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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12.20 아노말리(2020)
  2. 2022.12.18 그들의 말 혹은 침묵(1977)
  3. 2022.12.16 최애, 타오르다(2020) 1
  4. 2022.12.15 러브레터(1995) 1

아노말리(2020)

에르베 르 텔리어의 2020년작 <아노말리(L'anomalie)>를 읽었다

공쿠르 상을 수상한 SF소설이지만 인생의 의미에 대한 성찰 어쩌고라고 뒷표지에 써있어서

테드 창 소설처럼 차가운 이과의 언어로 머리를 띵하게 하는 감동이 퍼지는 그런 느낌을 기대했건만

그냥 저냥 읽을 만한 오락 소설 느낌이다... 여행가서 가볍게 한 권 읽기 좋을 듯

 

주말 아침에 보는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 나올 것 같은 현상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3월에 파리에서 뉴욕으로 가는 에어프랑스 항공기가 엄청난 난기류를 만나고 겨우 무사히 착륙한다

그런데 6월에 같은 항공기가 또 나타난 것이다

완전히 똑같은 탑승객, 흘린 음료수 자국마저 똑같다

갑작스럽게 도플갱어를 마주하게 된 사람들과 주변 인물들이 각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한 내용이 주다

SF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이야기는 풀어가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중요한 것 같다

근데 그다지 나로서는 공감가는 통찰은 아니었다

책에는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많은 탑승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나이지리아의 성소수자 뮤지션 이야기는 좀 흥미롭긴 했는데, 아무래도 당사자성이 부족해서 어디서 아프리카의 성소수자 현실이라는 기사 하나 읽고 쓴 느낌이 강했다

나머지는 사랑 이야기가 많은데 너무 프랑스 남자가 쓴 것 같아서(맞지만) 별로였다

여자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성적으로 묘사하고, 섹시하고 매력적인 여성들이 늙고 찐따같은 남자들을 자꾸 좋아한다

여성 화자의 시점으로 쓰인 챕터들은 누가봐도 '남자가 생각하는' 여자의 생각이 나타나서 위화감이 심했다

인간에 대한 관찰 역량이 전반적으로 부족한데 왜 굳이 이런 형식을 취했는지 모르겠다

'어느날 나의 도플갱어가 나타난다면?'이란 주제는 이제 문학에서 그다지 새로운 주제는 아니지 않은가

아이디어가 무난하다면 디테일로 승부를 봐야할텐데 이 책의 디테일이 뛰어난가? 잘 모르겠다

 

차라리 현상에 대한 과학적 해석을 제시하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사실 글을 문학이 아닌 사고실험으로 활용하는 부류의 SF소설들은 별로 내 취향은 아닌데

이 작가의 경우에는 본인의 장기가 그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책에서는 비행기가 두번 착륙한 이상현상이 시뮬레이션 설의 근거라고 말한다

시뮬레이션 이론은 지구가 인류의 먼 후손 또는 다른 지적 생명체에 의해 시뮬레이션 되고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한다

흥미로웠는데 책에서 그 이론에 대해서 별로 근거를 많이 제시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그 쪽으로 끝장나게 파봤으면 좀 더 재밌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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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 혹은 침묵(1977)

아니 에르노의 1977년작 <그들의 말 혹은 침묵(Ce qu'ils disent ou rien)>을 읽었다

지난 번에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 <부끄러움>,<한 여자>를 읽고 나서, 나는 거의 아니 에르노를 숭배하게 되었다

그가 지구에서 현실을 가장 잘 재현하는 작가라는 확신에 차서 이 책 또한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내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했다

솔직히 1977년에 나왔는데 왜 올해 번역 됐는지 알 것 같다

전성기 작품들에 비해 좀 평범하고 특유의 현실을 날카롭게 관찰하는 눈과 솔직함에서 나오는 강렬한 감정도 없다

하... 그리고 무엇보다 지나치게 '프랑스'적이다

 

