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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6 스커트 밑의 극장(1991) 1
- 2023.01.19 페미니즘의 도전(2005)
- 2023.01.16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0)
- 2023.01.10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2020)
- 스커트 밑의 극장(1991)
- 독서록
- 2023. 1. 26. 15:29
우에노 치즈코의 <스커트 밑의 극장>을 읽었다
지난번에 저자의 <여성혐오를 혐오하다>를 읽고 몹시 감탄했었는데, 이 책이 그 책에서 자주 언급되어서 궁금했다
절판이라 꽤 번거롭게 구했는데 200페이지 짜리라 후루룩 읽어버려서 허무한 기분
어그로 가득한 제목이 인상적인 이 책은, 실은 속옷이라는 복식의 역사와 문화적 함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매우 학술적인 내용이긴 한데 또 어떤 면에서는 엄청 발칙하고 하여간에 공공도서관에서 굳이 놔두고 싶어할 종류의 책은 아니다
학술 도서의 주된 구매처가 개인보다는 도서관임을 떠올려보면, 이 책의 절판이 그리 놀랍지는 않다
팬티 사진이(물론 학술적 참고 목적이다) 가득한 책을 누가 도서관에 두고 싶어하겠는가
하여간에 나도 처음 펼쳤을 때 팬티 사진이 너무 많이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ㅋㅋㅋㅋㅋ
읽으실 분들은 개인적인 공간에서 혼자! 읽으시길
치즈코라는 학자의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성적인 주제를 터부시하거나 완곡하게 애둘러 말하는 대신에
아주 대담하고 직설적으로 담론의 정 가운데 세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몇몇 남성 학자나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지나치게 도착적이고 성적인 것에 과다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성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그 중요성을 너무 간과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티비에서 케이팝의 성공 요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하는데, 전문가랍시고 나온 사람들이 케이팝은 평화와 다양성에 대한 메시지를 세계에 전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한다
정말인지 솔직하지 못하고 본질에 1도 닿아있지 않은 다큐멘터리였다
평화와 다양성으로 덕질을 할 사람들이면 간디를 사랑했겠지
완성도 높은 댄스 음악과 꼭 맞는 잘 짜여진 퍼포먼스, 그리고 그로 인해 극대화된 성적 매력
내가 보기에 아이돌 산업에서 성적 어필을 빼고 이야기하는 건 그냥 앙꼬없는 찐빵 얘기나 다를 게 없다
물론 다른 요소들도 훌륭하고 성공에 기여를 했겠지만, 세상에 성적매력이 없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음?
아이돌만 그런게 아니라 세계적 히트를 쳤던 가수들은 다 그랬다 엘비스 프레슬리도 그랬고 비틀즈도 그랬다
성적 매력만을 주목하게 되면 가수의 격이 낮아지는 것 같아 굳이 언급은 안하지만, 하여튼 성공한 가수들은 섹시하다
하여튼 성(姓)이라는게 하도 자극적이다보니까 좀 극과 극인 것 같다
프로이트마냥 모든 걸 성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거나, 아예 거세된 것처럼 언급을 하지 않거나 한다
그런 면에서 치즈코는 성을 담론의 중심으로 두지만 담백하게 다룸으로서, 이것이 누군가의 도착적인 망상이 아니라 학문적 성격을 띈 글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책의 초반부는 여성의 속옷이라는 복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여러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우선 지금 현대인들이 입는 '팬티'라는 형태의 속옷은 결코 오래된 것이 아니다
치즈코가 일본의 속옷 복식의 역사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가랑이에 달라붙지 않는 헐렁한 속바지 형태의 속옷을 입었다고 한다
단지 월경을 할 때만 훈도시 같은 T자 형태의 면으로된 천을 둘러 피를 받아 냈다고 한다
속옷이 몸에 달라붙으면 당연히 떨어져 있는 경우보다 쉽게 더러워 질 것이다
물이 귀하고 세탁을 자주 하기 어려웠던 근대 이전의 환경에서, 몸이 착 달라붙어 거의 매일 빨아야 하는 속옷은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첫번째 가설은 이렇게 월경을 할 때 생리대로 썼던 천에서 팬티로 발전했다는 것이고(일본에서는 물론 서양의 문물이 들어온 것이었지만)
두번째 가설은 이성에게 성적인 어필을 하기 위해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브레이지어가 들어오기 전에는 여성이 남들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그다지 성적인 코드로 읽히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과거에는 가슴을 내놓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행위가 전혀 외설스럽지 않고 당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브레이지어가 들어왔다
원래 큰 의미 없던(물론 성적 의미가 있긴 있었겠지만) 부위를 가리기 시작하자, 갑자기 가치가 생겼다
은폐함으로서 갑자기 가슴은 남성에게는 보기위해 매달려야 하는 것이 되었고, 여성에게는 숨겨야 하는 것이 되었다
저자가 마지막 저자의 말에 한 겁나 웃긴 말이 있는데 ㅋㅋㅋㅋ 바로 여자의 속옷과 천황제는 퍽 닮아있다는 것이다
사실 알맹이에는 큰 의미도 없는데 비밀스럽게 은폐되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너도나도 보고 싶어한다는 거다
저자가 속옷의 본말이 전도되었음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재미있다
남성들이 '여성의 속옷에 흥분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명제일 것이다
사실 속옷이라는 것은(성행위 상황에 한정해서) 벗고 맨살을 드러내는것에 의미가 있는 것인데
오히려 맨살보다 속옷에 집착하고 맨살은 거부하는 남성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책이 쓰인 80년대 일본 기준으로)
현실 여성에게 접근하면 그들이 자신을 평가하는 '리액션'을 들어야해서 두렵기 때문에,
그 직전까지만으로 성적 판타지를 한정하고 속옷 사진에 집착하고, 심지어는 2d의 속옷만 입은 캐릭터만을 성욕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재밌는게 이와 동일한 현상이 현재의 한국에도 일어나고 있다
한국에서 인기있는 남성향 게임들을 보면 하나같이 어리고 순종적으로 생긴 여성 캐릭터가 속옷에 가까운 옷만을 걸친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는 이 현상이 꼴사나운 것과는 별개로, 저럴거면 그냥 다 벗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의문이 늘 들었다
이미 거의 다 벗은 것이나 다름 없는데 굳이 기만적으로 끈팬티를 입혀야 인기가 있는 것인가?
