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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3.19 비밀의 계절(1992)
  2. 2023.03.09 해피투게더(1997)
  3. 2023.03.07 패자의 생명사(2022)
  4. 2023.03.03 증언들(2019) 1

비밀의 계절(1992)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을 읽었다

미국의 어느 대학 동아리에서 벌어지는 스릴러다

그리스어 동아리에서 펼쳐지는 학생들의 온갖 지적 유희와 도덕관념 따윈 에라 모르겠다 하는 폐쇄적 공동체 특유의 유대감

보면서 뭔가 영화 몽상가들이 떠올랐다

따지고보면 이게 뭔 헛짓거리인가 싶은데 분위기 하나로 다 납득이 가는 그런 요상한 관계

몽상가들은 배우 얼굴과 분위기로 커버했는데 이 작가는 필력하나로 납득시킨다

이런 소재로 오글거리지 않다니 신기했음

 

책은 스릴러면서도 전형적인 스릴러물과는 전개를 달리하는데,

서서히 서사를 빌드업하며 사건의 범인이 밝혀지는 보통 스릴러물과 다르게 첫페이지에 진범이 나온다

그러고는 태연스럽게 주인공이 어떻게 해서 그 대학에 입학했으며, 그리스어 동아리 친구들과는 어떤 순서로 친해지게 되었나 설명하는 것이다

강렬하게 독자의 이목을 끌 뿐만 아니라 서사적으로도 참 신박한 느낌임

사건이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진실들도 엄청난 반전이 아니라 아주 작은 디테일들이 추가되면서 사건의 새로운 측면이 보이는 방식이다

책의 특징을 하나 꼽자면 무엇보다 디테일이다

시원시원하게 다음 사건이 전개되기는 커녕, 무슨 책이 리얼타임수준으로 주인공과 시간을 함께하는 것 같다

주인공이 어떻게 햄든 대학에서의 이 엉망진창인 한 해를 보내는지, 계절은 어떻게 변하고 과제는 어떻게 하는지 모든 디테일이 빠짐없이 써있다

이런 집요한 서술 때문에 읽다가 좀 지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영화 보듯이 눈 앞에 풍경이 펼쳐져서 즐겁다

제목에 충실하게 책에서 공들여 묘사되는 것이 바로 계절감이다

프랜시스의 별장에서 보낸 찬란한 여름과 가을의 풍경, 그리고 일어난 살인과 얼어붙은 기나긴 겨울

이런 부분들이 극적으로 대비되어서 분위기를 더 맛깔나게 살려주는 면이 있다

 

책에서 또 좋았던 부분은 캐릭터였다

이 점 때문에 영화화에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주인공 리처드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전형적인, 평범한 세계에서 비밀스러운 공동체로 발을 내딛는 주인공이다

그들을 선망하고 동경하며 어울리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거부당한다

마침내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을때, 리처드는 자신이 동경하던 것의 실체가 사실 추악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미 도망가기엔 늦었고 리처드 또한 그들이 공유한 비밀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리처드가 동아리에 갖는 동경은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가질법한 종류의 것으로 거의 시인들이 이상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거의 신화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 맹목적인 동경과, 처음 동아리에 들어갔을 때 더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난 모습의 묘사가 재밌었다

이 그리스어 동아리는 어쩌다가 살인까지 하게되는데, 솔직히 그걸 안 시점에서 주인공이 손털고 떠나는게 정상 아닌가?

근데 리처드는 살인 덮는 걸 또 도와준다 더 황당한 건 이 말도 안되는 결정의 심리를 이해가도록 쓰는 작가의 필력이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약간 취한 것처럼 애들이 상태가 이상하다

(물론 실제로 이것저것에 많이 취해있기도 하고)

학교같은 폐쇄적인 공동체에서는 이상하게 말도 안되는 짓을 용인하는 심리가 있는데 이걸 어찌나 잘 묘사했는지 작가가 혹시 대학교 동아리에서 살인 해봤나 싶었음

 