책은 '안'이라는 갓 중학교를 졸업하고 여름 방학을 가지는 사춘기 여자아이가 주인공인데

주된 내용은 안이 어떻게 하면 섹스 한번 해볼까 안달복달 하는 내용이다

주인공 안이 직접 있었던 일을 서술한다는 컨셉인데, 덕분에 시간도 뒤죽박죽이고 글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

안이 인상적으로 읽었다고 언급되는 까뮈의 <이방인>을 오마쥬한 느낌도 있다

근데 솔직히 난 그 형식이 그다지 헷갈리지도 않았고 딱히 어떤 문학적 효과를 불러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멋부린 느낌

어떻게든 촌스러운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가고 싶은 사춘기 여자애의 안달은 익숙한 소재지만

그게 프랑스 배경일때는 섹스가 빠지지 않게 되나 보다

유교국가의 흔한 유교걸로 자라온 나는 안의 이런 소망에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아서 그냥 떨더름하게 읽었다

안이 섹스를 대하는 태도는 좀 흥미롭긴 했다

이 아이는 섹스를 정말 하고 싶다기 보다는, 그냥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친구로부터 앞서간다는 인정을 받고 싶은 거다

사귀는 남자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도 안하면서 그 일에 대해서 엄마와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만 이야기한다

<한 여자>에서도 볼 수 있는, 아니 에르노가 어머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증은 이 소설에서도 선명히 드러난다

사실 너무 <한 여자>에서와 설정이 비슷해서 이것도 자전적 소설인 줄 알았다

에르노는 진짜 어머니와의 관계가 강렬하고 특별했나보다  ㄹㅇ다른 얘기 안하고 맨날 어머니 얘기만 함..

 

별로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없는데, 나쁜 방향으로 인상적이었던 건 있다

번역에서 자꾸 되도않는 유행어며 속어를 쓰는데 한번도 안써봤으면서 검색해서 넣은 것 같았다

그 단어는 그런 용법으로 쓰면 안된단말입니다 ㅠㅠ 찐사랑을 그렇게 쓰는 사람 없다고요

옮긴이의 말을 보니까 일부러 원문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어색함과 불편함이 들게 옮겼다는데,

그건 알겠지만 일부 속어들은 그냥 틀리게 썼고, 일단 배경이 1977년도인데 그런 말투가 어울릴 턱이 없다

속어에도 문법이 있다 '이건 찐사랑과 닮은 듯했다' 이렇게 쓰는 게 아니라

' A랑 B ㄹㅇ 찐사인듯ㅅㅂ' , '와 쟤네 찐사네' 이렇게 써야한다

 

아니 에르노도 이런 책을 썼다니

나의 문학적 우상도 초기에는 이런 글을 썼다는 것에 희망을 느낀다

글쓰기는 정말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거구나

나도 희망을 가지고 정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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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 타오르다(2020)

우사미 린의 <최애, 타오르다>를 읽었다

주인공 아카리는 늘 압도당해있는 기분을 느낀다 

학업도 교우관계도, 미래 진로 설정도, 남들은 쉽게 하는 일이 아카리에게는 항상 어렵다

그런 아카리가 유일하게 숨을 쉬는 것 같을 때는 혼성 아이돌 그룹의 멤버 마사키를 좋아할 때다

같은 굿즈를 3개씩 사고, 무리를 해서라도 모든 콘서트와 팬미팅에 참석하며

앨범을 사면 주는 투표권으로 최애를 1위로 만들기 위해 무리한 소비를 감행하는 아카리

일반인 뿐만 아니라 아이돌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아카리는 맹목적으로 애정을 쏟아붓는다

아이돌을 좋아하느라 가족과 학교, 자신의 미래를 내버린 채 산다

덕질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일부 부모나 선생들은 덕질을 멈추게 하면 아이가 정상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과관계를 잘못 파악한 결론이다

 

"반년 넘게 시간이 있었지. 왜 아무것도 안 했니?"

"못 한 거야."

내가 대답하자 엄마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콘서트에 갈 여유는 있으면서."

 

어쨌든 나는 몸을 깎아 쏟아붓는 수밖에 없다. 최애는 내가 살기 위한 수단이었다. 생업이었다.