이 의문이 저자 덕분에 풀렸다
현실의 여성에게 리액션 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맨살'보다 '속옷'이 있는 상태를 더 선호하는 도착적 판타지가 생긴 것이다
저자는 이런 남성들이 실제로 유해하지는 않다고 주장했지만, 21세기 한국을 방문해본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ㅎㅎ
옛날에 나온 책이라 그런지 요즘 정서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꽤 있어서 그런 부분은 그냥 흘리듯이 읽었다
어머니에 의한 팬티 지배..? 이건 대체 뭔 소린지 잘 모르겠음
그리고 프로이트스러운 해석이 나올 때도 좀 별로 였다
앞에서 치즈코가 좋은 점이 성을 담론에서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담백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는데
가끔은 좀 과하게 의미 부여를 하는 부분도 있기는 하다
결론적으로 저자의 생각은, 현재의 팬티나 팬티를 대하는 남성과 여성의 태도, 그리고 성행위는 결코 자연스러운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욕이 참을 수 없는 남성의 자연스러운 욕구라는 둥의 기존 관념을 반박하고 성을 탈자연화하는 과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굳이 찾아서 볼 정도의 감동이 있는 책은 아니었지만 치즈코씨의 발칙한 매력이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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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의 도전(2005)
- 독서록
- 2023. 1. 19. 16:31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었다
지난번에 읽었던 우에노 치즈코의 책보다 좀 무겁게 느껴졌던 것 같다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한국에서 일어나는 여성혐오를 다루고 있어서 그런가
1. 남성중심적 언어
저자는 페미니즘이란 새로운 시각이라고 말한다
기존 사회는 남성중심적이다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차별과 편견은 물론 제도와 의식에 이르기까지 남성중심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저자는 다양한 예시를 드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바로 남성중심적인 언어이다
왜 '여성과 인권', '여성과 사회', '여성과 법'라는 과목은 있는데 '남성과 ㅇㅇ'이라는 과목은 없는가?
그것은 애초에 인권이란 남성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언어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다소간에 가지고 있다
저자는 성매매를 가리키는 용어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설명하며 예시로 든다
윤락여성 > 매춘여성 > 성매매여성
이렇게 변화해온 성매매여성에 대한 용어는 성매매에 대한 사회의 인식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윤락이나 매춘은 여성의 성을 즐기기 위한 것으로 여기는 철저한 남성 시점의 용어이다
저자는 성매매여성 또한 정확한 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매매는 사고 파는 행위를 말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여성은 판매만 하기 때문에 성판매여성이라는 말이 맞다
남성중심 사회를 보여주는 단어는 한도 끝도 없다
대부분의 '가정폭력'은 남편에 의해 아내에게 가해진다
아동을 아버지가 학대했을때 부자학대나 부녀학대라고 하지 않고 아동학대라고 한다
그런데 왜 가정폭력은 남편에 의해 아내에 가해지는 것이 명백한데도 아내폭력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이는 남편의 가해자성과 아내의 피해자성을 희미하게 하고, 사건을 중립화하려는 비열한 시도이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왔던 모든 개념이 사실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음을 밝힌다
사회를 이루는 여러 요소에 대한 '탈자연화', 즉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특정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담고있는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
이것은 가부장제의 모순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여성의 탈정치화
탈정치화
나에게 탈정치화라는 말을 이해시켜준 것은 유시민의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있다' 발언이다
2002년에 개혁당 여성당원들은 당내 MT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의 가시화와 해결을 촉구했다
당시 당원이었던 유시민은 이 용감한 여성당원들을 향해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 발언을 한다
한마디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조개 줍는 것과 같이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이고 '진짜' 정치가 아니며,
남성들이 하는 정치야 말로 진정한 정치라는 것이다
아주 간략하게 말하자면 탈정치화는 '네 얘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여성은 아주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탈정치화되어왔다
길가다 만난 사람에게 주먹질을 당하면 누구든 바로 경찰을 부를 것이다
이 경우 피해자에게 가해자한테 좀 요령있게 굴어보지 그랬어, 둘의 일이니 알아서 해결해!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남편에게 주먹질을 당한 여성은? 경찰을 불러봤자 가족 내의 일이니 알아서 해결하라는 말을 듣는다
전자와 후자는 모두 똑같이 맞았다, 아니 보통은 후자가 더 많이 맞는다 한대 맞고서 신고하는 아내는 없으니까
그런데 왜 전자와 후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는 다른가?
가족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사회의 제지를 잘 받지 않는다
사적영역
저자는 사적(private)이라는 개념이 결코 자연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사적 영역은 산업화와 근대화 이후의 산물로 본디 가족과 일은 크게 분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출근후와 퇴근후의 삶이 분리된다
이 당시 등장한 평등사상은 당시 사회의 가부장제와 양립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해야하는데 여자는 거기에 속하면 안되는 것이다
집에서 일도 하고, 애도 돌보고, 섹스도 해주고, 수틀리면 맞아야 하니깐
이런 남성 사회의 모순에 의해서 '사적 공간'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평등이라는 개념은 '사회'에만 적용되는데 이때 '사회'는 남성들이 활동하는 '진짜' 영역에 한정되는 것이고
여성들이 집안일을 하는 가정은 '개인'의 영역이기 때문에 사회가 간섭하면 안되는 것이다
마치 '다만'이라는 조항이 잔뜩 붙어있는 보험 약관마냥 평등사상은 이런 꼼수를 통해서 가부장제와의 모순을 극복하고 공존하게 되었다
'사적인'일이라는 것은 남성중심사회의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해석된다
남성이 배우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사적인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일어난 일보다 약하게 처벌되거나 처벌되지 않는다
그렇게 치면 가장 '사적인'일인 임신에 대해서는 참견을 멈추지 않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남선생이 반 여자아이들에게 담배를 피지 말라고 했다
남녀 모두에게 금연을 권했다면 청소년의 건강을 염려하는 모범적인 교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괜찮은데 여자는 임신을 해야하잖아."
