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리버 트위스트(1839)
- 독서록
- 2023. 1. 3. 13:02
연말과 연초에 걸쳐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었다
이 재미없어보이는 고전을 갑자기 읽게 된 경위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아가씨>의 원작 소설 <핑거 스미스>가
<올리버 트위스트>의 포스트모던한 재해석이란 리뷰를 읽어서 였다
자고로 어떤 책에 영향을 준 원본을 읽으면 그 책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지는 법이다
최근에 고전 몇 권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도서관에서 멀쩡한 <올리버 트위스트>를 찾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도서관에 한 열댓 권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있는데 딱 한 권을 빼고 모두 어린이 다이제스트 판이다
고전 다이제스트판은 부모의 허영심과 출판사의 상술의 이해관계가 맞아 탄생한 말도 안되는 촌극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유튜브 3분 요약보고 영화 다봤다고 하는 사람은 미친 놈 취급하면서 고전 다이제스트 판은 왜 도서관에 열 몇권이나 있는거임ㅡㅡ
특히 그게 찰스 디킨스일때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이 작가는 태생이 지독한 떠벌이로 말이 많고 19세기 런던을 통째로 책이 집어 삼킨 것처럼 집요하게 묘사를 한다
사회 세태에 대한 풍자와 특유의 말솜씨로 풀어내는 블랙코미디는 덤이다
그리고 내용도 아동학대며 매춘부, 살인, 각종 범죄 등 자극적인 요소로 가득한데, 아동판으로 만들면서 그런 면을 검열하면 책의 정수가 사라지는 셈이다
특히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 중 하나인 낸시는 매춘부 신분이라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인데 그 부분을 생략하면 캐릭터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하여간 이 말도 안되는 책들 사이에서 딱 한 권 있는 완역본 <올리버 트위스트>를 예약까지 걸어서 어렵게 구해왔다
바로 이 책인데, 현대지성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근래에 읽은 책 중에 손꼽히게 번역이 좋았던 것 같다
고전은 전문번역가 대신 논문 꽤나 썼다는 교수들이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솔직히 전문번역가보다 가독성도 나쁘고, 오역도 많고(교수라 지적하는 사람이 없나봄) 작품 해설에 문학계의 일반적 해석 대신 본인의 해설만 욕심 그득하게 채우는 경우가 많아서 굉장히 불호다
유수아라는 전문번역가분이 번역한 이 책은 아주 깔끔하고 충실한데다 주석도 꼭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만 달아놓은 것이 마음에 든다
예전에 어떤 교수가 번역한 책을 읽었는데 주석과 작품 해설이 책 내용보다 많았다^^
페이지를 넘기기만해도 숨이 막히는데 이걸 읽으라고 만들었나 싶었음
작품 해설에도 작중의 유대인 차별이나 여성 차별같은 요소를 애써 부정하거나 변호하지 않으면서도 당시 사회상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을 통해 이해를 돕는 점이 좋았다
처음 보는데 느낌이 좋은 출판사...! 앞으로는 고전 읽을 거 있으면 여기 껄로 읽어야지
하여간 작품 외적 이야기는 이쯤으로 해두고 본격적으로 <올리버 트위스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제목이 올리버 트위스트인데 올리버를 중심으로 사건이 돌아가기는 하지만 사실 비중은 크게 없다
이 고아 소년을 소재로 해서 구빈원이나 고아원 같은 당시의 복지 시설 실상을 고발하거나
런던 뒷골목에 있는 암흑가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낸다든가 한다
'가난하지만 선한 소년이 역경을 이겨내고 행복해지는 이야기'가 맞긴 한데
솔직히 그보다는 막장 범죄 신파극으로서의 재미가 더 크다
왜 전자로만 책을 소개하는지 모르겠다 도파민이 뿜어져나오는 자극 가득한 재밌는 책이란 말이다
개막장 출생의 비밀 범죄 활극이라고 소개했으면 <올리버 트위스트>를 사람들이 좀 더 읽지 않았을까?