 

아이돌 때문에 아이가 이상해진 것이 아니라, 죽지못해 간신히 살고 있는데 아이돌이 겨우 삶을 붙들어 놓는 것이다

아카리의 어머니는 아카리가 여유가 있어서 콘서트에 간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갔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카리는 자신의 최애 마사키를 척추라고 표현한다

없으면 곧바로 쓰러져 버릴, 자신의 몸을 지탱하는 중심

일상에서 아카리는 늘 기력이 부족하고 모든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다

타고나길 그렇게 난 아카리는 세상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

다른 사람은 쉽게 해내는 일이 벅차서 게으르다고,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혼이 난다

 

최소한을 해내려고 힘을 짜내도 충분했던 적이 없었다. 언제나 최소한에 도달하기 전에 의지와 육체의 연결이 끊어진다.

 

깎아도 뽑아도 또 자라는 것과 왜 영원히 마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항상 그랬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그랬다.

 

이런 아카리의 고민에 공감이 갔다

남들은 쉽게하는 노력이 내게는 생각만 해도 막막하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정신머리를 고쳐먹으면 된다고 수백번을 다짐해도 결국 남는 건 난 할 수 없다는 자괴감 뿐이다

'넌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거야'라는 말이 자극이 되기 보다 아픔이 된다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일을 못하는 나는 병신인가하는 비뚤은 생각만 들고,

그걸 또 건강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뚤게만 보는 내가 등신같다 

 

아카리가 유일하게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듣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곳은 덕질 뿐

아이돌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아카리가 심적으로 이해가 가는 이유다

언제나 자신이 관계를 망친다고 생각하는 아카리는 아이돌에게만큼은 무한한 애정을 걱정없이 쏟을 수 있어 좋아한다

 

내가 뭔가 저질러서 관계가 무너지지도 않는, 일정한 간격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끝없이 느끼는 것이 평온함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애를 응원할 때, 나라는 모든 것을 걸고서 빠져들 때, 일방적이라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충족된다. 

 

나 또한 아이돌을 좋아할 때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것이 좋다

보통의 사람 관계에서는 내가 한 사람에게 애정을 가져도 그 사람이 똑같이 나를 좋아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연애 관계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친구 가족 등 모든 관계에 해당된다

아이돌과 팬의 일방적인 관계에는 거절당하는 상처가 없다

 

그런데 아카리를 지탱하던 유일한 척추인 아이돌 마사키가 어느 날 '타오른다'

일본에서는 사고를 쳐서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는 것을 '타오른다'고 한다고 한다

마사키가 팬을 때렸다 게다가 그 일에 대해 부정하지도 않는다

바로 여기서부터 책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카리의 중심이 서서히 무너지는 이야기

붕괴는 처음부터 빠르게 진전되지는 않는다

사고를 친 아이돌의 팬들이 으레 그렇듯이 오해가 있었을 거라며 정신승리를 하고,

최애를 공격하는 사람들로부터 최애를 보호하며 오히려 결속을 단단하게 다진다

얼핏보면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보인다

균열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그룹의 인기 투표 결과가 공개되었을 때부터다

언제나 1위 자리에서 환히 웃던 마사키가 최하위의 성적을 받자 아카리는 그제서야 무너져버리고 만다

최애가 사고를 친 순간에는 어떻게든 팬들끼리 똘똘 뭉쳐 했던 정신승리가 깨진다

최애가 아이돌로서 몰락했다는 객관적인 지표에 아카리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 와중에도 내가 앨범을 몇 장만 더 샀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아카리다

 

내가 봐도 환장스러운데 아카리와 함께 사는 가족들은 말도 못할 것이다

아카리가 이해가는 면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모두 이해받을 만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아카리는 학교에 너무 자주 빠져서 결국 중퇴를 결정하게 되고, 그 길로 가족들에게 떠밀려 독립한다

음식물에 곰팡이가 피고 물건에 먼지가 쌓이도록 치우지 않은 방에서 아카리는 최애만 본다

그룹이 해체를 발표하자 어쩐지 아카리는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다

아카리는 최애의 상징색인 파란색으로 온 몸을 감싸고 마지막 콘서트에 결연하게 향한다

 

파란 야광봉의 바다, 수천 명을 수용한 돔이 비좁게 느껴졌다. 최애가 우리를 따뜻한 빛으로 감싼다. 