흡연이 남성 정자 기능에도 이상을 일으킨다는 의학적 사실을 차치하고,
이 남교사가 여성의 임신에 자신이 무슨 참견할 권리가 있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것이 불쾌했다
앞으로 임신을 할지 안할지, 아니 결혼을 할지 안할지도 알 수 없는 어린 여자아이들의 임신에 그가 무슨 권한으로 참견을 한단 말인가?
남성이 다른 여성의 임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은 아주 흔하게 일어난다
소소하게는 거들먹대는 남교사에서부터, 크게는 법원의 임신 중단 위헌 여부 결정에까지 말이다
이러한 일들은 임신이 여성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일이라는 인식에서 일어난다
만약 임신이 사회문제라면 가정폭력이나 성폭력도 사회문제다
임신에 대해서는 모두가 입을 모아서 낳아라 마라, 낙태해라(여아살해) 하지 마라 하면서
성폭력에 대해서는 개인간의 해결을 강요하고 사회가 나서는 것을 부적절하게 생각한다
무엇이 사회문제이고 아니고를 결정하는 기준을 생각해보면,
모든 기준이 남성권력의 편리함을 위해서임을 명백하게 깨닫게된다
'사적인'일과 '공적인'일이라는 기준은 그저 남성이 편리하게 여성을 다루기 위한 핑계일 뿐이다
3. 남자는 왜 이해받아야 하는가?
이해하지 않아도 될 권력
아무래도 한국 사람이 쓴 책이다보니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들에 대한 분석이 꽤 많다
저자가 지적하고 나도 매우 공감하는 점이, 한국 사회의 남성성은 서양 사회의 그것과는 결을 달리한다는 점이다
서양의 남성성은 강인하고 고독한 마초적인 남성성이다
여성을 동등한 사회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보듬어야 하는 약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여성에게 무조건 신사적이고 배려를 하며, 가정을 책임져야한다는 '맨박스'가 존재한다
한국 사회의 남성들은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여성이 아니라 남성자신들을 피해자로 상정한다
남성은 그 많은 권력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불쌍하고 이해받아야 하는' 존재로 재현된다
"네가 이해 좀 해줘."
남성 가족들과 갈등이 있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제멋대로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해놓고 그걸 나한테 이해하란다
왜 반대로 나를 그들이 이해해주면 안되는가?
"아빠/할아버지/남동생이 원래 좀 그렇잖아"
대답은 항상 같았다 원래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고 나는 그들을 이해해야만 한다
내가 보기에 남성들은 공감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면 나도 아빠나 할아버지가 왜 그딴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남자들이 감정표현이 서툴러서 그래"
남성들의 소통에 대한 의무를 무한히 면제시켜주고 여성에 모든 갈등 책임을 전가하는 마법같은 말이다
소통은 호의에서 나오는 무료제공 서비스같은 것이 아니다
소통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상대의 의도를 짐작하는 복잡한 상상력이 필요하며, 인간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노동이다
그런데 이 노동은 오로지 여성의 몫으로 넘겨지는 것이다
성(姓)=자원
저자가 또 하나 지적했던 것이 성(姓)은 자원이 맞다는 거다
(다만 성매매를 합리화하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주장과는 결을 달리한다)
소통이 그렇듯이 성 또한 무한으로 무료 제공되는 서비스가 아니다
성은 여성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자원이고 여성은 그것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성은 로맨스의 옷을 입고 여성의 것이 아닌 것처럼 군다
"사랑한다면 해줘야지."
로맨스라는 달달한 껍질 안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섹스를 무상제공해야 한다는 논리가 숨어있다
섹스를 무상제공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조건을 따지는 여성은 계산적인 여성이 된다
섹스를 유상제공하는 여성은 사회가 멸시하는 창녀가 된다
이런 관점이 물론 성매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내 말은 성매매가 맞다 그르다 이런 말이 아니라,
몇천년간 이어져온 남성중심사회가 여성이 제공하는 자원의 값어치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후려쳤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성이 반드시 해야하는 것 중 하나로 여겨지는 임신을 생각해보자
임산부의 사망률은 전쟁터에서 죽을 확률보다 높다
전쟁에서 돌아온 남성은 영웅취급받고 나라에서 훈장과 연금을 준다
그런데 임산부는 영웅취급은 커녕 출산 후 육아를 떠맡고 직장에서는 해고된다
왜 임산부의 일은 존중받지 못하고 '당연히' 해야할 일이며 전쟁에 나갔다온 남자는 영웅이 되는가?
소통, 섹스, 임신같은 당연한 일로 왜 유난이야?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남성중심사회의 이데올로기에 푹 젖어 그것만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나 하나 생각해보면 끝도 없다
살림은 왜 하찮은 일인가? 독거노인 인구는 여성이 70%로 훨씬 많은데 정작 고독사의 85%는 남성이다
복지 전문가들은 남성노인들이 제대로 살림을 꾸리지 못해서 고독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살림하는 사람이 없어서 죽어버리는 주제에 왜 살림을 무시할까?
