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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4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1966)
- 2022.12.09 제인 에어(1847)
- 2022.12.04 드라큘라(1897)
- 2022.12.03 한 여자(1987)
-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1966)
- 독서록
- 2022. 12. 14. 22:26
이 책을 고른 것에는 근사하고 고독해보이는 제목의 영향이 컸다
'광활한'도 '드넓은'도 아닌 '광막한'이라는 생소한 어휘와 사르가소 바다라는 난생 처음 듣는 이름
나의 지적 허영심을 달래줄 근사한 책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사르가소 바다가 이 책과 무슨 연관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운이 좋게도 해양생물학을 전공한 어머니가 이에 대해 풍부한 설명을 들려주셨다
Sargassum(사가숨)은 한국어로는 '모자반'이라고 부르는 해조류의 라틴어 학명이다
특이하게도 서인도제도 근처의 바다 한 지역을 거의 덮다시피 한 모습에 그 바다를 Sargasso sea라고 명명한 것
모자반은 기본적으로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해조류이기 때문에 아주 깊은 바다에서 살지는 않는다
뿌리를 내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해안가에서 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르가소 바다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해안가가 없는 바다로, 여러 해류에 둘러쌓여 한가운데에 있는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해안에 주로 서식하는 모자반이 대체 이 바다에 어떻게 살고 있는가?
바로 해류에 휩쓸려 뿌리가 뽑혀 사르가소 바다로 유입되어 둥둥 떠다니면서 사는 것이다
모자반의 뿌리에는 육상 식물의 그것처럼 땅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이 아닌, 단지 땅에 줄기를 고정하는 기능만 존재한다
따라서 뿌리가 뽑혀도 영양 공급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동안 살 수 있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진 리스가 <제인 에어>에 등장하는 로체스터의 미친 아내 '버사'에 영감을 받고 쓴 작품이다
<제인 에어>에서 버사는 크리올(자메이카에서 태어난 백인 자손, 현재는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출신이고 그의 재산을 보고 로체스터가 결혼했으며,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쳐버렸다는 정보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책에서 그는 제인 에어의 심리적 공포와 당시 여성들에게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등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며,
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로체스터는 끊임없이 버사를 힐난하는 말(성적으로 타락함, 사나움, 악마적임, 광인)을 하면서 이런 미친 부인을 안고 사는 자신에 대한 연민에 젖어 피해의식이 가득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로체스터야말로 돈 때문에 아내와 결혼해놓고 아내 돈을 다 가로챈 다음, 가둬놓고 자기는 총각행세하는 미친놈이 아닌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저자인 진 리스는 예리한 시선으로 아무도 버사를 대변해주지 않음을 지적한다
이 이야기는 미친 아내 버사가 미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미쳐버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상상을 담고 있다
마치 해류에 휩쓸려 사르가소 바다에서 고립된 모자반같은 삶을 사는 버사, 혹은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앙투아네트 코즈웨이는 자메이카에서 대규모 노예 농장을 경영했던 백인의 딸이다
노예해방 후에 그들 가족은 본토 영국인들과 자메이카인들의 미움을 동시에 받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린다
노예제가 금지되고 나쁜 백인들은 모두 본토로 돌아가고, 흑인들은 자유롭게 살았답니다!라는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상상하고 있었는데, 나의 상상은 현실의 복잡함을 알지 못하는 매우 순진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식민지에서 노예 농장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백인들은 본토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들이다
본토에서 재산을 쌓거나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을 방법이 없었던 사람들이 기회의 땅으로 떠나 한 몫 단단히 잡은 것
노예제 철폐 당시 이미 자메이카에 정착한 노예제 부역 백인들과 본토 백인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히 차이가 났다
특히 본토 백인들은 노예제를 철폐에 성공했다는 도덕적 우위까지 탐내며, 자메이카의 대농장주들을 사악하다며 비난한다
물론 노예제 부역 백인들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행위를 하긴 했는데, 손안대고 코풀기만 했던 본토 백인들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 이건 참 어이없는 생각이다
이미 식민지의 황금으로 본토를 화려하게 발전시켰으면서 직접적으로 가담한 놈들만 나쁜놈! 하고 슬쩍 넘어가려는 거다
당연히 자메이카의 흑인들은 이런 백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을 증오하고 공격하려고 한다
노예 철폐 후에 대농장주들은 모두 몰락하여 나앉은 신세가 되었고 덕분에 수많은 농장들이 헐값에 시장에 나왔다
또 다른 백인들이 기회를 노리며 자메이카에 유입되어 농장을 산다
이들은 본인들이 기존 노예농장주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는 말들이 진짜 황당하다 ㅋㅋㅋㅋ
자신들이 위대한 노예 철폐를 이뤘다고 하면서 마치 흑인들이 자신들에게 공격적일 이유가 없다는 듯이 군다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버사는 노예제 금지 이후에 영국에서 온 자신의 새 남편 메이슨에게 흑인들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설득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메이슨은 흑인들의 증오를 이해하지 못하고, 위험에 대비하지 않아 결국 습격당하게 된다
앙투아네트는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백인(크리올)으로, 흑인들에게 증오를 받는 동시에 백인들에게도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차별당한다
그를 다루는 시선에는 크리올을 변호하고 동정하는 시선이 엿보여서 조금 불편하기도 하다
불쌍하고 억울한 것으로 따지면 갑자기 아프리카에서 잡혀와 자메이카에서 노예로 살게된 흑인들이 제일이니까 말이다
노예제 부역하던 백인 후손이 철폐 후 몰락해서 징징거리는 내용으로 읽히는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식민지 착취를 통해 문화를 융성하게 발전시킨 영국 본토의 문학들은 아직까지 명작으로 취급받지 않는가
착취구조의 맨 위에서 손에 피묻힐 일 없었던 사람들이 쓴 문학은 괜찮고,
아래에서 손에 직접 피를 묻힌 사람들 자손의 경험담은 읽을 가치도 없는 부정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당시의 본토 영국인들이 그랬듯이 다소 위선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다
앙투아네트는 확실히 순백의 피해자는 아니다
노예 농장주의 딸로서 그 반인륜적인 제도의 혜택을 받은 사람 중 하나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식민주의가 낳은 여성 피해자로서, 아무 이유없이 출신만으로 흑인들에게는 증오와 복수의 대상이, 백인들에게는 이방인이자 돈을 뜯어낼 대상이 된다
흑인들을 죽이고 압제한 것은 대부분 백인 남성인데도, 그 증오와 분노는 이상하게 만만한 여성과 아이에게 흘러간다