다른 캐릭터들도 개성이 상당히 강하다

묘한 관계를 갖고 있는 쌍둥이 남매 찰스와 카밀라, 붉은 머리의 퇴폐적인 게이 캐릭터 프랜시스, 구제불능의 버니 그리고 무리의 대장격인 헨리

특히 헨리 캐릭터가 몹시 인상적이다

늘 정장을 입고다니고, 거구임에도 자세 때문에 사람들이 거구인줄을 몰랐다가 깜짝 놀라는 점

그리스 고대문화에 경도되어있고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를 아주 진지하게 하는 자기 만의 세계가 있는 점

아주 위엄 있어서 그가 시키는 말은 따르지 않을 수가 없는 점

극의 주된 긴장감을 조성하는 역할은 다 헨리가 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버니와의 관계도 묘한 곳이 있어서 자꾸 곱씹게 된다

헨리가 버니를 아주 싫어하면서도 또 자꾸 져주는 모습이 이게 뭔가 싶고...

버니를 죽일 수 밖에 없게끔 동아리의 분위기를 슬슬 몰아가는 헨리도 무시무시하다

하여튼 전부다 제정신이 아닌데 읽기에는 참 재밌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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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투게더(1997)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를 봤다

기빨리는 내용일 것 같아서 안보고 미뤄두기를 어언 300년....

어쨌든 양조위와 장국영이 나오는데 안보는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영화는 생각외로 전혀 안잔잔하고 도파민 폭발하는 자극적인 내용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양조위랑 장국영이 연인인데 둘이 끊임없이 깨어졌다 붙었다 하는 내용

어떻게 보면 팬픽감성인데 또 어떻게 보면 무지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들같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보영(장국영)과 아휘(양조위)의 강렬한 베드신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 이런 영화니까 싫으면 보지 말라는 선전포고같다(정작 그뒤로는 베드신이 안나오지만)

 

연인인 그들은 대책없이 홍콩을 떠나 아르헨티나로 가서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간다

하지만 차는 고물인데다, GPS도 네비게이션도 없는 시대라 자꾸 딴길로 헤맨다

가장 문제인건 보영이다 뭐든 아휘가 다 하도록 시켜놓고 불평만 하는 보영은 최악의 길동무다

 

설상가상으로 차가 퍼져서 아휘가 차를 밀도록 시킨 뒤에 한참을 차를 타고 가버린다

완전히 가버린게 아니고 가다가 멈춘게 어디인가 싶지만, 그게 오히려 더 열받기도 함

왜 서로 싸웠을때 장난이랍시고 한 행동이 더 서운한 거 있잖음

하여튼 둘은 결국 이과수 폭포에 도달하지 못하고 헤어진다

 

헤어진 이후 아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싸구려 탱고바에서 호객꾼일을 한다

홍콩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티켓을 살 돈도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비참한 원룸에서 쪼들리며 돈을 모은다 

나오는 풍경이라고는 하나같이 후줄구레한 뒷골목인데 왕가위 렌즈 뒤에서는 그것조차 분위기 있어 보이니 신기한 노릇이다

 

엉망진창 인생을 수습하려고 노력하는 아휘 앞에 야속하게도 다시 보영이 나타난다

그것도 연인이라기보단 물주처럼 보이는 남자를 옆에 낀 채로

 

보영은 아휘와 정반대의 성향이다

절망속에서도 어떻게든 계획을 세우고 미래를 생각하는 아휘와 달리 보영은 현재의 쾌락만을 쫓는 사람이다

MBTI로 치면 J형과 P형의 최악의 조합이다

 

아휘는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보영을 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생각대로 될 턱이 있나

아휘가 마음 굳게 먹어봤자 맞아터진채로 나타난 보영 얼굴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결국 아휘는 다친 보영을 돌봐주고 먹여주며 동거를 시작한다

가만 내버려두면 어디가서 혼자 죽어버릴 것같은 이 위태로운 남자를 아휘가 무슨 수로 내버려 둘 수 있을까

 

정말 상처인건 보영이 아휘가 자신을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그걸 이용한다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보영이 아파서 아휘를 떠날 수 없을 때 아휘는 가장 행복감을 느낀다