여성이 제공하는 자원은 모두 평가절하되고 무료이며 당연한 것이고 안주면 나쁜 여성이 된다
4. 남자 아이돌 덕질과 페미니즘: 타자화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이 타자화되는 방식을 저자가 설명하는 걸 읽는데
나는 갑자기 내가 하는 아이돌 덕질이 떠올랐다
사회에서 남성들이 여성에게 행하는 온갖 타자화가 남자 아이돌 덕질판에서는 여성이 남성에게 하는 것으로 성반전된다
아이돌 덕질이 페미니즘 운동이라거나, 케이팝이 여성친화적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성이 주 소비자인데도 여성혐오적인 태도를 자주 보이는 산업이고, 소비자 역시 여성혐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다만 꼭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성 타자화의 성반전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일부 팬들은 남성 아이돌의 외모와 몸매를 품평하며, 살이 찌면 초심을 잃었다며 사정없이 욕한다
일부 팬들은 아이돌이 팬싸인회에서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며 공론화하고, SNS나 유료소통 앱을 통해서 하는 소통을 게을리 한다며 저격글을 올린다
남성 아이돌을 성적 대상화하기도 한다 가슴이나 엉덩이 부위가 노골적으로 보이도록 사진을 크롭해서 올리고
알페스(RPS:real people slash)라고도 불리는 남성 아이돌간의 성애적 사랑을 담은 팬픽을 창작하면서 논다
물론 모든 팬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 팬들은 몹시 혹독하게 이러한 행위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며 팬덤에 자정을 요구한다
이런 일들은 특히 남성들의 엄청난 공분을 산다
일전에 여성들이 남성 아이돌들을 성착취한다면서 알페스를 공론화해야한다며 인터넷상의 남성들이 분노한 일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무시무시한듯이 말한 알페스가 그냥 평범한 아이돌 팬픽임이 드러나자 흐지부지됐지만...
일반 남성들은 물론, 아이돌을 하는 아이돌 남성 당사자도 이런 여성들의 행각에 분노를 드러내기도 한다
한번은 팬싸인회에서 한 여성 팬이 아이돌에게 안된다고 해도 여러번 애교를 요구했다
아이돌은 팬에게 자신도 사람이라면서 애교를 거부했다
이런 팬들의 행위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마치 남성중심사회의 성반전을 보는 것 같아 흥미롭다
또한 이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이 (심지어 일부 여성들도) 분노로 점철되어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상당히 '발랑까져'있는 것 같은 위의 여성 팬들의 행동을 하나씩 생각해보자
외모와 몸매의 품평
살 찌는 것에 대한 비난
애교 강요
소통 강요
성적대상화
하나같이 너무나 흔한 남성들의 행동 양식처럼 보인다
물론 이런 행동을 하는 남성들이 잘못된 것이고 모든 남성이 그러지는 않는다는 변명을 하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의 행동들이 단순히 일탈적인 행위라면, 사회가 함께 공분하고 그를 끔찍한 사람으로 낙인찍어야 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보인다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희롱은 어린 나이에 장난, 호감으로 불리기 십상이며
여자에게 살 좀 빼라고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문제삼는 사람은 없다
물론 주변 여성들에게 재수없는 놈으로 불릴 수는 있겠으나 이런 행동이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위에서 기술한 아이돌 팬들의 행동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왜 여자 아이돌 팬들의 행동은 변태적이고 과도한 것으로 비난받고, 남성들의 동일한 행동은 사회적으로 용인받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타자화는 너무나 제도화 되어있어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반면에
그 반대에 남성은 극도의 거부감을 느낀다
모든 것이 자신을 기준으로 짜맞추어져 있어서 자신은 가만히 타인들을 평가하고 마음껏 비웃으면 되었는데,
그 반대 상황에 놓여보니 기가 막히고 대단히 부조리한 일을 겪는 기분인 것이다
여성들은 일생동안 매일매일 겪는 일을 어쩌다 한 번 겪었다고 격분을 참지 못하는 남성들을 보면,
남성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나약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만약 남성성이 혼자 굳건하게 성립할 수 있는 성질이라면, 남성들은 여성들이 남성을 타자화하는 것에 별 위협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남성들은 타자화된 순간 존재의 위기마저 느끼며 여성들을 향해 온갖 분노를 표출했다
이는 여성을 끊임없이 타자화시키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남성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5. 여성주의라는 새로운 시각
저자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새로운 시선이라는 점이다
저자에게 여성주의란 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 내지는 혁명(물론 페미니스트는 이런 것들도 할 수 있다)보다는,
기존 남성중심사회의 시각으로는 사회의 여러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기존의 문제들을 바라보는 여성관점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성폭력 범죄자의 흉악함만을 강조하여 비판하는 기존의 시각은 성폭력의 근본적인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성폭력이 일부 남성의 일탈이 아닌, 철저히 제도화된 산물로 본다
성폭력이 일어났을때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원인을 찾으며, 가해자에게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관용적인 것은 그 증거이다
성폭력 범죄자 개인의 흉악함만을 비난하는 것은, 성폭력이 가부장제의 산물임을 교묘히 지우고 기존 남성사회의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며 근본적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처럼 저자는 기존 사회의 모순을 대한 한국 사회의 담론이 몹시 빈약하며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저자의 의견에 나 또한 공감한 것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여러 사건들에 대한 반응을 보면 개개인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만으로 여론이 흘러간다
예를 들어 시모와 며느리의 갈등에 대한 글이 올라오면 시모가 잘못했니 며느리가 잘못했니 따지기만 바쁘다
그러한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가부장제의 모순과 둘 사이의 갈등에서 쏙 빠져 소통을 면제받는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나 또한 그런 사건들에 대한 글을 읽을 때 그저 잘잘못에 대한 생각만 해왔기 때문에 저자의 지적에 상당히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요즘 수영을 열심히 하는데, 페미니즘은 운동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을 할 때 내가 편한 자세나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자세로 하면 동작이 망가진다
직관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내 자세의 틀린점을 찾으며 갈고 닦아야만 좋은 수영 자세가 나온다
페미니즘 또한 자연스럽다고 느껴지는 직관을 거부해야 한다는 점이 비슷하다
물론 모범적인 동작이 정해져있어서 따라하기만 하면 되는 수영과 달리 페미니즘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는 점이 다르지만
하여간 수영도 어렵고 페미니즘도 어렵다
편한 것만 따라가면 바보가 되기 십상이다