흑인 남성들은 무력해진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를 강간하며 화를 풀고, 그 사실을 알게된 백인 남성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의 혈통을 더럽다고 느끼며 앙투아네트를 힐난한다
그러니까 인류 최후의 식민지는 여성이라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다
한편 로체스터는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이 강한 인물이다
아름다운 아내랑 결혼해서 돈도 꿀꺽 다 먹은 주제에 '이 곳은 저주받은 곳이다, 공격받는 느낌이다.'라는 말을 끝도 없이 해서 사람 질리게 만든다
게다가 아내와 사랑에 빠졌다가 편지 한통에 홀랑 넘어가 아내를 증오하고 멸시한다
앙투아네트가 기어코 미쳐버리는 것은 자신의 나쁜 피 때문이 아니라 로체스터의 가증스러운 태도 때문이다
로체스터는 자신이 이 결혼을 속아서 했다고 생각하며 본인을 매우 불쌍하게 여긴다
그가 여기서 잃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돈도 얻었지, 아름다운 아내도 얻었지...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남편의 이유없는 변덕때문에 불안에 시달리고 사랑을 갈구하는 처지가 된다
정말 불쌍한 것은 앙투아네트인데 본인이 모든 일의 최대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제인 에어와의 비교를 하면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까 다 까먹어서 기억이 안난다
이 책이 원작의 공식적인 프리퀄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이런 다른 시각이 있구나 하면서 봤다
후기식민주의의 시선으로 고전에 새로운 상상력과 해석을 붙인 것은 참신한데
사실 문학적인 완성도로는 제인 에어가 훨씬 뛰어나다
집착적인 감정들의 묘사와 쫄깃한 대사들이 제인 에어의 매력인데
사르가소 바다는 감정이 너무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다
배척받는 외부인의 느낌을 주인공에게 주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썼을 수도 있긴한데
그렇다기엔 좀 치밀함이 부족해서 직관적으로 '아 일부러 이렇게 썼구나!'라는 생각은 안들었다
그냥 단순한 필력의 부족이나 번역의 잘못이 커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메이카의 복잡한 식민지배 역사를 수박겉핥기로나마 알게 된 것은 재미있었고
또 백인도 흑인도 아닌 묘한 처지의 앙투아네트의 지위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세상은 참 흑백으로 나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백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를 가해자로 만들지만, 동시에 여성으로서는 피해자이다
책을 읽을 때 항상 누가 착한 놈이고 나쁜 놈인지 파악하면서 읽는 편인데,
앙투아네타같은 경우는 한쪽으로 생각하기 힘든 정체성을 가져서 참 복잡한 마음으로 읽었다
책 자체는 좀 실망스러웠지만 머리굴리며 읽는 재미가 있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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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에어(1847)
- 독서록
- 2022. 12. 9. 15:03
현실에서는 상식적이고 건전한 연애를 선호하지만 이상하게 컨텐츠의 영역에서는 빻을 수록 맛이 좋다
실제로는 충족할 수 없고, 충족되어서도 안되는 인간의 부적절한 욕망을 충족해준다
그런 불순한 마음가짐으로 얼마 전에 고전 소설 <드라큘라>를 읽었는데 슬프게도 영화에서처럼 드라큘라와 여주인공의 금단의 로맨스는 안나오고 빅토리아시대 찌질한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서만 알게 되었다....
이런 슬픔을 뒤로한채 <제인 에어>를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기로 마음 먹었을 때 나에게는 아무런 불순한 의도도 욕망도 없이 단순히 지루함을 참아내겠다는 결의만이 있을 뿐이었다
대체로 고전명작이라는 딱지가 붙은 것들은 그 문학적 명성과는 별개로 재미가 없다는 것이 나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였기 때문에,
제인 에어를 읽기 시작할 때 나는 재미에 대한 기대는 접어둔 채로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갑갑한 삶의 일대기를 진지한 자세로 고찰할 다짐만이 있었다
아니 근데 이 책, 생각외로 잔잔함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제인 에어라는 젊은 여성이 기숙학교에서 나와 가정교사로 근무하다가 나이가 20살이나 많은 집주인과 눈이 맞아 결혼을 하기로 했는데 알고보니 집주인은 부인이 있어서 사기결혼이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을 신문 기사에서 봤다면 집주인에 대한 분노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여성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어디에나 널려있는 통속적인 이야기라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 샬럿 브론테는 이 이야기를 '처녀가 몸가짐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신세를 망친다'같은 교훈 대신에 제인의 예민한 심리와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서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현대의 관점으로 살펴보면, 아니 그 당시의 기준으로도 20살이나 많은 남자한테 사기결혼을 당했는데 미쳤다고 돌아가서 용서해준다는 것이 말이 안되게 빻긴 했다
하지만 심리 변화, 성적 긴장감이 극도로 잘 표현되어 있어서, 제인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여기서 이해가 간다는 말은 그것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여성주의적으로 올바른 행위라는 것이 아니라
제인의 행동에서 독자들이 충분한 개연성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1. 유년시절
게이트헤드장
제인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숙모인 리드 부인에게 맡겨져 게이트헤드장에서 사촌들과 함께 지낸다
그곳에서 제인은 완전한 천덕꾸러기 신세로, 사촌인 존에게 맞아서 머리가 찢어져도 반항한 자기만 혼난다
제인이 게이트헤드장에서 겪는 고통은 육체 뿐 아니라 그녀의 마음에 큰 흉터를 남긴다
리드 부인은 끊임없이 제인을 거짓말쟁이에 못생기고 성질이 더럽다며 비난한다
괴롭힘은 언제나 나쁘지만, 특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야할 어린 나이에 받는 어른의 괴롭힘과 소외는 더 큰 흉을 만든다
자신은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심리의 뿌리에 깊게 자리잡고,
언제나 다른 사람 눈에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그런 행동이 성과를 낼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게 된다
그는 존에게 대든 벌로 으시시한 붉은 방에 갇혀, 극도의 긴장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유령같은 존재를 목격한다
이는 삭막하고 무정했던 게이트헤드 시절의 상징이 되어 제인의 마음 깊숙히 그림자로서 자리하고
행복한 순간마다 제인에게 '넌 행복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불안 요소가 된다
로우드 기숙학교
제인은 로우드 기숙학교라는 곳으로 보내진다
이 곳에서 제인을 기다리는 것은 엄격한 규율과 낙후된 시설, 처참한 음식이지만 적어도 제인의 마음은 편해진다
게이트우드 학교는 제인의 '들이받는' 성격이 조금 더 세련된 형태로 표출되도록 변화시킨다
들이받는다는 것은 제인이 결코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사촌 존 리드가 그녀를 피가 나도록 때렸을 때, 제인 또한 존에게 달려들어 혼쭐을 내주었고
리드 부인이 제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을 때 당신을 미워하노라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사람들이 만약 자신들을 모질고 부당하게만 대하는 자들에게 늘 친절하게 순종만 한다면 그 악한 자들은 자기들 멋대로 행동하려고 할 거야. 그들은 결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전혀 변하지 않을거고, 오히려 점점 더 나쁜 사람들이 돼갈 거야. 이유 없이 누군가 우리를 때리면 아주 세게 되받아쳐야 해.