 

그렇게 콘서트가 끝나고 그룹은 해체, 마사키는 연예계를 은퇴한다

 

그러지 말아줘, 내게서 척추를 빼앗아가지 마. 최애가 사라지면 나는 정말로 살아갈 수 없다. 나는 나를 나라고 인정하지 못한다. 

 

최애의 노래를 영원히 내 안에서 울리게 하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고 난 뒤 곁에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최애를 파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다. 최애 없는 인생은 여생일 뿐이다.

 

척추가 없어진 이제 아카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

무작정 최애의 집으로 달려간다

그 곳에서 최애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베란다로 빨래를 들고 나오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카리는 그 여자보다 빨래가 더 신경쓰인다

 

나를 명확하게 아프게 한 것은 그 여자가 안고 있던 빨래였다. 내 방에 있는 엄청난 양의 파일과 사진, CD, 필사적으로 긁어모은 수많은 것들보다 셔츠 단 한 장이, 겨우 양말 한 켤레가 한 사람의 현재를 느끼게 한다.

 

이 감정이 이해갈듯 말듯 슬펐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 사살 당하는 느낌

그래서 내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고 느끼는 감정

나도 덕질하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고 관둔 일이 있다

탈덕(연예인을 좋아하는 일을 그만 두는 것)의 순간은 항상 뜻밖이다

아이돌이 사고를 치거나, 무대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아니라

갑자기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구나, 그저 환상이었구나 느낄 때다

아카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몇달째 방치해서 엉망진창인 집을 치우기 시작한다

 

기어 다니면서, 이게 내가 사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이족보행은 맞지 않았던 것 같으니까 당분간은 이렇게 살아야겠다. 몸이 무겁다. 면봉을 주웠다.

 

자신의 척추라고 생각했던 최애를 떼어낸 아카리는 이제 기어다니는 수밖에 없다

언뜻 보면 절망적인 결말같지만, 그래도 희망적인 끝이다

늘 누워만 있던 아카리가 자신의 힘으로 아주 미약하지만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힘내라는 말 대신 아카리에게 그걸로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심스럽지만, 나 또한 저렇게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경험이 있기 때문에

움직일 용기를 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결심인지 안다

개판인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아카리가 책 마지막에 드디어 엉망진창인 방을 청소하기 시작한 일이 희망적이라고 생각한 이유다

 

 

여담으로 책을 읽으면서 아니 에르노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 에르노는 글을 통해 자신이 자라온 하층 계급의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회복과 고발을 동시에 하려고 한다

하층 계급이 마냥 천하다고 비난 받길 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현실과는 다르게 행복하기만 했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복합적인 입장을 가진 글은 쓰기가 어렵다

나쁘면 나쁘고 좋으면 좋은거지,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 라는 반응을 얻기가 쉽다

오타쿠 또한 사람들의 고운 시선을 받는 집단은 아니다

그들의 광적인 열광과 몰입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쉽게 비하되고는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타쿠들은 자기들 집단 내부의 곪아있는 이야기를 잘 꺼내지 못한다

꺼내는 순간,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면서 더 큰 비난과 편견으로 위협받는다

대부분의 오타쿠들은 자신을 열심히 변호하면서 글을 쓴다

"아이돌에게 유사 연애를 하지 않는다, 그저 건전한 취미 활동일 뿐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건강한 행위다"

그런 류의 글을 읽으면 내가 아는 덕질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덕질에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런 묘사가 내가 보았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았다