 

그야말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들

보영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다 아휘를 사랑하지만 습관적으로 아휘에게 상처주는 일을 한다

아휘는 보영을 사랑하는 것이 최악의 선택임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영화는 크게 보면 아휘의 성장영화기도 하다

보영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려고 한다

그런데 성장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최악의 상황에서 이상하게 행복감을 느낄 때도 있다

 

보영과 아휘는 함께할 때 가장 행복하지만 그건 그들의 관계가 건전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건전한 관계가 반드시 최상의 행복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보영과 아휘가 함께 탱고를 추는 장면은 그런 모순적인 행복의 극치다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은 위태롭고 둘은 절망적인데 서로를 너무나 사랑한다

후줄근한 나시며 남방을 입고서 지저분한 빌라 구석에서 추는 탱고가 그렇게 아름답다

 

영화의 재밌는 점은 보영이 망나니긴 하지만 또 그렇게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휘가 착하지만 또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부분이다

보영이 정말 열받는 건 아휘를 사랑하면서 자꾸 그따위로 행동을 한단거다

온갖 일탈은 다 저지르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면서 천사같은 얼굴로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용서하게 만든다

아휘는 보영이 다쳐서 왔을 때 속으로 그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영의 여권을 충동적으로 숨겨버리기도 한다

아휘의 소심한 반항은 결국 파국을 불러온다

보영은 여권을 내놓으라고 난장판을 만들고, 아휘는 그 모습에 속이 상한다

여권을 달라는 건 자신을 언제든지 떠나겠다는 선언이 아닌가

그렇게 둘의 동거는 끝나버린다

 

영화에서 가장 눈물 났던 장면은 둘이 헤어진 후 아휘가 녹음기를 들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우는 부분이다

주위에 아무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차마 말을 못한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시작하면 모조리 쏟아질까봐 억눌러 담는 것 같기도 하다

아휘는 그 녹음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꼭 <화양연화>마지막에 양조위가 앙코르와트의 어느 기둥에 자기 비밀을 털어놓는 장면이 떠오른다

못다한 말이 많은 양조위는 왕가위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테마다

 

보영과 아휘가 헤어진 후, 아휘는 홍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된 일을 하며 돈을 모은다

보영이 없는 아휘의 삶은 외롭고 행복하지 않지만 그것만이 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유일한 방법이다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은 삶의 아이러니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끊임없이 잘못된 선택을 할까?

왜냐하면 '해피투게더'라는 제목처럼 같이 있으면 행복하니깐

그 관계가 자신의 삶을 파멸로 몰고갈지라도 행복하니까

삶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아서 가끔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공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나는 아휘가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히 이과수 폭포로 갈 계획을 세우는 부분이 너무 슬펐다

보영과의 관계가 마치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는 평범한 관계인 것처럼,

든든한 연인처럼 그를 데리고 갈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혼자 너무나 행복해한다

함께 웃으며 여행을 할 미래는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외면하면서 최면을 걸듯이 말이다

보영이 사온 이과수 폭포가 그려진 스탠드의 두 사람처럼 그 곳에 함께 가는 것을 꿈꾸며 아휘는 얼마나 행복해 했나

 

스탠드 그림에는 두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결국 그 곳에 간 건 아휘 혼자였다

스탠드에 그려진 모습은 평온하고 아름다웠는데 막상 혼자 도착한 폭포는 아름답다기보다는 거대하고 파괴적이다 

폭포에서 물이 눈도 못뜰 정도로 튀는데, 좀 뻔한 비유지만 아휘의 슬픔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휘의 말로 다 못할 슬픔이 거대한 폭포로 쏟아져내리는 것 같다

 

아휘가 진짜 폭포에 가있을때, 보영은 아휘가 없는 아휘의 방에 찾아와 폭포 스탠드를 멍하니 바라본다

폭포 앞에 있는 두 사람의 그림이 눈에 띈다

아휘는 이걸 해보고 싶었구나 문뜩 깨닫는다 뒤늦게 후회와 그리움이 몰려온다

 