부당한 일의 피해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제인의 당당한 성품은 작품의 큰 매력요소 중 하나이다
어쨌든 제인의 이런 성격이 교정되거나 교화된 것은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다만 헬렌이라는 친구와의 애정어린 관계와 온화한 템플 교장 선생님의 영향으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헬렌은 자신을 향한 부당한 매질에 억울해하지 않는 특이한 성격이다
언제나 해탈한 듯이 모든 일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소녀에 제인은 푹 빠져 자신의 애정을 아낌없이 준다
헬렌이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일은 어린 제인에게 있어 몹시 충격적이고 슬픈 사건으로 기억된다
제인은 헬렌의 모든 인내와 침착함을 물려 받은 것처럼 그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온화하고 평온한 성격인 템플 선생님도 제인의 사회화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겉으로만 길들여져 보일 뿐 제인은 여전히 꽤 저항적이고 모험심이 넘친다
얌전하고 조용한 말투로 그렇지 않은 내용의 말을 하는 숙녀로 자라난다
2. 손필드 장
첫 만남
제인은 편지를 부치러 마을로 나가다가 한 중년의 신사가 낙마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거칠고 무례한 태도의 이 남자는 알고보니 자기 고용주였고...
다짜고짜 알 수 없는 말을 배려없이 쏟아내는 이 남자가 제인은 이상하게 편하다
여학교에 다니면서 남자라곤 평생 별로 접해본 일도 없는 제인은 오히려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잘생긴 신사였다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을 거라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와 드라마에서의 로체스터씨와 달리 책에서 로체스터씨는 여지없는 추남으로 그려진다
로체스터: 내가 미남이라고 생각하오?
제인: 아니오
첫 만남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과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이라니... 그냥 천생연분같다
자기보다 20살 많은 못생긴 남자한테 왜 빠지는지 줄거리만 보면 이해가 안가는데 책을 보면 납득이 간다
어렸을 때 사랑받지 못하고, 기숙학교에서 8년동안 수녀같은 생활을 한 어린 여자애다
근데 모두한테 거칠고 조롱하듯이 행동하는 남자가 자기한테만 자꾸 약한 모습을 보인다?
자기만 편애하고 자꾸 틱틱대고 응석을 부린다?
이건 안넘어갈 수 없는 노릇이다 이미 시작부터 진 게임인 거임
특히 제인의 어린시절이 그런 남자 취향에 대해 많은 근거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그의 그런 편애가 어이없는 플러팅이겠지만, 사랑이라고는 제대로 받은 적 없는 제인한테는 강한 자극이었을 것이다
특히 로체스터씨처럼 몇마디 말로 감정을 왔다갔다하게 하는 영향력의 사람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제인이 로체스터에게 끌려다니기만 하는 성격도 아니다
제인은 로체스터에게 순종적인듯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한다
제인과 로체스터의 성적 긴장감은 첫 대면부터 시작된다
빈정대는 로체스터의 말들을 무심하게, 그러나 재치있게 받아치는 제인을 보고 로체스터는 흥미가 생긴다
'나한테 그렇게 말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클리셰는 정말인지 유서가 깊은 것이다
제인의 모습은 로체스터를 무서워하거나 순종하기만 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좁은 인간관계만을 가져왔기에 사람을 대하는 것에 능숙하지는 않지만, 당당하고 꼿꼿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
서툴면서도 고고한 면이 있는 제인의 모습은 독자가 보기에도 어딘가 귀엽게 느껴진다
화재 사건
또 한번 둘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것은 한밤중의 화재사건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로체스터의 방에 화재가 나고, 그것을 알아챈 제인이 서둘러 로체스터에게 물을 쏟아부어 그의 생명을 살린다
우리 뇌는 공포가 주는 긴장감과 성적 끌림이 주는 긴장감을 헷갈린다고 했던가
방금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의 순간을 지나쳤다는 긴장, 그리고 안도감
화재를 저지른 사람의 미스터리가 제인의 머리를 혼돈스럽게 뒤섞는 가운데
제인과 로체스터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그러한 성적 텐션을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제인이 불을 끄느라 로체스터가 물에 젖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에젖어 남성의 몸에 달라붙은 셔츠는 예로부터 성적 대상화에 줄곧 쓰였는데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놓고 독자에게 이 텐션을 퍼먹으라는 얘기다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2011년판 제인 에어 영화에서는 옷이 젖는 부분을 없앴다
모든 일이 마무리 된 후, 제인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하자 로체스터는 그를 붙잡는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이 있고 난 후에 자신을 홀로 버려두고 갈 수 있느냐고
본디 여자들은 강인해보이는 남자가 자신에게 의존적인 모습을 보일 때 마음이 흔들리는 법이다
아마 어릴 적 모두에게 거부받은 경험만 있던 제인은 누군가가 자신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더욱 더 마음이 요동쳤을 것이다
애정결핍이 있는 사람들이 집착적인 사랑에 쉽게 빠져드는 것처럼 말이다
이 사건 이후로 제인은 겉으로는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적어도 완전히 로체스터에게 넘어가버렸다
잉그램 양
근데 로체스터 이새끼가 쓰레기인게 그런 사건이 있고 나서 멀리 떠나버린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잉그램 양이라는 아리따운 숙녀와의 결혼 이야기가 오간다나 뭐라나
그런 소식을 접한 제인의 마음은 당연히 무너져 버리고,
외모로나 신분, 교양으로 자신과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을 잉그램 양을 상상하며 자신의 마음을 포기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러 말들로 헷갈리게 해놓고 정작 다른 여자에게 구애 활동이라니
로체스터 이 사람은 주접으로 하는 '유죄'가 아니라 정말 죄가 많은 나쁜 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인은 로체스터씨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업 중에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마음이 평탄치가 않다
제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체스터씨는 얄궂게도 잉그램 양을 포함한 여러 귀족들을 자신의 장원으로 초대하고...
