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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7 부끄러움(1997)
- 2022.11.22 남자의 자리(1990)
- 2022.11.16 불안(2011)
- 2022.11.05 브람스를 좋아하세요...(1959)
- 부끄러움(1997)
- 독서록
- 2022. 11. 27. 15:56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La Honte)>를 읽었다
지난 번에 읽었던 에르노의 작품인 <남자의 자리>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줄기를 더듬으며
당시 하층민의 생활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이야기였다면,
이 책은 에르노가 사립학교에 진학하면서 느꼈던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직공 출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둔 에르노에게
사립학교에 입학하며 접한 환경은 하늘이 두쪽나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는 그 두 세계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기분을 느꼈다
정체성의 혼란과 교양있는 세계에 대한 선망,
자신의 가족과 동네에 대한 부끄러움을 강하게 느꼈다
'어린 마음에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살았던 우리 정많은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겼다. 아아...아버지 그때는 왜 그 마음을 알지 못했을까.' 식의 신파와 자기연민, 반성의 글이 아니다
어떤 불행포르노도 아니며, 아버지의 죄에 대해 단죄하려는 태도도 아니다
그때 느꼈던 감정에 대해 감정적이지 않은 태도로 재현한다
감정을 감정적이지 않게 다룬다니 모순적이지만 에르노는 그것을 해낸다
자신이 그 당시 느꼈던 부끄러움을 어떤 왜곡없이 전달하려 한다
1.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책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에르노는 "아빠가 내 불행을 벌어놓은 거야."라고 말한다
찾아보니 원어로는 "Tu vas me faire gagner malheur."라고 한다
불행을 벌다(gagner malheur)는 노르망디 지방의 사투리로
공포스러운 일을 겪은 후 영원히 미치거나 불행해진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가 경험한 트라우마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는 말인 것 같다
에르노는 그 사건을 결코 자신에게서 떼어놓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2.
...나는 더 이상 다른 여학생과 같지 않았다.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만 것이다. 순진무구한 사립학교에서는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았고, 그것을 통해 말끝마다 "아무튼 그런 걸 보고 사는 게 불행한 일이야"라는 이야기 속에 범람하는 폭력, 알코올의존증, 정신병의 세계 속에 딱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식으로 소속되고 말았다.
나는 사립학교,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움 속에 편입된 것이다.
에르노의 트라우마는 '부끄러움'이라는 형태로 각인된다
그가 말하는 부끄러움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아니 에르노도 그래서 책으로 썼을 것이다
자신의 부끄러움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3.
세상 어디에도 6월 일요일 사건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가 겪은 사건은 사립학교에서 배우는 모두에게 읽혀도 괜찮을만한 건전한 책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사립학교에서 배운 '올바르고 교양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자신이 실제로 속한 가족과 동네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은
안그래도 남들과 다르면 조바심에 휩싸이고는 하는 사춘기 여자아이가 겪기에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었을 것이다
에르노는 그의 '부끄러움'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계급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속사정을 이야기함으로서 계급의 문제를 재현하는 것은
에르노만이 부릴 수 있는 문학적 마술이다
가난에 대한 통계와 취재 기사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점을 포착한다
4.
선생님과 다른 학생들 앞에 너저분한 차림으로 잠에서 깬 채 나타난 어머니
교양있는 사람들 앞에서 재치있는척 음담패설을 하는 아버지
여행에 익숙치 않아서 덤터기를 쓰고, 돈을 더 내지 않기 위해 선택관광을 하지 않는 아버지와 자신
살다보면 너무나 부끄럽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뇌리에 박혀버리고는 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도 이상하게 아빠와 둘이 영화를 보러가서 핫도그를 주문했던 기억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아빠는 요깃거리로 영화관 매점에서 핫도그를 주문했다
영화관 음식들이 다 그렇듯이 가격은 비싸고 맛은 대충이었고 양은 적었다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나온 형편없는 핫도그를 보고 아빠는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사악한 프랜차이즈의 술수에 별 생각없이 넘어가주는 젊은이들과 달리
아빠는 적당한 돈을 내면 그만큼의 음식을 주는 우리 동네의 식당들에 익숙했다
인심이 후하다고 할 것까진 없었지만 어쨌든 정직한 식당들이었다
터무니없이 비싼 영화관 음식을 무신경하게 들고다니는 도시의 젊은 사람들과
눈뜨고 코를 베여버린 시골쥐 아빠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아빠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조그마한 핫도그를 먹어치웠다
영화관 매점이 형편없다는 점을 미리 경고하지 않아서 아빠가 괜히 우스워졌다는 것이 미안해서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고작 핫도그 한개 따위에 그런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이 열이 뻗치고 뭔가 진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별 거 아니라고 애써 생각했다
그저 아빠가 '창렬'한 핫도그를 시켰던 것 뿐이라고
5.