악착같이 일해서 비행기 삯을 다 모은 아휘는 다 털고 홍콩으로 돌아간다

홍콩에 가기 전에 대만에 들러,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친구로 지냈던 장의 부모님 가게를 찾아가본다

 

장과 아휘는 중식당에서 같이 일했던 사이인데 외로운 타지 생활에서 서로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다

장은 왕가위 특유의 디테일이 묻어나는 캐릭터인데, 어렸을 때 눈이 좋지 않아서 소리를 아주 잘 듣는다는 설정이다

아휘가 전화하는 소리를 듣고 그에게 흥미를 가진다

영화 내에서 명확하게 장과 아휘의 관계를 정의내릴 단서는 없지만 뭔가 느낌상으로 서로를 좋아했던 것 같다

특히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눌 때 포옹하는게 묘하다

 

아휘가 장을 보러 대만에 갔던 것은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여지와 함께 그의 성장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상처만 주는 파괴적인 사랑을 떠나 이제는 조금 더 성숙하고 안정된 사랑을 할 준비가 된 것같다

하지만 그는 이제 행복할까? 마지막 부분을 보는데 끊임없이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보낸 한철이 대만의 화려한 야경 속에서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흐릿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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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의 생명사(2022)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패자의 생명사>를 읽었다

내가 책 중에 가장 좋아하는 분야는 역시나 문학이지만 생명과학 책도 가끔 읽으면 재밌다

살다보면 익숙한 관점으로만 생각하다 보니까 머리가 굳는 기분인데, 생명과학이야말로 가장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기본적으로 생명과학은 인간편의중심적인 오류를 지적하고 다른 생명의 관점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나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자의식 과잉'을 치료하고 건강한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생각을 환기해주는 역할이다

 

<패자의 생명사>는 지구 생물들의 진화과정을 쉽게 풀어쓴 책인데, 다만 관점에 있어서 차별점을 둔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꼭 더 강하고 큰 생명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책에서 나온 내용으로 예를 들자면, 포유류는 공룡들이 전성기를 누릴 때 작은 몸집으로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겨우 살아남은 생물이었다

반면 공룡들은 끊임없는 크기 경쟁을 통해 거대한 몸집을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지상을 지배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운석충돌에 의해 척박한 환경이 된 지구에서 거대한 공룡들은 필요한 열량을 채우기 힘들어 멸종하고 말았다

몸집이 작은 포유류는 살아남는데 많은 먹이가 필요하지 않았다

포유류는 살아남아 공룡이 모두 멸종한 지상에서 번성했다

저자는 이런 것을 두고 '패자의 승리'라고 말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냥 환경에 적응하는 쪽이 살아남는다는게 정확한 말이지 않을까 싶다

그치만 '패자의 승리' 쪽이 좀 더 드라마틱한 맛이 있으니까 그렇게 쓴 이유도 이해가 간다

 

저자가 식물학자라서 그런지 동물 이야기보단 식물 이야기가 디테일이 있고 재밌다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을 하나 꼽자면, 풀이 나무보다 더 진화된 형태라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나무가 훨씬 크고 복잡하게 생겼으니 나무가 후에 진화했을 것 같은데 사실은 반대다

나무는 위로 쑥쑥 자라서 초식동물의 피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만약 영양분과 물이 충분하지 않은 혹독한 환경에 있다면, 성장속도가 몹시 느려서 성장하기도 전에 동물에게 잡아먹힐 수 있다

몇십년에서 몇천년까지도 살아가는 나무와 달리 풀은 한해살이나 여러해살이 정도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짧은 삶을 살아가는 풀은 하찮아보인다 

하지만 풀은 혹독한 계절을 대비하는데 자신의 에너지를 쓰지 않는 대신, 빠른 사이클로 번식을 한다

개별 개체의 수명은 짧지만 종 전체는 몇천년이고 가는 셈이다

생존을 위해서 오히려 수명을 줄이고 구조를 단순화 시켰다는게 재밌다

 

