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뚤어진 집(1949)
- 독서록
- 2023. 1. 8. 22:56
휴가에는 역시 추리 소설이 제격인 법
애거서 크리스티의 <비뚤어진 집>을 읽었다
전후의 어지러운 상황과 급변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이 책은
인간에 대한 뛰어난 분석력을 보여주는 추리 소설인 동시에
당대의 사회 변화를 관찰하기도 좋은 흥미로운 책이다
주인공한테는 카이로에서 만난 똑부러진 여자친구 소피아가 있는데
카이로에서 만날 당시에는 도무지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몇년후에 그들은 소피아 할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소피아는 할아버지가 죽은 과정이 무엇인가 석연치 않음을 알고, 주인공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은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면서 말이다
애리스티드 레오니데스는 소피아의 할아버지로, 2차 세계 대전과 전후의 어지러운 사회에서
법망을 요령있게 피해다니며 크나큰 부를 쌓은 뛰어난 기량의 사업가다
하지만 그런 할아버지와 달리 자식들은 겉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실은 아무런 사업감각도 현실감각도 없어서
할아버지에게 붙어사는 처지다
가족이 서로를 미워한다는 건 분명히 나쁜 일이지만, 어떤 때는 서로 뒤얽힌 애정 속에서 살아가는 게 더 나쁠 수도 있어요. 예전에 당신한테 우리 가족이 비뚤어진 작은 집에서 산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의미였어요. 물론 비뚤어졌다는 의미를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보는 건 아니에요. 그저 우리 가족이 각자 혼자 힘으로 꼿꼿이 일어나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었어요. 우린 모두 조금씩 뒤틀리고 뒤엉켜 있는 것 같아요.
작중에서 주인공에게 소피아가 자신의 가족에 대해 하는 말이다
서로 미워하는 가족만큼이나, 서로를 사랑하는 가족도 괴로울 수 있다
인간에 대해 정말인지 잘 아는 작가구나 싶었다
레오니데스 집안의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해서 자꾸만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예를 들어, 장남은 아무런 사업감각도 없는데도 존경하는 아버지의 기대를 따르기 위해 자꾸 사업에 도전했다가 망하고
할아버지는 장남이 망할 때마다 도와줘서 결코 사업을 그만두지 못하게 된다
끊임없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이런 가족 관계가 흥미롭기도 하고 또 굉장히 현실에 있음직해서 작가의 관찰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작중에서 은근하게 보여지는 시대의 변화도 눈에 띈다
사실 이 책만 읽었으면 나도 잘 몰랐을 것 같지만, 요즘 영국 고전을 많이 읽어서 확실히 시대 별로 차이가 크구나 싶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여자들의 경제 활동이다
19세기에 쓰여진 책들을 보면 여자들은 대부분 직업 없이 재산을 상속받아 결혼하는 것이 미덕으로 나와 있으며,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라봤자 하녀, 가정교사, 매춘부 정도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에 쓰여진 이 책을 보면 연구실에서 일하는 여성, 외교부에서 일하는 여성 등
전문적이고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대거 등장한다
고작 한세기만에 이런 변화가 일어났다는게 너무 신기했고
확실히 전쟁 때문에 여성의 사회활동이 증가했다는게 보였다
심지어 현실감각 없는 아들들 대신에 명석한 손녀에게 전 재산을 물려준다는 파격적인 설정까지
전쟁 전과 후의 유럽 사회의 변화가 얼마나 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몰입되는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던 작품
다만 '비뚤어진 가족'이라는 테마를 깊게 파고들어서 끝장을 봤으면 더 재밌었을 것 같다
가족간의 비틀린 관계 묘사가 정말 기가 막힌데, 초중반에 분위기 조성용으로만 좀 쓰고 그다지 파고들지는 않는다
막 흥미진진해지는데 짠 하고 범인이 나오니까 조금 아쉽다
물론 더 파고들면 내 취향에는 맞겠지만 추리소설로서는 지루해질수도 있으니 이렇게 끝맺음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여튼 페이지를 펴는 순간 아무 노력하지 않고도 몰입되니 휴가지에서 읽을 책으로는 최고다
다음 여행에도 애거서 크리스티를 빌려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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