덕질을 하면서 미래 따위는 될 대로 되라는 태도로 대책없이 아이돌에 모든 자아를 위임한 사람들을 많이 봤다

솔직히 삶이 불행하고 애정이 결핍돼서 아이돌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사람도 많았다(당연히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우사미 린은 아니 에르노처럼 어떤 변형없이 오타쿠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무리한 소비를 하면서도 서로 어쩔 수 없었다고 다독이고, 현실을 내팽개치는 것을 훈장처럼 여기는 그들의 현실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시선에 비판만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지 집요한 심리 묘사로 독자에게 설득력을 제공한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이 태어날 때부터 무거웠던 아카리는 최애라는 척추로 겨우 살아가는 인물이다

덕질이 나를 망치고 있지만 동시에 나를 살려 놓는다

마치 무엇인가에 중독되는 심리와 비슷하다

(물론 일반적인 덕질이 그렇게 유해하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 병적인 덕질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

어떤 쾌락에 대한 중독은 사실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개판인 삶을 눈뜨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고, 쾌락을 차단하면 적나라한 현실이 드러나서 멈추기가 두려워진다

이런 안쓰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나친 미화나 비난 없이 균형을 맞추며 써내려가는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아이돌 덕후로서 공감가는 소재 때문에 책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현실을 묘사함에 있어 머리를 띵하게 만들 만큼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다

이렇게 무미건조한 문체로 강렬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사미 린의 다음 책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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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레터(1995)

이와이 슌지 감독의 1995년작 러브레터를 보았다

제목만 보고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는데

지고지순하게 사랑을 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는 다르다고 느꼈다

로맨스 장르를 기대하고 영화를 보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러브레터는 오히려 상실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기 성장을 이루는 두 여자의 이야기이다

물론 그 극복의 과정에는 사랑 이야기도 나오지만, 사랑이 메인이 아님은 분명하다

마치 러브레터인줄 알고 받았지만 아니었던 편지처럼, 이 영화도 겉보기에는 로맨스같지만 실은 성장영화다

 

히로코는 3년전 죽은 연인 이츠키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의 기일에 펼쳐본 졸업 앨범에서 히로코는 이츠키의 옛 주소를 찾고, 

무슨 마음인지 그 주소로 편지를 한 장 부친다

편지는 눈덮힌 오타루의 한 고즈넉한 주택에 도착해서 후지이 이츠키의 손에 들어온다

죽은 연인인 이츠키(남)와는 다른 이츠키(여)다

동명이인이라는 소재와 1인 2역이라는 설정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헷갈려서 열심히 추리하는 재미가 있었다

방 인테리어 너무 예쁨...

이츠키(여)는 다짜고짜 잘 지내냐는 내용이 적혀있는 영문모를 편지가

자신에게 잘못 온 것임을 알고있지만, 장난삼아 답장을 보낸다

잘 지내지만 감기에 걸려있다고

이츠키는 좀처럼 낫지 않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있다

그의 아버지는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되어 돌아가셨다

그러니 감기는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영화에서 아버지와의 상징적인 연결점이 있는 듯 하다

그 연결점이 어떤 것인지는 각자 다른 짐작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기를 나으려면 병원에 가야하는데, 이츠키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장소인 병원이 너무나 무섭다

감기가 나을 턱이 없다

 

이츠키의 편지에, 히로코는 당연히 깜짝 놀란다

답장을 바라지 않고 쓴 편지에 답장이라니! 

뭔가 수상하지만 히로코는 죽은 연인의 일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어쩌면 천국에서 편지가 온 걸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렇게 히로코와 이츠키는 몇 차례 편지를 주고 받는다

편지는 늘 "하이케 ....사마"라는 말로 시작한다

한국어로는 "....님께"라는 뜻인데, 또랑또랑한 말투로 하이케라고 또박또박 읽는 느낌이 명랑하다

그러다가 히로코의 현재 연인 미만 친구 이상쯤 되는 남자가 편지가 오는 오타루에 가보자고 한다

후지이 이츠키의 정체를 밝혀야만 한다면서!