책이 나온 뒤에는 다시는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 나는 항상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에르노는 보통 사람들이 자기합리화를 통해서 빠져나가버리는
일상의 사소한 부끄러운 순간들을 집요하게 재현하는 고행의 길을 걷는다
그는 정신이 강인한 사람임이 틀림 없는 것이,
보통 사람이라면 이불을 걷어찼을 부끄러운 일들을 책으로 모아서 내기까지 한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아빠의 핫도그 사건이 글감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그것은 이유도 모른 채 감추어져야 하는 찌질함이었고,
될 수 있으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에르노 또한 사립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자신의 가족에 대해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권장하는 책들에는 결코 6월의 사건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르노는 기어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정말인지 용감한 개척자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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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의 자리(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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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11. 22. 13:09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기념으로 아니 에르노 주간을 시작했다
도서관에 있는 아니 에르노 책을 몽땅 빌려와 읽는 것이다
다행히 에르노는 책을 짧게 쓰는 편이라 그럭저럭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번째 주자는 <남자의 자리(La place)>
원어로는 그냥 '자리'인데 그렇게 번역하면 좀 임팩트가 없다고 생각했나?
남자의 자리는 아니 에르노가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뒤 그의 생전 모습을 기록하는 내용이다
애도나 추모처럼 애정이 섞인 글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랄한 비판의 성격을 가진 글도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천천히 쓴다. 일련의 사실들과 선택들 가운데에서 한 생애의 의미 있는 줄기를 들내려 애쓸 때, 나는 점차로 아버지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도식이 자리를 온통 차지해 버리고, 추상적인 생각이 제멋대로 달려가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는 반대로 추억의 이미지들이 미끄러져 들어오게 놔두면, 난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 그의 웃음과 그의 거동을 다시 보게 된다.
에르노는 이렇게 글 중간중간에 그가 글을 쓰는 목적과 방식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나도 글을 쓸 때 주제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자주 하는데
이상하게 의미 부여를 하면 원래 내가 느꼈던 것과는 달라지는 것 같았다
'도식이 자리를 온통 차지해 버리고, 추상적인 생각이 제멋대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냥 좀 감동적이고 재밌는 영화를 봤는데, 감상문을 쓸 때는 괜히 그 영화의 사회적 의미를 찾느라
원래 재미있던 부분은 기억에서 날아가버리고 추상적인 얘기나 계속 하게 된다
물론 어떤 경험이나 작품에서 의미를 찾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에르노가 지적한 대로 그런 행위를 하면서 원래의 경험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의미 부여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데 아니 에르노는 그걸 해낸다
감상적이지도, 신랄하지도 않게 묘사된 한 개인의 생애는 그 자체로서
당시 하층 계급의 삶을 선명하게 재현하고 있다
의미부여를 멈춤으로서 모든 의미를 그대로 전달한다
쓰다보니 뭔소린가 싶은데 하여간에 읽다보면 이해된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왠지 좁은 길을 아슬아슬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이런 작업에 수반되는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에 낀 좁은 길 말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들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는 우리의 행복이기도 했지만, 또한 우리의 조건을 둘러싼 굴욕적인 장벽들(<우리 집은 그렇게 잘 살지 못해>라는 의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행복인 동시에 소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굉장히 개인적인데, 그 이유 때문에 상당히 사회적이다.