심지어 그들이 어울리는 사교 자리에 제인이 반드시 참석하라는 명령까지 내린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교양넘치는 사람들 가운데 제인은 촌스럽고 눈에 띄지 않는 가정교사의 모습이다
심지어 로체스터는 잉그램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고 있고
제인을 모욕하는 언사를 하는 잉그램을 가만히 보고만 있다
화려한 사람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어울리는 로체스터 씨를 보면서 제인은 자신의 사랑을 너무나 확실하게 깨닫는다
그러나 이루어질리 없는 사랑이다 그는 제인을 사랑하지 않기에, 잉그램이라는 미모의 숙녀와 결혼할 예정이기에
모멸감과 절망에 사로잡힌채 제인은 방을 빠져나간다
하지만 로체스터씨가 따라온다
"잘 지냈소?" 그가 물었다.
"잘 지냈습니다."
"왜 내 방으로 찾아와 인사하지 않은 거요?"
나는 질문을 한 당사자에게 그 질문을 되받아칠까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무 바쁘신 것 같아서요."
"나 없는 동안 뭘 하며 지냈소?"
"특별한 게 없었어요. 평상시처럼 아델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전보다 훨씬 더 안색이 창백해졌군. 첫눈에 알아차리겠소. 무슨 일이 있었소?"
그가 잠시 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약간 우울해 보이기도 하는군." 그가 말했다. "무슨 일이오? 말해보시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우울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우울하다고 장담할 수 있소. 너무 우울해서 말 몇 마디만 더 하면 당신 눈에 눈물이 맺힐 것 같은데.
(중략) 안녕히 주무시오, 나의......" 그는 말을 멈추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갑자기 나를 떠났다.
로체스터는 잉그램 양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제인이 가장 절망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또 한번 나타나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본다
제인의 감정은 한순간 절망에서 희망으로 치솟는 파도와 같이 움직인다
감정의 오르내림이 너무나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나는 그와 함께 한숨 쉬었다가 기대감에 또 부풀게 된다
정말인지 이런 텐션을 잘 살렸다
로체스터라는 인물이 이렇게 사람 헷갈리게 하는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보니
어리고 남자경험 없는 순수한 제인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알고 보니 잉그램양을 부른 것은 로체스터가 제인으로 하여금 질투에 빠져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게 만드려는 계획이었다
그 당시의 시점으로 보면 로맨틱한데, 지금 보면 좀 음침하고 집착이 느껴지는 방식이다
그래서인지 2011년도 영화에는 잉그램양을 로체스터가 의도적으로 불러들였다는 내용이 빠져있어서
제인이 일방적으로 20살이나 많은 남자에게 꾀임을 당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효과가 있다
하여튼 로체스터씨가 사용한 방법은 비열하지만 효과적이었고 둘은 결혼을 약속했다
3. 3층의 숨겨진 방
모든 행복이 결혼식날에 파탄나고 만다
그는 사실 3층의 숨겨진 방에 그의 미친 아내인 버사를 숨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저택에서 일어났던 모든 심상찮은 사건들은 버사가 존재한다는 복선이었다
버사는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제인의 방에 나타나는데,
이 이미지는 그가 어릴 적 붉은 방에서 겪었던 귀신의 모습과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이 유령의 이미지는 몹시 강렬하고 의미심장하다
붉은 방의 유령은 제인이 어릴 적 겪었던 지독한 사랑의 결핍의 집약체다
그의 결핍은 로우드 학교에서의 평온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심리 깊숙히 남아 불길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제인이 로체스터에게 빠진 것은 사랑이 부족했던 어린 시절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제인의 트라우마가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하지 않았을 어리석은 사랑을 시켰고
로체스터라는 이 악한에 홀딱 마음을 뺏기게 만들었다
마침내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한 순간 어린 시절 붉은 방의 유령과 명확한 연속성을 가진 이미지인 3층의 여자가 나타난다
실제 일이라면 그저 우연에 불과하겠지만 문학의 지면에서 펼쳐진 일인 이상 이는 필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나는 이런 일종의 '문학적 개연성'을 정말 좋아한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논리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지만, 문학에서는 두 사건에 분명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사기결혼남 로체스터는 자신들이 결혼할 수 있다며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놓고
불쌍한 자신을 어떻게 떠날 수 있냐며 제인에게 되도않는 가스라이팅을 한다
그와의 신뢰가 깨졌지만 아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제인은 그와 남아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제인은 이른 새벽 모든 짐을 챙겨 정처없이 아주 먼 곳으로 도망쳐버린다
4. 휫크로스
무작정 마부에게 먼 곳에 내려달라고 해서 휫크로스라는 곳에 도착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짐도 잃어버려 거지나 다름 없는 신세가 된 제인은 이리저리 정처없이 떠돌게 된다
폭풍우가 치는 어느 저녁, 제인은 아프고 지친 몸으로 한 저택의 문을 간절하게 두드린다
그곳에서 제인은 또 다른 똥차를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신 존으로 마을의 교구 사제로 일하며 두 여동생과 함께 조촐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책에 따르면 그는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에 늘 차가운 눈빛을 한 사람으로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삶의 사명으로 가지고 있다 또 나이도 이십대 후반으로 젊은 편임
늙고 못생겼고 늘 열정적인 것을 넘어 느끼한 말들을 제인에게 하며, 삶을 쾌락주의적으로 살아온 로체스터와는 정반대인 셈
신 존은 제인에게 신사적으로 구는 사람이다 태도가 조금 딱딱하기는 하지만 제인에게 쉴 곳을 제공해주고 일자리도 알아봐준다
그에게 제인 역시 호감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가족으로서의 친밀감이지 사랑의 감정은 아니다
어느날 신 존이 제인에게 한가지 제안을 한다
선교를 하러 인도로 떠나는데 자신의 부인으로서 곁에서 돕지 않겠느냐고
문제는 이 청혼이 아무런 사랑 없이 이루어진 청혼이라는 점이다
신 존은 제인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제인의 굳은 인내와 심지 곧은 마음이 선교사 아내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결혼을 무슨 직원 채용처럼 진행하는 신 존의 태도에 제인은 경악해서 거절한다
근데 계속 집착적으로 자기랑 결혼해달라고 조르는 도라이임
"우리는 반드시 결혼하게 될 겁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합니다. 다른 길은 없어요. 그리고 결혼만 하게 되면 틀림없이 제인이 보기에도 우리의 결합이 옳을 일이었다고 생각하게 해줄 충분한 사랑이 뒤따라올 겁니다."