이 남자는 히로코를 사랑하는데, 히로코가 이츠키(남)를 잊지 못해서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는데 항상 안달이 나있다

말투가 뭔가 거칠고 히로코한테 자꾸 이거하자 저거하자 주장해서 왠지 재수없다

 

히로코와 남자는 오타루에 있는 정체불명의 이츠키를 찾으러 가는데, 결국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히로코가 이츠키에게 남긴 편지를 통해서, 둘은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풀게되고 

이츠키는 히로코에게 자신이 이츠키(남)의 중학교 동창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며 그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해준다

 

이츠키(여)와 이츠키(남)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사귀라며 아이들이 놀려대는 탓에 친해질 겨를도 없이

서로 불편함만 가득한 사이였다

둘은 도서관을 관리하는 일을 했는데, 이때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책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어렵고 재미없는 책의 대출카드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취미인 이츠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역시 그의 취미의 대상이 된다

책에서 마르셀은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 먹다가, 그 맛을 느꼈던 아득한 과거의 기억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감각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하는데,

이 영화에서 프루스트 효과를 유발하는 것은 바로 영화 제목이기도 한 러브레터다

편지 한 장으로 잊고있었던 과거의 기억을 서서히 되찾는 것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기억'의 역할이다

보통 과거의 아픈 기억들은 잊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영화는 기억을 들춰내고 상처에 다시 맞서게 한다

연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상처를 품고 있는 히로코는 그가 죽은 산에 가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친다

히로코는 늘 이츠키를 마주하기를 두려워했다

그의 죽음을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이, 기일에도 끝까지 남는 대신 집에 돌아오고

오타루에서 이츠키를 만나기 직전에 자신은 하지 못할 것 같다며 망설인다

그만큼 히로코에게 이츠키(남)는 너무나 큰 존재라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어렵게 느끼는 듯하다

마침내 이츠키가 죽은 산에 가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설산에 안부를 묻는 히로코

그의 모습은 깊은 슬픔을 담고 있으면서도 후련해보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

감기로 아버지를 잃은 이츠키의 가족들은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보인다

할아버지는 조금 정신이 오락가락한 것으로, 어머니는 옛 집을 버리고 새 아파트로 이사가려는 것으로, 이츠키에게는 끝나지 않는 감기로 나타난다

어느 폭설이 내리는 날, 이츠키는 고열 때문에 쓰러져 버린다

눈 때문에 구급차는 최소 한시간이 걸린다

아버지때와 너무도 똑같은 상황에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은 지경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도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체되어 아버지는 결국 살아나지 못했다

'이번에도 똑같으면 어떡하지?'

미칠 것 같은 불안감이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엄습한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손녀를 업고 병원까지 뛰어가겠다고 우긴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설득을 하면서

하지만 어머니는 이번에는 딸을 잃을까봐 할아버지에 반대한다

치열한 갈등 끝에 결국 어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설득되어 병원까지 40분의 달림박질 여정을 함께하게 된다

영화에서 가장 긴박한 장면이다

할아버지가 지쳐서 눈밭에 대자로 쓰러져버리는 장면은 코믹하면서도 너무 슬프다

이번에는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겠다는 결의...

그것은 아들을 살리지 못했다는, 심지어는 아들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에 기인한 것일테다

결국 할아버지의 초인적인 집념으로 병원에 40분도 아닌 38분만에 도착한 일행

이번에는 이츠키를 살렸다는 안도감에 가족 모두가 긴장이 풀린다

또 다른 죽음의 목전에서 다 함께 이츠키를 살려낸 가족들은 비로소 아버지 죽음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 제목은 영화의 주요 테마를 관통하는 셈이다

고통스러워서 차마 마주하지 못했던 과거를 다시 마주한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따가운 소독약을 바르고 살을 꿰어 봉합해야한다

아픈 과정이지만 하지 않으면 상처가 서서히 곪아버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과거는 잊고 새로운 삶을 살자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러브레터의 작동기제는 아플지라도 잊고있던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성장하는 것이다

과거의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 현재의 나를 사랑할 수 없다

두 여자의 성장통에 함께 울고 또 웃는 영화였다

 

숏컷병에
걸릴 것 같다
방이...너무예쁨...
방이 너무 예쁨2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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