기사나 통계에서는 흔히 지워지고는 하는 하층민의 삶, 그들의 생각과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나있기 때문이다
에르노는 이런 글을 쓰면서 '명예회복과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걷는 느낌'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못사는 사람들에 대해 비난하고 역겹게 생각하며 혹은 동정심을 보인다
그 어느 것도 당사자에게 달가운 반응은 아닐 것이다
에르노는 우리는 가난했지만 행복했었노라고 어린 시절의 작은 추억들을 소중히 꺼내어 놓는다
아버지는 가난하고 못배운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묘사될 가치가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작은 습관과 취향,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 따위를 건조한 말투로 그려내는 글에서는
에르노 나름의 애정이 담겨있는 것 같다
하지만 부르주아 예술인들이 흔히 하는 기만적인 '소박함에 대한 예찬'을 하지도 않는다
에르노는 그들이 얼마나 어렵고 부족하게 살았는지 묘사한다
난 프루스트나 모리아크를 읽을 때면, 이 작품들이 내 아버지가 아이였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버지의 환경은 중세였던 것이다.
이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프루스트가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을 때, 에르노의 아버지는 벌레를 쫓기 위해 몸에 마늘을 지니고 다녔다
가난을 고발하면서도 변호하는 이런 태도는 에르노가 가난의 당사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관점인 것 같다
이런 점이야 말로 현대문학의 위대한 성취가 아닐까
현대 이전에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은 모두 귀족이거나 부르주아거나 귀족의 후원을 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런 환경에서는 가난을 비참하게 여겨 동정하는 태도나
가난을 동경하여 소박한 삶을 예찬하는 태도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
가난의 당사자였던 아니 에르노는 하층 계급을 묘사한 문학 작품의 세계에서
'명예회복과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셈이다
글을 쓰다보니까 에르노가 처음에 지적한대로 '도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디서 들었던 그럴듯한 얘기를 그대로 쓰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젠장
책을 읽을 때는 아니 에르노의 가족 이야기와 에르노의 감정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어느새 문학적인 의미 부여만 하고 있으니 원
하여튼 문학적 의미를 제외하고도 그냥 책이 이해하기도 쉽고 재미있다
같은 노벨상 수상 작가인 압둘 라자크 구르나 책은 더럽게 재미없어서 억지로 읽었는데
아르노 책은 아주 몰입감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얼마전에 읽은 <H마트에서 울다>가 생각나서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둘다 죽은 부모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얼마나 성격이 다른지...
H마트를 읽을 당시에는 꽤 어머니에 대해 신파없이 객관적으로 묘사한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비하면 그 책은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감정 가득한 책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그냥 같은 소재로 얼마나 다른 글을 쓸 수 있는지가 흥미로웠다
하....에르노처럼 글 쓰고 싶다 어떻게 저렇게 세련되게 글을 쓸까
에르노를 읽고 이런 독후감이나 쓰니까 자괴감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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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었다
보통의 책은 살짝 녹은 투게더같다
입에서 공기처럼 살살 녹아 넘어가는 아이스크림처럼 글이 부드럽게 읽힌다
다만 그만큼 주제의식이 무겁거나 성찰이 깊지는 않다는 인상이다
그래도 나는 읽기 쉬운 책을 좋아하니깐 호불호를 따진다면 호에 가깝다
특히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작은 감정들에 대한 포착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불안>은 보통의 전공분야인 '개인의 내면 성찰'보다 조금 더 거시적인 내용을 포함한다
불안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사회적인 배경, 그리고 그 해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첫번째로, 불안이라는 감정이 단순히 우리의 불안정한 자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쟁사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통의 또다른 주특기인 화려한 인문학적 인용을 통해 설득하고 있다
플로베르부터 토크빌, 루소까지 한가닥하는 사람들을 풍성하게 인용한 것을 보고 있으면
사실 그 사람들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는데 유식해진 기분이 든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 p.78
보통은 불안의 원인을 단순한 개인의 심리적 나약함으로 모는 것을 경계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등장때문에 사람들이 주변인보다 적게 가질 때 불안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했으나 불안에 있어서는 현대인들보다 나은 상태였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열심히 한다고해서 더 나은 지위를 갖거나 부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현대의 능력주의라는 신앙은 누구나 열심히만 한다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모두에게 불어넣었다
이는 현대 사회의 눈부신 발전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에 죄악을 덧씌우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가난할 뿐만 아니라 가난이 자신의 무능력에서 오는 것이라는 자괴감까지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그 불안에 대한 해법 파트가 이어진다