"저는 사랑에 대한 오라버니의 생각을 경멸해요. 오라버니가 표하시는 그 거짓 감정을 경멸한다고요."
제인은 무슨 팔자인지 첫 남자에 이어 두번째 남자도 가스라이팅남이다
다른 길은 없다며 자신과 함께하지 않으면 반드시 불행하게 될 거라고 구구절절 이야기 함
신 존의 말이 옳다고 느껴 넘어갈 뻔도 하지만, 사랑 없는 결합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이 남자는 제인이 로체스터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아니 근데 제인에어 유니버스에는 왜 이런 쓰레기남과 쓰레기남만 있는 거임?
남자들 상태가 완전히 모 아니면 도다
꼭 이런 남자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도망쳐 제인!
나의 간절한 바람과 다르게 제인은 결국 로체스터를 다시 찾아가는 선택을 한다
제인에게 지금 필요한 노래는 두아 리파의 New Rules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에 목맨다고 해서 제인이 주체적인 캐릭터가 아니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여자들에게는 생각이라는 것이 없다고 여겨지던 시대에 자기 마음가는대로 살아가는 여성이 바로 제인이다
책은 제인을 아이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아이처럼 취급한다는 것은,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여 간섭하려고 하는 태도다
제인은 때때로 미숙함 때문에, 운명의 장난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만 결과를 홀로 책임지는 독립적인 인물이다
훌륭하든 나쁘든 여성의 선택을 섣불리 단죄하거나 교정하지 않고 남자의 그것처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일은
책이 쓰여졌던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필요한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5. 다시 손필드
손필드 장에 돌아와보니 로체스터씨의 고택은 화재로 폐허가 되었다
로체스터씨는 미친 아내를 구하려고 하다가 두 눈이 멀고 한쪽 손을 잃었다
과거의 위풍당당하고 오만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쓸쓸한 모습의 슬픈 남자가 있다
제인의 귀환에 로체스터는 온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해한다
그렇게 둘은 결혼하고 행복하게 산다 끝
현실로 생각하면 사실 거의 괴담이다
18살짜리 여자애가 20살 차이나는 남자한테 꼬셔져서 결혼약속했는데 알고보니 중혼 사기였고,
결국 그 남자 떠나는데 자꾸 생각나서 돌아옴 여자애는 장애가 생긴 남자를 평생 돌보면서 살게 됨
하지만 책을 보면 (좀 제인의 정신승리가 있는 것 같지만) 제인의 심리가 어느정도 이해 간다
제인은 불행한 유년시절로 인해 애정 결핍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상대로 너무 잘난 사람을 고르면 그가 떠나버릴까봐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다
너무 상냥하게 대해줘도 금세 사라질까봐 두려워하고 오히려 좀 심술궂게 대하는 것을 편안하게 느낀다
그러니 제인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을 떠날 수 없는 신세가 된 로체스터씨야말로
자신을 불안하지 않게 하고 마음놓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완벽한 존재인 것이다
그가 부유하고 장애가 없던 시절보다도 말이다
비틀린 사람에게는 또 비틀린 사람이 잘 맞는 법이다
레드벨벳의 싸이코 가사가 이들에게 딱이다
우린 참 별나고 이상한 사이야
서로를 부서지게
그리곤 또 껴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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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큘라(1897)
- 독서록
- 2022. 12. 4. 01:53
1992년작 드라큘라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보고나서 원작 소설도 궁금해졌다
영화 보면서 의문이 드는 부분도 많았고 로맨스 라인을 좀더 디테일하게 보고 싶어서 책을 빌렸는데
와...! 놀랍게도 드라큘라 백작과 미나의 로맨스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끝나도록 등장하지 않았다
난 대체 무슨 영화를 본 거지
브램스토커의 드라큘라라고 써놨으면서 등장인물 이름만 같지 내용은 매우 다르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분명 무엇인가를 원작으로 만든 분위기가 났다
어딘가 어설픈 연결점, 빠진 디테일 등등
아마도 1992년도 드라큘라 영화는 이전에 나왔던 드라큘라 영화 중 하나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하여튼 소설에 비하면 1992년작은 거의 2차 창작 수준이다
드라큘라 백작이랑 미나가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고 생각한 누군가가 만든 팬무비같단 말이다
원작 소설은 로맨스라고는 전혀 없고(재미 없는 미나-조너선 커플 러브라인이 있긴 하다)
반헬싱 박사을 리더로 하여 다 함께 열심히 드라큘라를 퇴치하는 내용이다
호러물이지만 드라큘라를 퇴치하기 위해 조사를 열심히 벌이므로 일종의 수사물로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영화와는 아예 다른 작품이라고 봐도 괜찮으니 영화와의 비교는 그만 두고 일단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 편지, 일기 형식: 숨기는 글쓰기로 고조되는 공포감
변호사 시험에 갓 합격한 조너선 하커는 사랑하는 연인 미나 머레이를 떠나 의뢰인이 있는 트란실바니아로 가게 된다
낡고 외딴 성에 사는 의뢰인은 친절하고 품위있는 사람이지만 어쩐지 수상하다
늙은 의뢰인을 제외하고 사람이라고는 성에 아무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조너선은 급기야 드라큘라에게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당하게 되고,
그는 드라큘라가 영국으로 향하는 일에 이용당하게 된다
조너선의 일기형식으로 쓰여지는 드라큘라 성 안에서의 일은 상당히 긴장감이 넘친다
독자는 조너선이 관찰하는 것 이상으로는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에
이야기에는 빠진 퍼즐이 많고 그것을 채워넣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원래 대놓고 잔인한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 은근슬쩍 암시를 할 때 가장 무섭다
드라큘라가 가장 두려운 점은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으며 숨기는 비밀이 많다는 것이다
일기 형식으로 쓰인 이 책에서, 독자는 조너선의 시점에 묶여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두려움과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2. 문명과 야만의 대비
드라큘라는 배를 타고 영국으로 향하는데,
그의 고향인 트란실바니아와 영국은 극명한 이미지의 대조를 이룬다
트란실바니아는 전설과 미신, 주술과 흑마술이 아직 존재하는 미개하고도 두려운 장소로 묘사되는 반면
영국, 특히 런던은 문명의 중심지로서 근대의 이성으로 무장한 장소이다
이러한 대비는 장소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구도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작중에서 선역인 조너선 하커, 미나 머레이, 반 헬싱, 그리고 그외 여러 동료들은 직업도 의사, 박사, 변호사 등 상당한 엘리트이며 이성과 신앙을 숭상하는 고결한 인물로(자기들 입으로 그렇게 말함) 묘사된다
반면 악역인 렌필드는 정신병원에 갇힌 환자이고 드라큘라는 그야 말로 존재 자체가 논리와 이성에 반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대조는 좀 촌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이루어져서 책이 뛰어난 문학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책의 의미나 상징같은 것을 누가 알려줘야 겨우 찾는 나같은 둔감한 인간도 느낄 수 있을 정도면 광고 선전처럼 대놓고 했다는 얘기다