더욱더 노력하고 정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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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0)
- 독서록
- 2023. 1. 16. 17:11
룰루 밀러의 뭐라 분류하기 어려운 장르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문학이면서 과학과 역사를 넘나들고 권력에 대한 고발을 하는가 하면 개인적인 성찰과 철학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이 뭐라 말하기 어려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혼란스러움을 감추기 쉽지 않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분류에 혼란을 주는 책의 형식 또한, 의도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집착
하여튼 복잡한 내용이지만 그래도 간단히 말해보자면,
대충 저자의 덕질기이자 탈덕기로 요약할 수 있겠다
덕질의 대상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19세기 어류학자
지진으로 조던이 수집한 모든 어류 표본이 떨어져 망가졌을 때,
박제된 어류가 손상되는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병에 붙어있던 이름표가 모두 뒤섞여
그가 평생을 노력해서 만들어온 질서가 다시 혼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런데 이 때 조던은 포기하는 대신에 바늘을 하나 찾아와 이름표를 어류에 직접 꾀매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런 글을 읽고, 그를 포기하지 않게 한 것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저자는 당시 어마어마한 삶의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조던에게서 자신이 찾던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조던에 대한 덕질이 시작이 된다
19세기에 태어난 사람이지만 원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온갖 저서는 물론 무려 두 권짜리 자서전도 있었다!
저자는 조던에 대해 강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을 조사해나간다
책의 전반부는 조던의 위인전처럼 느껴져서, 이걸 왜 나한테 읽으라는 거지 싶다
그래도 작가의 필력만은 상당해서 술술 읽기는 했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계속 이런 내용이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이 가득했다
조던에 대한 저자의 상당히 긍정적인 톤의 진술(전반부에 한정된)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당히 역겨운 인간으로 느껴졌다
어릴 적부터 또래 사이에서 적응을 못해서 외톨이였던 그는 삶의 목표를 또래에게 인정받는 것 대신 온갖 자연물의 이름을 외우고 분류하는 것에서 찾는다
그렇게 좋은 학자만 됐으면 좋으련만 조던은 정말인지 찐따가 권력을 쥐어서 유해해진 유형 그 자체를 보여준다
유년시절부터 다른 사람들과 꾸준히 상호작용을 해온 사람들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을 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혼자만의 세상에 빠진 사람은 자기파악 능력 대신에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비대하고 긍정적인 자아를 발전시킨다
실제 자신의 모습보다 자신을 훨씬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자기 기만이다
정적인 자기 기만이 때때로 스스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탓에 타인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런 조던의 특성은 그가 성공적인 어류학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이자, 그의 모든 과오의 원인이 된다
저자는 조던에 대해 조사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것과 점점 다른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2. 드러나는 조던의 실체
이 책을 일종의 덕질기라고 표현한 것은, 덕질을 할 때 흔히 갖게되는 감정의 널뛰기가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실제로 아이돌을 좋아하듯이 조던을 덕질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에 빠져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기 위해 집착하는 태도가 꼭 덕후의 그것과 닮았다
연인간의 사랑으로 굳이 비유하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 작가의 일방적인 집착이기 때문이다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쌍방향적인 소통이 있는 연인간의 사랑과는 달리 덕질은 늘 한 방향이다
그렇기 때문에 덕후는 덕질 대상에 대해 알려져 있는 사실만을 알게 되고, 대중 앞에서의 이미지와 실제 덕질 대상의 간극에 대해 영원히 궁금해 할 수 밖에는 없다
그 간극이 꽤 거대한 것이었음을 알게되는 순간 소위 '탈덕'을 한다
이 책은 덕질에 관한 것이 전혀 아니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한 사람에 대한 몰입과 집착은 꼭 덕질을 연상케 한다
결국 저자도 일종의 탈덕을 하게 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생에서 삶의 혼란을 잠재워줄 명쾌한 해답을 얻으려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다
조던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대단한 노력가일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고 남은 틀리다는 비대한 자아에서 비롯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조던은 모든 생명을 '신성한 사다리' 위에 순서대로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더 우월한 생명체가 있고 더 열등한 생명체가 있다는 믿음이었다
조던의 사다리 꼭대기에는 인간이 존재했는데, 그 인간 마저도 사다리에 나누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같이 사회에 공헌하는 성실하고 열정적인 엘리트가 있는 반면, 사회를 좀먹게하는 게으르고 열등한 종자들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현대에는 이미 교육과 환경에 의해 주로 영향을 받는다고 밝혀진 범죄율이나 낮은 학습성취도가 유전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의 대를 여기에서 끊는 것만이 인류가 퇴화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조던은 자신이 조국을 살리기 위해 위대한 일을 한다고 믿으며 외국인과 이민자, 빈민들을 강제적으로 불임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빛을 발하여 미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우생학을 받아들였다
나치의 유산으로만 알려졌던 우생학과 강제 불임시술이 사실 미국에서 더 빨리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저자는 당시 수용소에서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른체 강제로 불임수술을 당한 여성을 만나 인터뷰를 한다
그는 그 일로 고통스러워 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삶을 산다
스스로 멋진 삶을 꾸릴 능력이 있었던 이 여성은 한 남성의 그릇된 믿음과 사회의 동조 때문에 '부적격자'로 낙인찍힌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인터뷰 장면이 참 감동적이었다
저자는 섬세한 시선으로 이 여성을 관찰하며, 조던의 생각이 얼마나 부당한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도표에는 나타나지 않는, 오직 인간의 시선으로 관찰해야만 드러나는 가치가 드러나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조던의 악행은 그 뿐만이 아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초대 학장이었던 조던은 자신의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는(주로 합당한 이유가 있다) 설립자 제인 스탠퍼드를 몹시 싫어했다