작품에는 올리버, 브라운로씨, 로즈 등으로 대변되는 선역과 페이긴, 사익스, 멍크스로 대표되는 악역이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선역은 고결하고 선량하며 악역은 비열하고 추악하다
근데 이상하게 악역들 얘기가 더 재밌다 솔직히 디킨스도 악역 얘기 쓰면서 더 재밌었을듯
암흑가 패거리의 보스인 페이긴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고스란히 담겨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입체적이고 인상적인 캐릭터로 많은 후대의 소설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예를 들어 <핑거 스미스>의 석스비 부인은 바로 이 캐릭터를 여성 버전으로 쓴 격이다
페이긴은 암흑가에서 성공적인 사업을 벌이는 노인인데, 그 사업이란 바로 갈 곳 없는 어린 애들에게 소매치기를 시키거나
불한당들을 고용하여 강도질을 하거나 매춘부를 부리는 식이다
디킨스는 강경한 어조로 이런 범죄 행위를 비판하면서도, 어째서 어린 아이들이 페이긴의 마수에 빠질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어린 올리버는 고아원과 구빈원에서 지독한 아동학대를 받고, 도제로 팔아 넘겨진 장의사 집에서도 가혹한 학대를 받다가
아무런 계획 없이 런던으로 도망간다
이 가엾은 소년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쫄쫄 굶고 지쳐서 탈진 직전인 올리버에게 잘 대해준 유일한 사람은 소매치기 소년뿐
올리버를 잘 먹이고 달래서 페이긴의 아지트로 데려간다(아직 올리버는 그곳이 범죄자 소굴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고아원과 구빈원이라는 사회 제도가 부패하여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린 아이의 배를 유일하게 채워주는 것이 범죄자 집단이라는 것은 꽤 충격적이다
디킨스는 사악한 범죄자들을 엄격하게 단죄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너진 복지 제도 속에서
범죄 외에는 생존 방법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보여준다
페이긴은 아직은 도덕심이라는 것이 있는 꼬마들을 어떻게 하면 잘 구슬려 훌륭한 소매치기로 만들지 잘 알고 있다
윽박지르거나 때리는 폭력적인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외로운 처지의 소년에게 먼저 범죄를 저지르게 해서, 원래의 세계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죄책감을 안겨주고
가족같이 따뜻하게 대해주어 정서적으로 의존하도록 만든다
마치 본인이 범죄자 패거리에 들어가본양 수법을 능수능란하게 묘사하는 디킨스에게 혀를 내둘렀다
디킨스의 뛰어난 점은 혼란스러운 현실을 이상적인 형태로 왜곡하는 대신 아수라장 그대로 지면에 옮겨놓는다는 것이다
산업혁명과 급격한 도시화로 생겨난 빈민들의 불쾌한 실상이라든가,
슬슬 물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여성과 남성간의 갈등
범죄로 몸살을 앓는 동시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인 런던
이런 당시의 난장판을 재현한 책을 읽고 있노라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작가 본인조차 어떤 소재들은 무슨 판단을 내리는 것이 맞는지 헷갈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 현실을 재단하는 대신 일단은 써내려간다
예를 들어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낸시'는 기존 가부장 사회의 성녀와 창녀 프레임으로 단순히 구분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매춘부로, 범죄자 일당의 행동대원으로 씩씩하게 활약하지만 동시에 올리버를 가여워하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올리버를 돕는 인물이다
사익스가 지독한 불한당임에도 그를 사랑하여 떠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당시의 문학적 전통에 따라 여성 캐릭터를 자애로운 어머니 또는 요부로 나누는 대신에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의 복잡하고 입체적인 모습을 담아낸다
이 소설이 딱히 여성혐오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낸시라는 캐릭터는 당시 사회상에 비추어볼때 상당히 세련되고 현대적인 서사를 지녔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디킨스 또한 당대 사회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었으므로 낸시를 어떻게 다룰지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결말을 맺기는 한다
솔직히 올리버를 비롯한 선역 캐릭터들은 평면적이고 아무 욕망이랄게 없어서 재미가 없다
그래서 이들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원래 막장드라마는 선역보다 악역이 재밌어야 잘 팔리는 법이다
다른 후대 작가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페이긴과 사익스, 낸시, 소매치기 소년들의 관계성은 많은 문학작품에서 변형되며 재생산되고 있다
뒷골목 인생들의 유사가족 관계는 꾸준히 인기가 있는 테마이지 않은가
그 원형을 알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 물론 600페이지의 압박을 견뎌야하지만 의외로 도파민 듬뿍 막장소설이라 보다보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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