다만 빅토리아 시대(또는 그것이 무너져갈 즈음)의 남성성이 상당히 잘 재현되어있기에
위대한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기록물로서 흥미롭게 관찰해 볼 여지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 흡혈과 수혈: 성적 은유
드라큘라가 영국에 숨어든 후, 미나 머레이의 자매처럼 절친한 친구인 루시 웨스턴라는 이상한 병을 앓게된다
그가 어느 저녁 교회당에 몽유병 상태로 걸어갔다가 목에 수상한 상처를 가지고 온 후부터의 일이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은 루시의 병이 설마 흡혈귀의 소행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서야 루시가 자꾸만 창백해지고 영문모르게 피가 부족해지며
평소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시의 구혼자 중 한명인 수어드는 자신의 스승인 반 헬싱 박사를 호출한다
그는 의문스러운 병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으로, 대충 퇴마사쯤 된다
루시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루시에게 구애하는 남성 두 명과 루시의 애인, 그리고 반 헬싱 박사까지 세명이
그에게 수혈을 하게 되는데, 이 때의 묘사가 몹시 희한하다
책에서 수혈은 한마디로 섹슈얼한 행위로 묘사된다
반 헬싱 박사는 남성들에게 루시의 애인에게 수혈 사실을 숨길 것을 당부한다
연인이 아닌 사람과 피를 나눴다는 것을 알면 충격에 빠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수혈 사실이 대단한 배신이라도 되는 양, 나중에 루시의 애인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털어놓는다
혹시 1800년대 영국에서는 수혈을 섹슈얼하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었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책에서 '피를 빠는 행위', '피를 나누는 행위'는 모두 어떤 성적인 은유로 보인다
내가 음란마귀인게 아니라 책 해설들을 찾아봐도 이는 메이저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흡혈, 또는 수혈을 성적인 행위의 은유로 보았을 때
드라큘라는 1세계 백인 남성들 몰래 밤에 찾아와 그들의 여성을 강제로 범하고 타락시키는 존재가 된다
4.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는 남성의 성적 공포심
선역 남성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사랑스러운 루시', '우리의 고결한 미나부인' 따위의 말을 반복한다
칭찬하는 미사어구가 붙어있지만 결국 여성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말투
남성들은 그들의 여성을 사악한 드라큘라로부터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쯤에서 드라큘라의 출신을 다시 살펴보자면, 그는 작중에서 매우 미신적이고 낙후된 장소로 묘사되는 동유럽에서 왔다
알다시피 서유럽이 아시아나 아프리카 출신 만큼은 아니어도 차별에 열심인 지역이 동유럽이다
드라큘라는 외국인처럼(당연함 외국인임) 어눌한 영어 발음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정리해보면 '자기들 여자를 외국 남자가 뺏어갈까봐 공포에 시달리는 찌질한 남자들'이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남자들의 공포증으로서 외국 남성과 커플 유튜브를 찍는 자국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사이버 불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예시다
다른 예시로는 '화냥년'이라는 말을 들고 싶다
여성을 대상으로 쓰이는 질나쁜 욕설인 화냥년은 본디 '환향녀'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전쟁 포로로 외국에 잡혀갔던 여성들이 돌아오자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기는 커녕 몸을 버린 년들이라며 비난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서 유래했다
외국의 남성들에게 빼앗긴 여성들은, 그들을 빼앗긴 힘없는 남자들에게 자신의 무능함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불쾌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온갖 고초를 겪은 죄없는 여성들이 아니라 청나라 남자들한테 복수를 해야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찌질하게도 그럴 힘이 없으니 환향녀들에게 성적으로 타락했다며 분노를 표출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분노의 굴절' 현상은 <드라큘라>에서도 나타난다
이 책에서 흡혈을 당하는 남성 희생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루시 웨스턴라와 미나 머레이라는 아름다운 두 여성만이 드라큘라 백작의 흡혈 희생자가 된다
감염 상태가 되면 남성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인 모습이 된다는 묘사가 있다
남성들은 순수했던 루시와 미나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그들이 타락한 것을 개탄스러워 한다
런던과 트란실바니아가 극명한 대립관계를 이루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작중의 여자 캐릭터들은 성녀 아니면 창녀가 된다
선역 남성들 곁에 남는 여자는 순수하고 고결한 존재이며 드라큘라의 곁의 여성들은 관능적인 창녀로 묘사한다
남성들은 가증스러울만큼 안타까워하면서 흡혈귀가 된 루시의 가슴에 말뚝을 박고 목을 자른 다음 입에 마늘을 가득 쑤셔 넣는다
사실 나는 미처 생각 못했는데 책 마지막의 작품 해설에서 말뚝이 남근을 상징한다는 얘기를 읽었다
그니까 외국 남자한테 강간당해서 타락한 여자를 다시 순수하게 만들기 위해 윤간(이것도 해설에 나옴ㅎ)한걸로도 볼 수 있다 윽
5. 근대의 사고 방식: 원인을 알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불쌍한 루시를 떠나보내고 반 헬싱 일당은 드라큘라 백작을 잡기 위해 총력전을 펼친다
드라큘라 힘의 원천인 흙상자들을 파괴하고 그에 대한 기록과 증언들을 수집하여 그를 이기기 위해 노력한다
반 헬싱 파티가 애초에 의사 변호사 박사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인간을 뛰어넘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드라큘라를 제압하기 위해 그들이 무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성과 이성, 논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완벽한 대응이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상에 충실하게
그들은 이 초자연적인 괴물을 이해하기 위해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한다
반 헬싱 박사가 주도하는 온갖 퇴마, 이를 테면 마늘 꽃을 뿌려 놓는다든지, 들장미를 관 위에 올린다든지,
가슴에 말뚝을 박는 다든지 하는 행위들은 겉보기에는 상당히 미신적으로 보이지만
포장을 뜯어내고 알맹이를 보면 상당히 근대적인 해법이다
고정관념과 다르게, '원인을 알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개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역사가 길지 않다
이 개념은 근대 과학의 발전이 남긴 유산으로, 그 이전의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저 두고보면서 신에게 빌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농사가 망하면 망하는 거였고 배가 가라앉으면 가라앉는 거였다
재난으로 모든 것을 잃어도 할 수 있는 것은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기도와 제사를 올리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반 헬싱 박사는 적의 정체를 진단하고, 유능한 의사처럼 필요한 처방을 빠르게 내놓는다
이를 그대로 실천하면 흡혈귀를 처단할 수 있다
무슨 RPG게임처럼 구조가 간단하다 "A를 구해오세요, B를 구해오세요, 그럼 퀘스트 끝!"
