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0)

룰루 밀러의 뭐라 분류하기 어려운 장르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문학이면서 과학과 역사를 넘나들고 권력에 대한 고발을 하는가 하면 개인적인 성찰과 철학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이 뭐라 말하기 어려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혼란스러움을 감추기 쉽지 않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분류에 혼란을 주는 책의 형식 또한, 의도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집착

 

하여튼 복잡한 내용이지만 그래도 간단히 말해보자면,

대충 저자의 덕질기이자 탈덕기로 요약할 수 있겠다

덕질의 대상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19세기 어류학자

지진으로 조던이 수집한 모든 어류 표본이 떨어져 망가졌을 때, 

박제된 어류가 손상되는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병에 붙어있던 이름표가 모두 뒤섞여

그가 평생을 노력해서 만들어온 질서가 다시 혼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런데 이 때 조던은 포기하는 대신에 바늘을 하나 찾아와 이름표를 어류에 직접 꾀매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런 글을 읽고, 그를 포기하지 않게 한 것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저자는 당시 어마어마한 삶의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조던에게서 자신이 찾던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조던에 대한 덕질이 시작이 된다

19세기에 태어난 사람이지만 원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온갖 저서는 물론 무려 두 권짜리 자서전도 있었다!

저자는 조던에 대해 강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을 조사해나간다

책의 전반부는 조던의 위인전처럼 느껴져서, 이걸 왜 나한테 읽으라는 거지 싶다

그래도 작가의 필력만은 상당해서 술술 읽기는 했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계속 이런 내용이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이 가득했다

조던에 대한 저자의 상당히 긍정적인 톤의 진술(전반부에 한정된)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당히 역겨운 인간으로 느껴졌다

어릴 적부터 또래 사이에서 적응을 못해서 외톨이였던 그는 삶의 목표를 또래에게 인정받는 것 대신 온갖 자연물의 이름을 외우고 분류하는 것에서 찾는다

그렇게 좋은 학자만 됐으면 좋으련만 조던은 정말인지 찐따가 권력을 쥐어서 유해해진 유형 그 자체를 보여준다

유년시절부터 다른 사람들과 꾸준히 상호작용을 해온 사람들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을 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혼자만의 세상에 빠진 사람은 자기파악 능력 대신에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비대하고 긍정적인 자아를 발전시킨다

실제 자신의 모습보다 자신을 훨씬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자기 기만이다

 정적인 자기 기만이 때때로 스스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탓에 타인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런 조던의 특성은 그가 성공적인 어류학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이자, 그의 모든 과오의 원인이 된다

저자는 조던에 대해 조사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것과 점점 다른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2. 드러나는 조던의 실체

 

이 책을 일종의 덕질기라고 표현한 것은, 덕질을 할 때 흔히 갖게되는 감정의 널뛰기가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실제로 아이돌을 좋아하듯이 조던을 덕질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에 빠져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기 위해 집착하는 태도가 꼭 덕후의 그것과 닮았다

연인간의 사랑으로 굳이 비유하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 작가의 일방적인 집착이기 때문이다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쌍방향적인 소통이 있는 연인간의 사랑과는 달리 덕질은 늘 한 방향이다

그렇기 때문에 덕후는 덕질 대상에 대해 알려져 있는 사실만을 알게 되고, 대중 앞에서의 이미지와 실제 덕질 대상의 간극에 대해 영원히 궁금해 할 수 밖에는 없다

그 간극이 꽤 거대한 것이었음을 알게되는 순간 소위 '탈덕'을 한다

이 책은 덕질에 관한 것이 전혀 아니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한 사람에 대한 몰입과 집착은 꼭 덕질을 연상케 한다

결국 저자도 일종의 탈덕을 하게 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생에서 삶의 혼란을 잠재워줄 명쾌한 해답을 얻으려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다

조던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대단한 노력가일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고 남은 틀리다는 비대한 자아에서 비롯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조던은 모든 생명을 '신성한 사다리' 위에 순서대로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더 우월한 생명체가 있고 더 열등한 생명체가 있다는 믿음이었다

조던의 사다리 꼭대기에는 인간이 존재했는데, 그 인간 마저도 사다리에 나누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같이 사회에 공헌하는 성실하고 열정적인 엘리트가 있는 반면, 사회를 좀먹게하는 게으르고 열등한 종자들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현대에는 이미 교육과 환경에 의해 주로 영향을 받는다고 밝혀진 범죄율이나 낮은 학습성취도가 유전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의 대를 여기에서 끊는 것만이 인류가 퇴화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조던은 자신이 조국을 살리기 위해 위대한 일을 한다고 믿으며 외국인과 이민자, 빈민들을 강제적으로 불임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빛을 발하여 미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우생학을 받아들였다

나치의 유산으로만 알려졌던 우생학과 강제 불임시술이 사실 미국에서 더 빨리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저자는 당시 수용소에서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른체 강제로 불임수술을 당한 여성을 만나 인터뷰를 한다

그는 그 일로 고통스러워 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삶을 산다

스스로 멋진 삶을 꾸릴 능력이 있었던 이 여성은 한 남성의 그릇된 믿음과 사회의 동조 때문에 '부적격자'로 낙인찍힌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인터뷰 장면이 참 감동적이었다

저자는 섬세한 시선으로 이 여성을 관찰하며, 조던의 생각이 얼마나 부당한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도표에는 나타나지 않는, 오직 인간의 시선으로 관찰해야만 드러나는 가치가 드러나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조던의 악행은 그 뿐만이 아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초대 학장이었던 조던은 자신의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는(주로 합당한 이유가 있다) 설립자 제인 스탠퍼드를 몹시 싫어했다

