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커트 밑의 극장(1991)

우에노 치즈코의 <스커트 밑의 극장>을 읽었다

지난번에 저자의 <여성혐오를 혐오하다>를 읽고 몹시 감탄했었는데, 이 책이 그 책에서 자주 언급되어서 궁금했다

절판이라 꽤 번거롭게 구했는데 200페이지 짜리라 후루룩 읽어버려서 허무한 기분

어그로 가득한 제목이 인상적인 이 책은, 실은 속옷이라는 복식의 역사와 문화적 함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매우 학술적인 내용이긴 한데 또 어떤 면에서는 엄청 발칙하고 하여간에 공공도서관에서 굳이 놔두고 싶어할 종류의 책은 아니다

학술 도서의 주된 구매처가 개인보다는 도서관임을 떠올려보면, 이 책의 절판이 그리 놀랍지는 않다

팬티 사진이(물론 학술적 참고 목적이다) 가득한 책을 누가 도서관에 두고 싶어하겠는가

하여간에 나도 처음 펼쳤을 때 팬티 사진이 너무 많이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ㅋㅋㅋㅋㅋ

읽으실 분들은 개인적인 공간에서 혼자! 읽으시길

 

치즈코라는 학자의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성적인 주제를 터부시하거나 완곡하게 애둘러 말하는 대신에

아주 대담하고 직설적으로 담론의 정 가운데 세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몇몇 남성 학자나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지나치게 도착적이고 성적인 것에 과다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성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그 중요성을 너무 간과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티비에서 케이팝의 성공 요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하는데, 전문가랍시고 나온 사람들이 케이팝은 평화와 다양성에 대한 메시지를 세계에 전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한다

정말인지 솔직하지 못하고 본질에 1도 닿아있지 않은 다큐멘터리였다

평화와 다양성으로 덕질을 할 사람들이면 간디를 사랑했겠지

완성도 높은 댄스 음악과 꼭 맞는 잘 짜여진 퍼포먼스, 그리고 그로 인해 극대화된 성적 매력

내가 보기에 아이돌 산업에서 성적 어필을 빼고 이야기하는 건 그냥 앙꼬없는 찐빵 얘기나 다를 게 없다

물론 다른 요소들도 훌륭하고 성공에 기여를 했겠지만, 세상에 성적매력이 없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음?

아이돌만 그런게 아니라 세계적 히트를 쳤던 가수들은 다 그랬다 엘비스 프레슬리도 그랬고 비틀즈도 그랬다 

성적 매력만을 주목하게 되면 가수의 격이 낮아지는 것 같아 굳이 언급은 안하지만, 하여튼 성공한 가수들은 섹시하다

 

하여튼 성(姓)이라는게 하도 자극적이다보니까 좀 극과 극인 것 같다

프로이트마냥 모든 걸 성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거나, 아예 거세된 것처럼 언급을 하지 않거나 한다

그런 면에서 치즈코는 성을 담론의 중심으로 두지만 담백하게 다룸으로서, 이것이 누군가의 도착적인 망상이 아니라 학문적 성격을 띈 글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책의 초반부는 여성의 속옷이라는 복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여러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우선 지금 현대인들이 입는 '팬티'라는 형태의 속옷은 결코 오래된 것이 아니다

치즈코가 일본의 속옷 복식의 역사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가랑이에 달라붙지 않는 헐렁한 속바지 형태의 속옷을 입었다고 한다

단지 월경을 할 때만 훈도시 같은 T자 형태의 면으로된 천을 둘러 피를 받아 냈다고 한다

속옷이 몸에 달라붙으면 당연히 떨어져 있는 경우보다 쉽게 더러워 질 것이다

물이 귀하고 세탁을 자주 하기 어려웠던 근대 이전의 환경에서, 몸이 착 달라붙어 거의 매일 빨아야 하는 속옷은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첫번째 가설은 이렇게 월경을 할 때 생리대로 썼던 천에서 팬티로 발전했다는 것이고(일본에서는 물론 서양의 문물이 들어온 것이었지만)

 

두번째 가설은 이성에게 성적인 어필을 하기 위해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브레이지어가 들어오기 전에는 여성이 남들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그다지 성적인 코드로 읽히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과거에는 가슴을 내놓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행위가 전혀 외설스럽지 않고 당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브레이지어가 들어왔다

원래 큰 의미 없던(물론 성적 의미가 있긴 있었겠지만) 부위를 가리기 시작하자, 갑자기 가치가 생겼다

은폐함으로서 갑자기 가슴은 남성에게는 보기위해 매달려야 하는 것이 되었고, 여성에게는 숨겨야 하는 것이 되었다

저자가 마지막 저자의 말에 한 겁나 웃긴 말이 있는데 ㅋㅋㅋㅋ 바로 여자의 속옷과 천황제는 퍽 닮아있다는 것이다

사실 알맹이에는 큰 의미도 없는데 비밀스럽게 은폐되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너도나도 보고 싶어한다는 거다

 

저자가 속옷의 본말이 전도되었음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재미있다

남성들이 '여성의 속옷에 흥분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명제일 것이다

사실 속옷이라는 것은(성행위 상황에 한정해서) 벗고 맨살을 드러내는것에 의미가 있는 것인데

오히려 맨살보다 속옷에 집착하고 맨살은 거부하는 남성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책이 쓰인 80년대 일본 기준으로)

현실 여성에게 접근하면 그들이 자신을 평가하는 '리액션'을 들어야해서 두렵기 때문에,

그 직전까지만으로 성적 판타지를 한정하고 속옷 사진에 집착하고, 심지어는 2d의 속옷만 입은 캐릭터만을 성욕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재밌는게 이와 동일한 현상이 현재의 한국에도 일어나고 있다

한국에서 인기있는 남성향 게임들을 보면 하나같이 어리고 순종적으로 생긴 여성 캐릭터가 속옷에 가까운 옷만을 걸친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는 이 현상이 꼴사나운 것과는 별개로, 저럴거면 그냥 다 벗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의문이 늘 들었다

이미 거의 다 벗은 것이나 다름 없는데 굳이 기만적으로 끈팬티를 입혀야 인기가 있는 것인가?

이 의문이 저자 덕분에 풀렸다

현실의 여성에게 리액션 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맨살'보다 '속옷'이 있는 상태를 더 선호하는 도착적 판타지가 생긴 것이다

저자는 이런 남성들이 실제로 유해하지는 않다고 주장했지만, 21세기 한국을 방문해본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ㅎㅎ

 

옛날에 나온 책이라 그런지 요즘 정서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꽤 있어서 그런 부분은 그냥 흘리듯이 읽었다

어머니에 의한 팬티 지배..? 이건 대체 뭔 소린지 잘 모르겠음 

그리고 프로이트스러운 해석이 나올 때도 좀 별로 였다

앞에서 치즈코가 좋은 점이 성을 담론에서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담백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는데

가끔은 좀 과하게 의미 부여를 하는 부분도 있기는 하다

 

결론적으로 저자의 생각은, 현재의 팬티나 팬티를 대하는 남성과 여성의 태도, 그리고 성행위는 결코 자연스러운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욕이 참을 수 없는 남성의 자연스러운 욕구라는 둥의 기존 관념을 반박하고 성을 탈자연화하는 과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굳이 찾아서 볼 정도의 감동이 있는 책은 아니었지만 치즈코씨의 발칙한 매력이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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