해법이라고 해서 자기개발서마냥 불안을 없애기 위한 지시사항을 쓰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인류가 역사적으로 제시해왔던 불안의 해법 정리본에 가깝다
그 중 예술파트를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다
비극은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 p.191
보통은 비극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불안이란 사회가 그를 존중할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대할 때 생긴다
현실에서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과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나뉘고,
후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에서는 이러한 권력 관계를 반전시킬 수 있다
가장 추악하거나 한심하게 여겨지는 사람조차도 예술의 세계에서는 중요도를 가진 인간으로 그려질 수 있다
플로베르는 빚을 내어 사치를 일삼던 간통녀가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읽고 <마담 보바리>를 썼다
현실에서는 모두 그녀를 한심하고 비도덕적인 인간으로만 여겼으나
플로베르는 소설 속에서 그녀의 결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독자가 그녀에게 경멸만을 갖기 전에 얼른 그녀의 몽상적이고 순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결코 성자는 될 수 없지만 독자는 그녀를 도저히 미워할 수도 없다
예술은 이렇게 평소에 공감할 생각도 필요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에 대한 뜻밖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지위와 관련된 이상 때문에 생기는 불편이 기적적으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치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기후 위성으로 기상 상태의 위기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늘 문제를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용한 것을 가르쳐준다. 그 결과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 p.266
저자의 목적을 가장 명료하게 설명한 대목인 것 같다
이 책은 당장 닥쳐오는 태풍같은 불안을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아무 대비도 하지 못한채 멍청하게 휩쓸려다니고 쓸데없는 곳에 화를 돌리는 일을 피하게 해준다
그것도 아이스크림같은 읽기 편한 문체로 말이다!
떠먹여주는 불안사회 해독서, 안읽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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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11. 5. 00:18
짧은 책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집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 읽었다
친구가 불문학중에 읽어볼만하다고 추천해서 읽었는데
우선 마음에 드는 점은 굉장히 재미있다는 점
자신을 자꾸 기다리게만 하는 불성실한 연인 로제(남자다)와의
지겨운 관계에 염증을 느끼는 폴(여자다)에게 어느 날 젊고 눈에 띌 정도로 잘생긴 남자 시몽이 접근한다
폴에게 홀딱 빠져 구애하는 시몽에게 폴은 무관심한 척 하지만,
사실은 그가 주는 맹목적인 숭배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읽으면서 어! 이거 한국 드라마에서 맨날 하는 얘기잖아!! 라고 생각했다
폴과 로제, 그리고 시몽의 삼각관계가 긴장감 가득하게 펼쳐진다
그야말로 똥차가고 벤츠오는 여성향 연애물같은 내용인데,
후반부의 전개는 한국 드라마와는 조금 달라지긴 한다
옮긴이의 말에서 통속소설과 순수문학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있다는 말을 하는데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일단 재밌어서 좋다
자칭 순수문학이라는 것들은 도통 재미가 없는 경우가 좀 많아야 말이지
물론 내가 마음에 들어한 그 '통속소설'스러움만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을리는 없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이런 흔하디 흔한 연애담을 극도로 섬세하게 감정 묘사를 통해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쉽게 포착하지 못하는 사소하고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잡아내어
써내려가는 그 재주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폴이 시몽에게 강하게 끌리면서도 스스로를 다잡으며 애써 냉정한 척하는 장면
화가 날 상황이 아닌데 이상하게 화가 나는 때, 그러나 그 화를 숨겨야 하는 때
분명 나 또한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는데,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가 이 책을 읽으면서 맞아 나도 그랬었지 하고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들은 쉽게 캐치하지 못하는 이 작은 감정조각들을 왜곡없이 재현한다
이런 작가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해상도로 사람들의 관계와 자신의 내면 감정을 관찰할 수 있는 것 같다
감정의 색채를 섬세하게 보는 작가들에 비하면 나는 색맹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사강의 감정 묘사는 주인공 폴의 모순적인 마음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좋으면서 싫은 그런 마음 있지 않은가
기쁘지만 어딘가는 불안하고, 어떤 사람을 가지고 나니까 이제 지겹게 느껴지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 요상한 마음들을 적나라하게 풀어놓는데
그런 글을 읽으니까 기분이 편안해졌다
어떤 예능 프로인가에서 들었던 말이 있다
인간에게 때때로 어두운 내용의 책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내면에 있는 어두운 부분이 이상한 것이 아님을 확인받는 일은 위로가 된다
책은 무척 프랑스 소설답게 끝난다
물론 책을 집은 순간부터 그런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로제 이 나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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