제인은 1905년에 하와이에서 사망했는데, 사망 당시의 증상이 독극물 중독으로 강하게 의심되었다
조던은 제인의 사망 직후 하와이로 가서 그가 살해된 것이 아니라며 온갖 반론을 펼친다
독극물 중독이 확실하다는 하와이의 의사들을 돌팔이로 몰고, 의사 면허를 딴 지 얼마 안된 의사를 직접 고용하여 반박하게 한다
수상할 정도로 제인의 죽음이 살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조던이 제인의 살해에 직접 관여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시체에서 발견된 독극물이 조던이 어류 표본을 채집할 때 즐겨 사용하던 독극물과 동일한 종류였던 것이 우연의 일치이긴 어려워 보인다
3. 저자의 깨달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던의 생애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던 저자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조던이 그토록 늘 긍정적으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던 것은 본인이 스스로 비판하기도 했던 근거없는 믿음이었다
결국 인간의 삶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고, 모두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자기기만이었다
적절한 수준의 자기기만은 명랑하게 사는 것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조던의 경우에는 근거없는 자기 확신에 차 많은 사람을 고통으로 몰고간 파괴적인 성격이 강했다
기나긴 여정 끝에 다시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결론으로 돌아가게된 저자는 허탈감을 느낀다
게다가 조던은 그토록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여전히 학계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저자는 조던에게 한방 제대로 먹일 방법을 찾아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문구는 말도 안되게 느껴지만 실제로 참이다
생물을 분류할 때 물고기 혹은 어류라는 범주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 현대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한다
마치 아시아인과 서양인같은 분류처럼 말이다
아시아인과 서양인이라는 구분은 한 때 꽤 과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사실 아시아인으로 묶인 사람간의 유전자 차이가 아시아인과 서양인 사이의 차이보다 훨씬 크다고 한다
매우 비과학적이고도 서양인의 차별적인 인식과 편리에 맞춘 분류인 셈이다
어류도 마찬가지로 하나로 묶이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생명체들이 하나로 묶여있다고 한다
실제로 어떤 물고기는 같은 어류로 묶이는 다른 물고기보다 오히려 인간에 유전적으로 가까울 정도로 상당히 차이가 심하다
인간이 보기에는 다 비슷하게 물의 저항을 적게 받는 유선형의 길쭉한 형태에 비늘과 지느러미가 달렸지만,
이는 물이라는 환경에서 살기 위해 비슷하게 진화한 것 뿐이고, 실제 진화의 갈래를 기준으로 보면 전혀 상관없는 종들이 하나로 묶여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저자는 한가지 재미있는 비유로 이 상황을 설명한다
추운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과 여러 동물이 모두 추위라는 환경 때문에 털이 무성하게 나도록 자연선택이 되었는데
'털'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사람과 다른 동물들을 같은 종으로 묶는 격이라는 이야기다
많은 생물학자들이 이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일때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물고기가 존재한다는 반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박을 찾을 수록 이 새로운 이론의 견고함만 드러났고 어류라는 분류의 부정확함은 확실해졌다
저자는 이것을 조던에 대한 통쾌한 복수로 생각한다
조던이 평생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자연계의 신성한 사다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생명체는 우열이 아닌 저마다의 경이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인간의 편협한 시선으로 볼때 '신성한 사다리'니 우생학같은 헛짓거리가 탄생했던 것이다
좀처럼 한 장르로 분류하기 어려운 이 책 역시 그런 관점을 일부분 녹여낸 듯 하다
인간의 편협한 시각으로 한 분류가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4. 인간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서로를 중요하게 만들 수 있다
전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특별하다는 것은 비과학적이며 오만한 생각이다
인간이 굳게 믿고 있는 것과 달리 인간은 다른 생명체보다 우월하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장 하찮은 것을 비유할 때 쓰는 생명체인 개미는 토양 속의 탄소를 순환시켜 생태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하찮고 지저분하게 생각되는 녹조, 즉 남조류는 산소가 없던 원시 지구에 최초로 산소를 생산해서 동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남조류가 없었다면 인간은 커녕 인간 할아버지도 지구에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만하게도 인간은 뒤늦게 나타난 주제에 자신이 생명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있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는 일찍이 이런 사실을 깨닫고 큰 혼란에 빠졌다
인간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자신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삶의 목표와 의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런 혼란을 거둬주리라 믿으며 조던의 자취를 쫓았지만
결국 조던은 자기기만에 빠져 여러 과오를 저지른 악당임이 밝혀졌다
책의 결말에서 역시 저자는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전혀 특별한 위치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다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불임수술 생존자와 만나면서 저자는 그가 얼마나 친구에게 다정하고 좋은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에게 너무나 큰 의미를 가졌다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사람간의 우열을 주장함으로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았던 조던보다
사람간의 다정한 관계를 통해 의미를 찾는 후자가 훨씬 건강해보인다
저자 또한 새로운 사랑을 찾고, 그 관계에서 커다란 의미를 얻는다
저자의 깨달음이 각박한 세상에 다소 감성적으로 보일지라도 꼭 필요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우월한 종자와 열등한 종자가 따로 있다고 믿으며 차별을 정당화 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이다
그런 구분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듯이 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족한 자존감을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에서 채우는 대신에 다른 사람을 소중히 대함으로서 채우자
이것이 건강한 자신과 사회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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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2020)