제인은 1905년에 하와이에서 사망했는데, 사망 당시의 증상이 독극물 중독으로 강하게 의심되었다

조던은 제인의 사망 직후 하와이로 가서 그가 살해된 것이 아니라며 온갖 반론을 펼친다

독극물 중독이 확실하다는 하와이의 의사들을 돌팔이로 몰고, 의사 면허를 딴 지 얼마 안된 의사를 직접 고용하여 반박하게 한다

수상할 정도로 제인의 죽음이 살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조던이 제인의 살해에 직접 관여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시체에서 발견된 독극물이 조던이 어류 표본을 채집할 때 즐겨 사용하던 독극물과 동일한 종류였던 것이 우연의 일치이긴 어려워 보인다

 

 

3. 저자의 깨달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던의 생애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던 저자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조던이 그토록 늘 긍정적으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던 것은 본인이 스스로 비판하기도 했던 근거없는 믿음이었다

결국 인간의 삶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고, 모두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자기기만이었다

적절한 수준의 자기기만은 명랑하게 사는 것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조던의 경우에는 근거없는 자기 확신에 차 많은 사람을 고통으로 몰고간 파괴적인 성격이 강했다

기나긴 여정 끝에 다시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결론으로 돌아가게된 저자는 허탈감을 느낀다

게다가 조던은 그토록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여전히 학계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저자는 조던에게 한방 제대로 먹일 방법을 찾아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문구는 말도 안되게 느껴지만 실제로 참이다

생물을 분류할 때 물고기 혹은 어류라는 범주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 현대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한다

마치 아시아인과 서양인같은 분류처럼 말이다

아시아인과 서양인이라는 구분은 한 때 꽤 과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사실 아시아인으로 묶인 사람간의 유전자 차이가 아시아인과 서양인 사이의 차이보다 훨씬 크다고 한다

매우 비과학적이고도 서양인의 차별적인 인식과 편리에 맞춘 분류인 셈이다

어류도 마찬가지로 하나로 묶이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생명체들이 하나로 묶여있다고 한다

실제로 어떤 물고기는 같은 어류로 묶이는 다른 물고기보다 오히려 인간에 유전적으로 가까울 정도로 상당히 차이가 심하다

인간이 보기에는 다 비슷하게 물의 저항을 적게 받는 유선형의 길쭉한 형태에 비늘과 지느러미가 달렸지만,

이는 물이라는 환경에서 살기 위해 비슷하게 진화한 것 뿐이고, 실제 진화의 갈래를 기준으로 보면 전혀 상관없는 종들이 하나로 묶여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저자는 한가지 재미있는 비유로 이 상황을 설명한다

추운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과 여러 동물이 모두 추위라는 환경 때문에 털이 무성하게 나도록 자연선택이 되었는데

'털'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사람과 다른 동물들을 같은 종으로 묶는 격이라는 이야기다

많은 생물학자들이 이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일때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물고기가 존재한다는 반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박을 찾을 수록 이 새로운 이론의 견고함만 드러났고 어류라는 분류의 부정확함은 확실해졌다

저자는 이것을 조던에 대한 통쾌한 복수로 생각한다

조던이 평생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자연계의 신성한 사다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생명체는 우열이 아닌 저마다의 경이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인간의 편협한 시선으로 볼때 '신성한 사다리'니 우생학같은 헛짓거리가 탄생했던 것이다

좀처럼 한 장르로 분류하기 어려운 이 책 역시 그런 관점을 일부분 녹여낸 듯 하다

인간의 편협한 시각으로 한 분류가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4. 인간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서로를 중요하게 만들 수 있다

 

전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특별하다는 것은 비과학적이며 오만한 생각이다

인간이 굳게 믿고 있는 것과 달리 인간은 다른 생명체보다 우월하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장 하찮은 것을 비유할 때 쓰는 생명체인 개미는 토양 속의 탄소를 순환시켜 생태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하찮고 지저분하게 생각되는 녹조, 즉 남조류는 산소가 없던 원시 지구에 최초로 산소를 생산해서 동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남조류가 없었다면 인간은 커녕 인간 할아버지도 지구에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만하게도 인간은 뒤늦게 나타난 주제에 자신이 생명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있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는 일찍이 이런 사실을 깨닫고 큰 혼란에 빠졌다

인간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자신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삶의 목표와 의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런 혼란을 거둬주리라 믿으며 조던의 자취를 쫓았지만

결국 조던은 자기기만에 빠져 여러 과오를 저지른 악당임이 밝혀졌다

책의 결말에서 역시 저자는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전혀 특별한 위치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다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불임수술 생존자와 만나면서 저자는 그가 얼마나 친구에게 다정하고 좋은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에게 너무나 큰 의미를 가졌다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사람간의 우열을 주장함으로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았던 조던보다

사람간의 다정한 관계를 통해 의미를 찾는 후자가 훨씬 건강해보인다

저자 또한 새로운 사랑을 찾고, 그 관계에서 커다란 의미를 얻는다

저자의 깨달음이 각박한 세상에 다소 감성적으로 보일지라도 꼭 필요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우월한 종자와 열등한 종자가 따로 있다고 믿으며 차별을 정당화 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이다

그런 구분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듯이 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족한 자존감을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에서 채우는 대신에 다른 사람을 소중히 대함으로서 채우자

이것이 건강한 자신과 사회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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