풀 중에서 특히 벼같은 종류는 생장점이 줄기 위쪽이 아니라 아래쪽에 있다고 한다

생장점이 위쪽에 있는 경우 식물은 끊임없이 새로운 줄기를 뻗어나가며 키가 클 수 있지만 동시에 초식동물에게 먹혀 생장점이 파괴될 경우에는 더이상 새롭게 자라날 수 없어 죽게된다

그야말로 하나를 내주고 하나를 얻어가는 셈이다

벼같은 경우는 생장점이 아래에 있기 때문에 키가 크는데는 제한이 있지만 초식동물에게 먹혀도 아래의 생장점만 살아있으면 끊임없이 재생이 가능하다

저자가 책에서 강조하는 부분이 생존은 '넘버원'이 아닌 '온리원'이 한다는 것이었다

꼭 최강의 동물이나 식물이 되는 것이 방법이 아니라, 자신만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마치 온앤오프 노래 가사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생물들처럼 온앤오프도 1군 탑 아이돌은 아닐지라도 자신들만의 색깔로 대체불가능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가 보면 또 기회가 오는거다 별볼일없는 소동물이었던 포유류가 지상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 것처럼

 

솔직히 "자연에는 모든 답이 있다"라는 식의 얘기는 별로 안좋아한다

그건 "인간이 우월하다" 만큼이나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이 책도 좀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서, 메시지가 그다지 세련되지는 않다

글의 호흡도 너무 짧다 조금 집중하려고 하면 어느새 끝나버린다

과학서적은 저자가 내놓는 이론을 근거 체크하면서 치열하게 머릿속으로 다투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그런 맛은 하나도 없다... 

아무래도 책의 가독성을 위해서 근거의 디테일을 와장창 잘라먹은 것 같다

물론 짧고 쉽게 읽히며, 메시지도 단순하다는 점을 오히려 매력으로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같다

명작이라고 하긴 뭐한 책이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관점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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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들(2019)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을 읽었다

<증언들>은 <시녀이야기>의 후속작으로, 전작에서는 시녀 오브프레드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아주머니' 계급을 전면에 등장시켜 독자들에게 길리어드라는 국가의 속사정을 조금 더 깊이 보여준다

또한 전작에서 여성 혐오의 답답한 현실을 디스토피아 세계관으로 풀어냈다면,

<증언들>은 제도화된 여성 혐오를 넘어서기 위한 여성들의 연대를 벅차게 보여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전작의 고구마를 뛰어넘는 사이다가 있다고나 할까

<시녀이야기>가 쓰여진 1985년의 사회적 분위기와는 확실히 많이 달라진 세태의 반영이 있는 것 같다

절망적 전망 대신 희망과 연대에 대한 여성들의 욕구가 느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사라졌던 낙태죄가 다시 부활하는 등 오히려 '길리어드'처럼 퇴보한 모습도 있으니 아이러니 하다

 

작품은 세 여성의 증언을 담고 있다

전작에서 다른 여성들을 탄압하는 철혈의 '아주머니' 계급으로 등장하는 리디아 아주머니,

사령관의 딸로 태어났지만 '아내'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아주머니가 된 아그네스,

캐나다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열여섯 생일에 자신이 알던 세상이 뒤바뀌게 되는 데이지

 

같은 여성을 박해하는 '나쁜 년'이었던 리디아 아주머니가 반전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 가장 재밌었다

<시녀이야기>에서는 여성들간의 분열과 시기, 질투가 꽤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아내는 남편과 대신 성행위를 하는 시녀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아주머니들은 다른 모든 여성을 잔혹하게 탄압한다

물론 그러한 분열이 일어날 수 밖에 없도록 여성들의 소통을 금지하고 서로를 감시하는 분위기 또한 잘 묘사되어 있어 납득이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 사회가 세뇌 수준으로 질투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이미 만들고 있는데 페미니즘 소설에서까지 이런 묘사를 봐야할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었다