- 독서록
- 2023. 1. 10. 22:53
버네사 우즈와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었다
제목은 힐링 에세이스러운데 사실 과학 서적으로 <사피엔스>나 <총균쇠>류의 책이다
이들은 인류가 성공적으로 번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 친화력이 있었음을 주장하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 대표되는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한다
1. 인간의 자기가축화
책의 전반부는 '자기가축화'라는 개념을 설명하는데 전부 할애된다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는 야생동물이 스스로 인간에게 친화적인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초기인류가 늑대중에 작고 사람에게 공격적이지 않은 개체만 골라서 계속 번식시켜 개가 됐다기엔 무리가 있다
사람들이 먹을 식량도 없는데 늑대에게 계속 먹이를 주면서,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미래의 개를 상상하며 번식시킨다는건 말이 안된다 애초에 야생동물이 사람 마음대로 번식이 되지도 않고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자기가축화인데, 사람과 가까운 곳에서 그들이 버린 쓰레기를 주워먹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었고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늑대들은 대부분 호기심이 많고 공격성보다는 친화력이 높은 놈들이었을 거다
이런 놈들끼리 번식해서 점점 친화력이 높은 개체가 되고, 모습도 변하는게 바로 자기가축화다
책의 저자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적고 친화력이 높은 여우만을 선택적으로 번식시켜서 그 결과를 관찰했는데
겨우 몇세대만에 더욱더 사람에게 친화적으로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외형의 변화까지도 일어났다
그러니까 이 실험의 결론은 교배과정에서 친화력이 선택될 때, 친화력 뿐 아니라 다른 특징적인 외형의 변화도 함께 일어난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가 인간 또한 자기가축화 되었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다른 사람에게 다정하고 협력적인 태도를 가질 수록 집단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오직 인간만이 고도의 사회적 능력을 발달시켰다는 것이다
친화력이 우리 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은 새롭지 않다. 하나의 종으로서의 우리가 더 똑똑해졌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이 두 생각 사이에 놓여 있는데, 사회적 관용이 높아지면서 인지능력, 특히 의사소통 및 협력과 관련한 기능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2. 친화력의 양면성: 비인간화
전반부에서 책이 끝났다면 인간 예찬론인가 싶었을 것 같은데, 후반부에 반전이 있다
바로 인간의 독특한 특성인 '친화력', 다른 말로는 '다정함'이 때로는 가장 잔혹한 행위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옥시토신은 임산부에게 많이 분비되며, 아이에 대한 애정과 보호욕구를 갖게하는 호르몬이다
이 옥시토신은 아이에게는 한없이 다정해지면서, 아이를 공격할 수 있는 외부인에게는 평소보다 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이러한 일이 고도의 친화력을 갖도록 진화한 인간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내집단에게는 다정하지만, 외집단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냉혹하게 구는 것이다
저자는 이 현상을 '비인간화(dehumanization)'로 설명하는데,
이를테면 '짐승같은 흑인들'이라는 말은 흔한 인종차별이자, 명백한 비인간화이다
자신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인간이 아닌, 열등하고 말이 통하지 않으며 야만적인 사람으로 칭하는 것이다
흑인이나 아시아인을 유인원, 원숭이에 비유하는 인종차별도 흔히 일어난다
많은 연구자들은 이 차별의 원인을 사회가 쌓은 편견에서 찾으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친화력의 쌍둥이인 비인간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간단히 말해서 자기 사람한테는 관용적이고, 자기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혹독하게 군다
앞에서는 인종을 예시로 들었지만 종교, 성별, 정치성향, 소득 등으로 나눠지는 집단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비인간화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바로 상대 집단이 자신의 집단에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다
실제로 그 위협이 일어나는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조선족에 대해 강력한 비인간화가 일어나고 있다
조선족이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한국인과 조선족이 동일한 수위의 반사회적인 행동을 했을 때 한국인에게 더 관대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인에게는 사정이 있었겠지라고 말하고, 조선족에는 역시 인간말종들이라며 전형적인 비인간화가 일어난다
책에 언급된 실험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보였다
백인들을 대상으로 백인 어린이와 흑인 어린이의 사진을 보여주고, 가상으로 그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고 설명했을때
백인 어린이에 대해서는 사연을 궁금해하거나 범죄에 책임이 없다고 했으며
흑인 어린이의 경우에는 범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압도적이라고 한다
동일한 행동에 대해서 자신의 내집단의 경우에는 관용을, 그렇지 않은 쪽에는 냉혹함을 보인다
외집단에 대한 비인간화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요소는 그들이 먼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인식이었다. 이것을 보복성 비인간화라고 한다.
이러한 비인간화의 반발로 보복성 비인간화가 일어나게 된다
극단적 우파와 극단적 좌파가 서로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적대 관계에 있는 두 나라가 서로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원리가 바로 이것이다
솔직히 이런 지적에는 나 또한 자유롭지 못했는데
인종차별자나 여성혐오자들을 인간이하라고 늘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일상적으로 비인간화를 하고 있었다
3. 비인간화의 해결책
저자는 끔찍한 학살 사건들의 배후에 비인간화라는 원리가 있다고 설명한다
독재자들은 외부의 적이 얼마나 잔인무도한가 과장되게 홍보한다
피지배자들은 독재자들에 의해 선전되는 외집단의 모습을 보고 공포에 빠져 독재자가 하자는대로 한다
평화주의자와 방산비리를 우려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저들은 짐승이므로' 쉽게 묵살된다
그 결과 독재자는 아무런 장애 없이 휘두룰 수 있는 권력을 얻는다
홀로코스트가 그랬고, 난징 대학살이 그랬고, 이라크 전쟁이 그랬다
모든 학살이 끝난 후, '인간도 아닌 것들'로 상정되었던 외부인들이 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음이 밝혀진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으로 저자는 흥미롭게도 교육의 한계를 지적한다
하지만 관용이 없는 사람들을 '교육'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애슐리 자디나가 설문조사에 참여한 백인들에게 흑인들이 수감과 사형 집행에서 부당하게 표적이 되고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이미 흑인을 인간 이하로 보던 사람들은 흑인을 더 비인간화하게 되고 흑인에 대한 징벌 정책을 더 지지하게 되었음을 기억하자. 앎이 문제를 더 악화시킨 것이다.
