적나라한 현실이 드러나서 멈추기가 두려워진다
이런 안쓰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나친 미화나 비난 없이 균형을 맞추며 써내려가는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아이돌 덕후로서 공감가는 소재 때문에 책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현실을 묘사함에 있어 머리를 띵하게 만들 만큼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다
이렇게 무미건조한 문체로 강렬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사미 린의 다음 책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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