이런 부분이 좀 유치하고 속이 빤히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람들이 얼마나 인간이 모든 것을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 오만하게 젖어있었는지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6. 고도의 여성혐오는 페미니즘과 구분하기 어렵다
하여간에 반헬싱 파티는 놀라운 정보전으로 드라큘라와의 싸움에서 나름의 우위를 점한다
정보전에서 꽤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미나 머레이라는 여성 캐릭터이다
그가 타자기로 문서화한 자신과 남편의 경험은 드라큘라를 상대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작중 남자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남자의 뇌처럼 단련된 뛰어난 머리를 가진" 여성이다
현대의 독자가 듣기에는 별 또라이같은 성차별 발언으로 들리지만, 놀랍게도 당시로서는 여성캐릭터를 진취적인 방식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이 1897년에 나왔고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쓴 것이 1929년임을 떠올려보면 납득이 가는 듯도 하다
<드라큘라>가 나온지 몇십년이 지난 후에도 버지니아 울프가 여자라는 이유로 도서관 출입을 제한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남성들이 한 여성의 뛰어남을 인정해주는 장면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것이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드라큘라>는 곧바로 진취성을 버린다
반 헬싱 파티의 남성들은 미나 머레이를 위험할 수도 있는 드라큘라와의 대결에서 제외시키기로 결연한 맹세를 한다
연약한 여성이 겪기에는 너무 험한 일이다, 여성의 정신은 이런 일을 겪으면 망가지고 말거다... 따위의 이유로
소외된 그녀는 자신을 보호해주기로 한 남성들에게 감사함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조금 불만스럽기도 하다
이러한 여성 캐릭터의 소외는 흥미롭게도 위기의 시발점이 된다
남성들이 이것저것 하느라 바쁜 사이에 드라큘라가 미나 머레이를 감염시킨 것이다
나는 이 부분 때문에 이 책이 사실 페미니즘 소설이 아닌가 의심까지 들었다
유능한 여성을 일에서 배제하다가 더 큰 문제에 빠져버리는 상황을 비꼬아서 풍자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미나 머레이를 왕따시킨 후에 바로 더 큰 위기가 닥치는 전개를 할 이유가 있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책의 앞 페이지를 펼쳐 출판연도를 다시 확인함으로서 의심을 접었다
그냥 빅토리아시대 사고 방식이 책에 그대로 재현되다 보니 그런 거였다...
이따금 고도의 여성혐오는 페미니즘과 구분될 수 없다
7. <저자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컨텐츠들
이제 그들은 미나가 완전한 흡혈귀로 변화하기 전에 드라큘라 백작을 처단해야 한다
그리하여 백작이 도망간 트란실바니아로 추적을 감행한다
아니 이때는 정말 조금이라도 로맨스가 나올 줄 알았다
흡혈귀가 되어서 백작에게 끌리는 미나의 모습이라든가...
근데 정말 깔끔하게 퇴치만 하고 행복하게 끝난다 정말 어이가 없군
영화에서 봤던 로맨스 좀 자세히 읽어보려고 빌린 책인데 얼떨결에 빅토리아 남성성에 대한 고찰만 하게 되었다
내 로판 어디갔냐고....! 미나x드라큘라 어디가면 더 볼 수 있는 건데
영화에서는 드라큘라를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사악하지만 어딘가 모성애를 자극하는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나쁜 남자로 그려놓는데
책은 그런 거 없고 그냥 처단해야할 괴물이다
근데 그 와중에도 캐릭터가 매력있기는 해서 왜 영화에서 그렇게 다뤘는지 이해는 간다
일단 과거에는 선하고 능력있었던 사람이었지만 타락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또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여자만 찾는 악취미적인 흡혈 습관은 호색한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책 초반에 조너선이 드라큘라 성에 억류 되어 있을 때는 약간 양성애자적인 암시도 나온다
드라큘라의 부하인 여자 흡혈귀들이 조너선의 피를 빨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의 것이라면서 여자들을 막는다
솔직히 이 부분이 맛없는 로맨스인 조너선-미나보다 더 자극적이다
하여튼 드라큘라와 파생 창작물들의 재미있는 점은 등장인물과 설정만 그대로 가져가고 주제 의식은 다들 지맘대로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보통은 작가가 본래 생각했던 바를 충실히 재현하는 것을 실사화의 중요 목표로 삼지 않나
근데 드라큘라는 (두 개밖에 안봤기는 한데)재료만 똑같이 써서 다들 자기 하고 싶은 다른 얘기를 한다
1992년 영화 드라큘라는, 소설 속 드라큘라가 남성들에게 성적 공포를 일으키고 처단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달리 그가 오히려 서사의 주인공이 되어 공감을 일으킨다
일종의 후기식민주의 문학처럼 박해받았던 입장이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드라큘라가 먼지로 돌아가고 조너선과 미나가 부부로 잘 사는 것이 결말이지만
영화에서는 죽어가는 드라큘라를 보며 슬퍼하는 미나로 끝이 난다
조너선은 그들의 사랑을 인정해주고 쿨하게 떠난다
2020년에 나온 넷플릭스 드라마판은 예전에 봤을 때는 원작을 몰랐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음.. 재밌군 하면서 봤는데
원작을 다 읽고 보니 1992년보다 한발 더 나아간 파격을 보여주고 있다
책에서는 한줄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애거서 수녀가 드라마에서는 드라큘라와 대결을 펼치는 대적자로 등장한다
정말 재미있고 대범한 상상력이다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큘라는 역사상 가장 많이 컨텐츠화된 소설이라고 한다
롤랑바르트라는 사람이 주장한 '저자의 죽음'이라는 개념이 있다
글을 일단 저자가 쓰고 나면 그 해석의 권력은 저자를 떠나 순전히 독자에게로 간다는 내용이다
드라큘라가 그렇게 많이 영화화된 것은 그 소재의 아이코닉함과 더불어 다들 제멋대로 해석해서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자체로 뛰어나고 완결성 있는 작품보다 뭔가 어수선하지만 흥미로운 소재를 가진 작품의 2차 창작이 더 활발하다
말하자면 덕후몰이하는 작품이 따로 있다는 얘기다
뭔가 내가 더 찾아 낼 수 있을 것 같고, 못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고, 아쉬운 부분을 이렇게 고쳐보면 재밌을 것 같은 작품
그런 작품이 드라큘라였기 때문에 수많은 실사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앞에서 말했듯이 위대한 작품은 분명 아닌데, 참 이것저것 생각하게 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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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록
- 2022. 12. 3. 18:43
아니 에르노 주간의 세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 <한 여자(Une femme)>
<남자의 자리>는 에르노가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난 후에 쓴 책이라면
<한 여자>는 어머니의 죽음 후에 쓴 책이다
거기에 <부끄러움>까지 읽고 나면 아니 에르노의 삶의 조각들이 어느 정도 맞춰진다
<남자의 자리>와 <부끄러움>도 나름 재밌게 봤는데 이 책이 제일 재밌음
다소 순응적으로 살았던 아버지와 달리 에르노의 어머니는 저항적이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쟁취하려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의 삶의 이야기는 더욱 역동적이고 감정의 오르내림이 크다
1.