저자의 지적은 분명 일리가 있다
차별주의자에게 차별의 현실을 알려주면 오히려 화를 내면서 더욱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을 나는 자주 보았다
다른 사람의 말 한두마디로 바뀔 정도로 관용적인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차별주의자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다양성 교육이 가장 큰 효과를 보이는 것은 이미 관용적인 사람들임을 역설한다
한마디로 소귀에 경읽기이며, 더 이야기할 수록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만능 해결책으로 통하는 교육의 효율을, 그 정점에 서있는 석학들이 부정하는 것이 흥미롭다
루소가 학문과 기예의 발전이 인간의 본성을 순화하기는 커녕 악영향을 준다는 글을 발표하여 충격을 줬던 일이 떠오른다
하여간 나 또한 누군가를 계몽하려는 행동이 오히려 차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상황을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교육 대신에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책에서 언급하는 해결책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번째로, 이질적인 집단의 사람들이 서로 자주 만나고 친숙한 이웃으로 여기며 비인간화를 줄이고 내집단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유럽인들을 추적하여 조사한 결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인과 친하게 사귀었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친밀한 접촉은, 독재자들의 강력한 프로파간다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잊지 않도록 해주었다
두번째 해결책은 어릴 적부터 동물과의 친밀한 접촉을 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동물이 얼마나 존중받을 만한 생명체인지 안다
마트에서 파는 털 뽑힌 생닭만 본 아이와 꼬꼬댁거리며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닭을 본 아이 중 누가 더 닭을 생명으로서 존중하려 할까
당연히 후자의 존중이 더 클 것이다
이런 동물에 대한 존중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신성한 장벽이 있다는 오만함을 버릴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비인간화는 필연적인 인간의 본능이라지만, 애초에 비인간도 인간만큼이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비인간화의 파괴적인 속성도 자연히 약화될 것이다
4. 책의 한계점
이 책은 솔직히 엄청난 명저까지는 아니다
여기저기 허술한 부분도 많이 보인다
전반부는 저자들의 전공 이야기이기 때문에 확실히 전문적인데
비인간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후반부는 사실 학문적으로 깊지는 않다는 인상이었다(대신 재밌긴 함)
저자들 역시 마지막에 자신의 전공분야도 아닌 복잡한 조사를 많이 해야 했던 고충을 토로한다
학문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대이니만큼 이런 책의 구성을 환영해야 마땅하겠으나, 그래도 허술한건 허술한거다
구체적으로 허술함을 느꼈던 부분은, 평화시위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서였다
폭력시위보다 평화시위의 성공확률이 더 높다는 통계를 근거로 평화시위가 사실 갈등을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임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 갈등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본 것이 아닌가 싶었다
많은 사회적 갈등의 주요 동기는 경제적 문제인데 이것을 간과하는 것 같았다
평화시위가 때때로 폭력보다 강할지는 몰라도, 돈은 못 이긴다
노골적으로 임금을 차별받고 해고당하는 여성 또는 유색인종이 회사한테 '평화적'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들어주겠는가?
임대아파트 들어오면 집값 떨어진다고 반대하는 사람들한테 '평화적'으로 이야기한다고 그들이 집값을 포기할까?
경제적 동기는 가장 강력하고 솔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들이 이런 부분을 놓친 것인지, 책이 지나치게 복잡해질 것을 우려하여 뺀 것인지,
또는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님을 겸허히 인정하며 굳이 언급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여튼 평화시위 부분은 근거도 좀 허술하고, 백인 저자들의 나이브함이 보였던 것 같다
물론 지금 시대에는 극단에 극단으로 맞서지 말라는 이야기가 꼭 필요하긴 한데
그런 이야기는 사실 차별당하는 당사자들이 해야 더 큰 설득력을 가질 것 같다
마치 간디가 비폭력 시위를 했던 것처럼 말이다
먼저 때린 놈이 "싸우지 마,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라고 해봤자 부아만 치미는 거다
몇 가지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갈등이나 차별을 문화와 교육으로 설명하는 대신에
호르몬이나 진화를 통해 획득한 기제로 설명한 것은 독창적이며 흥미로웠다
그리고 솔직히 완전하지 않은 책을 볼 때가 더 재밌는 것 같다
<총균쇠>같은 경우에는 독자가 잡을 수 있는 모든 트집을 원천 차단한다
내가 "엥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하는데?"하면 다음 장에서 그 얘기를 한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논리가 완전하고 아직까지도 베스트셀러로 읽히겠지만....
그 덕분에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반박할 준비가 되어있는 겁나 똑똑하고 짜증나는 교수랑 얘기하는 기분이 든다
내가 궁금한 점과 아직 궁금하지 않은 점까지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다 이야기해주니까
내가 머리 굴릴 틈이 없이 그냥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 책 마지막 저자의 말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조금 더 읽기 쉬운 책이 되도록 하기 위해 자신들 이론에 대한 반박은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론의 정밀함을 포기하고 가독성을 택한 것이다 대중 과학 서적으로서 나쁜 선택은 아니다
<총균쇠>는 이름값이라도 있어서 700페이지를 다 읽어주는거지
보통의 대중 과학 서적을 700페이지로 내는 것은 독자와 출판사를 모두 불행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저자들이 반박에 대한 반박을 하지 않은 덕분에 책을 읽는 동안 나의 반박은 점점 쌓여갔다
어디를 별로라고 깔지 열심히 생각하면서 읽게 되고, 논리의 허점을 내 생각으로 채워넣으려고 노력하게 됐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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