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계절(1992)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을 읽었다

미국의 어느 대학 동아리에서 벌어지는 스릴러다

그리스어 동아리에서 펼쳐지는 학생들의 온갖 지적 유희와 도덕관념 따윈 에라 모르겠다 하는 폐쇄적 공동체 특유의 유대감

보면서 뭔가 영화 몽상가들이 떠올랐다

따지고보면 이게 뭔 헛짓거리인가 싶은데 분위기 하나로 다 납득이 가는 그런 요상한 관계

몽상가들은 배우 얼굴과 분위기로 커버했는데 이 작가는 필력하나로 납득시킨다

이런 소재로 오글거리지 않다니 신기했음

 

책은 스릴러면서도 전형적인 스릴러물과는 전개를 달리하는데,

서서히 서사를 빌드업하며 사건의 범인이 밝혀지는 보통 스릴러물과 다르게 첫페이지에 진범이 나온다

그러고는 태연스럽게 주인공이 어떻게 해서 그 대학에 입학했으며, 그리스어 동아리 친구들과는 어떤 순서로 친해지게 되었나 설명하는 것이다

강렬하게 독자의 이목을 끌 뿐만 아니라 서사적으로도 참 신박한 느낌임

사건이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진실들도 엄청난 반전이 아니라 아주 작은 디테일들이 추가되면서 사건의 새로운 측면이 보이는 방식이다

책의 특징을 하나 꼽자면 무엇보다 디테일이다

시원시원하게 다음 사건이 전개되기는 커녕, 무슨 책이 리얼타임수준으로 주인공과 시간을 함께하는 것 같다

주인공이 어떻게 햄든 대학에서의 이 엉망진창인 한 해를 보내는지, 계절은 어떻게 변하고 과제는 어떻게 하는지 모든 디테일이 빠짐없이 써있다

이런 집요한 서술 때문에 읽다가 좀 지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영화 보듯이 눈 앞에 풍경이 펼쳐져서 즐겁다

제목에 충실하게 책에서 공들여 묘사되는 것이 바로 계절감이다

프랜시스의 별장에서 보낸 찬란한 여름과 가을의 풍경, 그리고 일어난 살인과 얼어붙은 기나긴 겨울

이런 부분들이 극적으로 대비되어서 분위기를 더 맛깔나게 살려주는 면이 있다

 

책에서 또 좋았던 부분은 캐릭터였다

이 점 때문에 영화화에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주인공 리처드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전형적인, 평범한 세계에서 비밀스러운 공동체로 발을 내딛는 주인공이다

그들을 선망하고 동경하며 어울리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거부당한다

마침내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을때, 리처드는 자신이 동경하던 것의 실체가 사실 추악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미 도망가기엔 늦었고 리처드 또한 그들이 공유한 비밀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리처드가 동아리에 갖는 동경은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가질법한 종류의 것으로 거의 시인들이 이상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거의 신화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 맹목적인 동경과, 처음 동아리에 들어갔을 때 더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난 모습의 묘사가 재밌었다

이 그리스어 동아리는 어쩌다가 살인까지 하게되는데, 솔직히 그걸 안 시점에서 주인공이 손털고 떠나는게 정상 아닌가?

근데 리처드는 살인 덮는 걸 또 도와준다 더 황당한 건 이 말도 안되는 결정의 심리를 이해가도록 쓰는 작가의 필력이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약간 취한 것처럼 애들이 상태가 이상하다

(물론 실제로 이것저것에 많이 취해있기도 하고)

학교같은 폐쇄적인 공동체에서는 이상하게 말도 안되는 짓을 용인하는 심리가 있는데 이걸 어찌나 잘 묘사했는지 작가가 혹시 대학교 동아리에서 살인 해봤나 싶었음

 

다른 캐릭터들도 개성이 상당히 강하다

묘한 관계를 갖고 있는 쌍둥이 남매 찰스와 카밀라, 붉은 머리의 퇴폐적인 게이 캐릭터 프랜시스, 구제불능의 버니 그리고 무리의 대장격인 헨리

특히 헨리 캐릭터가 몹시 인상적이다

늘 정장을 입고다니고, 거구임에도 자세 때문에 사람들이 거구인줄을 몰랐다가 깜짝 놀라는 점

그리스 고대문화에 경도되어있고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를 아주 진지하게 하는 자기 만의 세계가 있는 점

아주 위엄 있어서 그가 시키는 말은 따르지 않을 수가 없는 점

극의 주된 긴장감을 조성하는 역할은 다 헨리가 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버니와의 관계도 묘한 곳이 있어서 자꾸 곱씹게 된다

헨리가 버니를 아주 싫어하면서도 또 자꾸 져주는 모습이 이게 뭔가 싶고...

버니를 죽일 수 밖에 없게끔 동아리의 분위기를 슬슬 몰아가는 헨리도 무시무시하다

하여튼 전부다 제정신이 아닌데 읽기에는 참 재밌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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