내 생각에는 작가도 후에 그러한 아쉬움을 가지고 <증언들>을 써내려 갔던 것 같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겉으로는 남성권력에 기생하며 권세를 누리는 중년여성이지만, 사실은 지하 여성 단체인 메이데이와 몰래 내통하는 스파이의 역할도 하고 있다

무간도 같은 언더커버물인 셈이다

길리어드를 설립한 사령관 남성들은 공포와 무력만으로는 여성들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부 여성들을 '아주머니'로 포섭하여 여성들을 내면에서부터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여러가지 규율을 만들도록 한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길리어드 건국 이전에는 판사로 일했지만, 자신앞에 죽음 혹은 사령관들과의 협력만이 놓이자 협력을 선택한 인물이다

 

일단 첫발을 내디디면, 그 결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다음 발을 내딛게 된다. 우리가 사는 이런 시대에는 방향이 딱 두 개밖에 없다. 위로 올라가거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그는 긴 세월동안 길리어드에 충성하며 물밑에서 온갖 더러운 일에 손을 대며 국가의 존속에 기여한다

사령관들의 더러운 뒷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수집하며 길리어드의 종말을 계획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채 말이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자신이 저질러온 악행들에 대해 변호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아그네스가 증언하는 사령관 딸의 삶은 초반에는 마치 행복한 삶처럼 보인다

태어날 때부터 순종의 미덕을 주입당한 소녀들은 자신의 삶에 꽤 만족하며 살아가는 듯하다

그들은 하녀를 거느리고 보살핌을 받으며 학교에도 다닌다

하지만 평범한 듯이 증언하는 일상 곳곳에는 기괴함이 엿보인다

여성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집을 지키고 있는 '천사'들, 여성에게 글이나 학문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 학교

배를 갈라 아기를 꺼내고 죽음을 맞이한 시녀

결정적으로 어린나이에 늙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정해지자 아그네스는 참을 수 없어진다

전작에서 특권 계층으로 그려졌던 '아내' 계급 또한 말도 안되는 조혼풍습과 순종의 의무로 억압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봉건 사회에서 

아그네스는 결국 결혼시장에서 이탈하여 아주머니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아주머니들이 생활하는 아르두아 홀에서 리디아 아주머니와 데이지를 만나게 된다

 

데이지는 주인공스러운 설정을 다 가지고 있는 캐릭터다

길리어드에서 십몇년전에 아기를 데리고 탈출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아기 니콜

아기 니콜은 길리어드 반대자들 사이에서는 저항과 자유의 상징이고

길리어드 측에서는 납치당한 불행한 아기로, 아기 성자 취급이다

길리어드 요원들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한 이 아기를 찾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데이지의 열여섯번째 생일에 부모님이 상당히 의문스러운 사고로 사망하고 

그는 자신의 세계가 송두리채 바뀌는 한 마디를 듣는다 "네가 아기 니콜이란다"

마치 해리포터에서 해리가 "넌 마법사란다 해리"를 듣는 장면과 비슷하달까

물론 해리는 학대로 얼룩진 프리벳가에서 벗어나 마법학교에서 멋진 모험을 시작하지만

데이지는 자신의 양부모를 잃고 생명을 위협받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모험을 떠난다는 서사 구조는 전형적인 것이지만 아는 맛이 더 맛있다고 상당히 재미있다

이렇게 해서 작가는 전작에서 독자가 궁금해했던 설정들에 대한 설명을 다 내놓는다

아주머니 계급과 아내 계급, 지하여성조직 메이데이와 길리어드 국외의 상황까지

 

초반에는 서로 상관없어보이던 세 인물의 이야기가 얽히고 섥히며 종장을 향해 달려간다

보통 메시지가 지나치게 선명해지면 이야기가 촌스럽고 유치해지는데, <증언들>에는 해당이 안되는 이야기다

세련되게 잘 닦인 서사와 정말 길리어드라는 나라가 실존하지 않는지 착각하게 만드는 생생한 캐릭터들

글빨은 또 얼마나 좋은지 후반부에서는 눈물을 끊임없이 닦으며 읽었다

600페이지짜리를 쉼없이 읽도록 만드는 작가의 저력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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