나는 그녀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친 방식이 부끄러웠는데, 내가 얼마나 그녀와 닮았는지 느끼고 있는 만큼 더더욱 생생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에르노는 어머니를 다정하고 세심한 표현은 모르는, 거친 노르망디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는 많은 남매들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고 초등교육을 마치자마자 공장에 취직하여 집안에 돈을 보탰다
그러나 다른 남매들과는 다르게 비참한 환경에서 반드시 벗어나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그는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자식이 어떻게 비참한 상황을 맞이하는지 가까이서 지켜봐왔다
여자의 경우에는 예정에 없던 임신을 하고 남자의 경우는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려 교도소에 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흔했다
그의 삶은 하층민의 불행한 운명을 맞지 않기 위한 저항의 연속이다
미래를 위해 벌이를 저축하고 술 마시지 않는 남편을 선택한 것,
직공으로 계속 일하는 대신에 빚을 내어 카페 겸 식료품점을 매입한 것,
딸을 행복하게 키우기 위해 여럿을 낳는 대신 딱 한 명만 낳은 것,
동네에서 유일하게 딸을 사립학교에 보낸 것... 그의 모든 선택은 운명에 대한 저항이었다
내 어머니로서는 반항한다는 것의 유일한 의미는 가난을 거부한다는 것이었고, 그 유일한 형식은 노동하고 돈을 벌고 남들만큼 훌륭하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어머니가 나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나 역시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그 씁쓸한 비난이 비롯됨.
2.
청소년기에 들어선 나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고, 우리 둘 사이에는 투쟁만이 존재했다.
많은 자식들이 으레 사춘기에 그렇듯이 십대의 에르노는 어머니에게서 떨어져나오게 된다
어머니하고는 말귀가 도무지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
특히나 사립학교에 입학해서 '머리 좀 큰' 저자에게는 더더욱 배우지 못한 어머니가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어머니는 자기 고집으로 사립학교에 보낸 딸을 자랑스러워 하지만, 동시에 거리감도 느끼기 시작한다
딸이 대학교에 진학하고, 직공의 아들 대신 정치학을 전공한 사위를 얻으면서 그들 계급의 틈은 점점 더 벌어진다
에르노가 사립학교에서 배워온 말을 입에 붙을 때까지 써보는 것,
에르노가 올 때면 즐겨읽던 통속 소설을 몰래 숨기는 것,
어머니는 에르노를 선망하면서도 동시에 불편해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3.
책을 읽으면서 에르노는 어머니를 닮았구나 싶었다
저자는 나중에서야 자신이 기성사회에 가진 반항과 어머니가 가난에 대해 하는 반항이 동류임을 깨닫는다
둘은 모두 순응하는 부류가 아닌 반항하는 부류로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사람들이다
그 방향이 달라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
서로 성격이 무척 닮았음에도 너무나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는 이런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보면
꼭 우리 아빠와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둘은 정말 안맞는 사람들인데 그것은 둘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각각 좌파와 우파라 명절에 정치 얘기는 절대 금물이다
독립적이고 고집이 아주 세고, 남이 뭐라고 하든 자기 마음대로 해버리고
그러면서도 정이 무척 많고 때때로 낭만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까지 똑같다
문제는 정작 둘은 서로의 공통점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똑같은데...
그들은 과거에 무진장 많이 싸우고 요즘은 서로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정책을 펴고 있다
왜 부모와 자식은 자기들의 동질성을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걸까?
부모 자식 관계는 모든 관계 중에 가장 떼어놓고 파악하기 어렵다고 한다
가까운 탓에 객관성을 잃어버리기가 쉽다고
청소년기 내내,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비판하는 대상이 자신과 닮았다고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여간에 왜 생각이 이리로 튄지는 모르겠지만
에르노와 어머니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저항하는데 그 결과는 서로 전혀 다른 점이 참 흥미롭다
4.
책 초중반에 나오는 건장하고 자신감 넘치는 에르노의 어머니를 보다가
책 마지막에 나오는 쇠약해지고 외로워졌으며, 급기야 치매에 걸려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보면
저자가 겪었을 고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펼쳐진다
때문에 책 뒷부분은 상당히 우울하다
에르노는 글에서 감정적인 부분을 빼고 건조하게 쓰는 편이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절망과 슬픔이 여실히 드러났다
모두 어머니가 '호상'이라고 말하면서 치매로 인한 고통을 더 받기 전에 돌아가신게 잘 되었다고 말할 때
에르노는 속으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반문한다
에르노 그 자신이 어머니의 치매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고통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죽음이 '잘 되었다'라고 하는 것만큼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기록한 또 다른 책인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도 있는데
이 책은 너무 우울해보여서 도전하지도 않았다
책 초반에 나오는 어머니에 대한 묘사,
이를테면 씩씩하고 꼿꼿한 자세로 폭격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머니라든지
용감하게 가게를 사들여 자신의 삶을 바꿔보려고 했던 어머니
이런 모습을 모두 보고 죽기 직전의 어머니를 보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젊은 시절의 생기넘치던 사람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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