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에반게리온(1995)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

어이없게도 내가 처음으로 에반게리온을 접한 건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EOE)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TV판 에반게리온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서 TV판을 다 봐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고,

당시에 유행하던 말로는 '멘붕물'이었다

그때 친했던 친구가 에반게리온에 심취해 있어서 나에게 무작정 EOE부터 보여줬던게 원흉이다

상당히 충격을 받았지만 사춘기 특유의 허세로, 이쯤이야 뭐 하나도 안 잔인하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도 EOE에서 아스카가 무참하게 공격당하는 모습, 레이가 거대한 모습은 머릿속에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온갖 자극적이고 기괴한 것으로 순위를 다투는 컨텐츠가 만연한 요즘에 봐도 충격적인데

97년도에 봤으면 정말 기절초풍했을 것 같다

하여간에 최근에 극장에 가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의 마지막 편인 다카포를 보고 와서

다시 TV시리즈와 EOE를 보게 되었다

아마 한 4번째 보는 것 같은데, 감상문을 쓰는 건 처음이다

나에게는 우울할 때 보면 뭔가 정신적으로 정화가 되는 애니메이션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비극을 보면서 카타르시스, 즉 감정의 정화를 느꼈다는 것처럼

나도 나보다 훨씬 비극적인 상황에 놓인 신지를 보면서 이상하게 정화가 되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기분이다

 

1. 연출

사실 내가 에반게리온을 좋은 작품으로 평가하는데는 메시지나 철학보다는 연출이 크다

애초에 철학을 할거면 책을 쓰는 편이 낫지 왜 만화를 만들겠는가

메시지를 전달할 때는 그 매개체의 중요성이 생각보다 참 크다

정말로 중요하고 그럴듯한 이야기라도 말하는 사람이 찐따같으면 그저 찐따소리같이 느껴지는 것처럼

메시지를 전달하는 연출의 높은 완성도가 많은 오타쿠들이 에반게리온에 깊게 파고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TV판이 방영된 것은 1995년부터 1996년으로, 그야말로 세기말의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기대가 있던 시절이다

겉보기에는 소년만화의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어딘가 많이 뒤틀려있는 이 만화는

열혈 소년들의 건강한 우정과 용기를 다루는 것 보다는 

사춘기의 불안하고 손대기만 하면 깨질 것 같은 위태로운 심리를 그려내고 있다

특히 그런 심리는 독특한 연출로 나타난다

예산이 부족해서라는 후일담이 있기는 하지만,

정적인 화면에 성우의 목소리만 나오는 특유의 연출은 신지의 깨질 것 같은 예민한 심리를 극대화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는 비디오아트나 콜라주작품을 연상케하는 씬들도 신지의 불안한 정신을 잘 보여준다

 

TV판 마지막 두 회차는 복습할때마다 참 제정신으로 보기 힘들다

약간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이 만든 것 같은 에피소드 같다

현실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보여주지 않고,

끊임없이 신지의 내면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만 보여준다

그래서 이번에는 24화까지 보고, 극장판인 EOE로 넘어가는 루트를 택했다

이렇게 하면 얼추 이야기의 아귀가 맞는 느낌이라 이렇게 보는 편을 선호한다

EOE는 말하자면 25화와 26화에서 신지가 '우메데토~'하는 동안

현실세계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는 내용이다

지금봐도 참 황당한 구성인데 그때 처음 봤던 사람들은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EOE에서는 순조롭게 세상이 망해간다 

서드임팩트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신지가 좋아했던 아스카는 만신창이가 되고 레이는 거대레이가 되고.. 

신지와 함께 시청자의 정신도 탈탈 털리는 내용이다

상징적인 부분이 많아서 매끄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 해석을 보면서 무작정 그걸 내 해석인양 받아들이기도 싫은 탓에

그냥 반쯤 이해하지 못한 채로 늘 보고 있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의 매력은 또 이해안되는 그 신비함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2. 메시지

신지는 늘 타인에게 상처를 입는다. 조금은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자꾸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져간다. 

고통스러운 신지는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려고 한다

늘 자신에게 모질게만 구는 아버지, 자신을 거부하는 아스카, 겨우 이해했다고 생각했을 무렵 죽는 레이...

정말 정신이 나가지 않고는 못배길 환경이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배우면서 에반게리온을 떠올렸다

이방인은 처음 읽으면 이게 명작이라고??? 싶어지는 겁나 재미없고 이상한 책이다

그게 술술 이해가 잘되면 이상한 사람이다

애초에 이해가 잘 안되도록 감추는 언어를 사용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보통 책들은 인물의 행동에 인과관계가 있고 독자가 화자에 몰입할 수 있도록 쓴다

그런데 이방인은 정확히 그 반대를 의도적으로 추구한다

독자가 아무리 읽어도 화자에 대해 결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달의 뒷면같은 수수께끼의 공간을 남겨놓는 것이다

이는 부조리 철학과 연결된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눈부신 발전을 이루던 인류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설명가능하다는 오만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전쟁에 휩싸인 세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하고 폭력적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전쟁은 그렇게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성으로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세계

 

타인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 표정은 결코 완전히 마음을 전달할 수 없기에

타인의 존재에는 항상 우리가 무슨 수를 써도 알아낼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있다

마음의 벽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늘 상처입는다

에반게리온에서는 이 마음의 벽을 AT필드라고 한다

인류보완계획은 이 마음의 벽을 완전히 녹여 인류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것

더 이상 서로 오해하고 상처입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신지는 상처입더라도 나자신으로 살아보고 싶다면서 

LCL용액화된 인류를 원래대로 복구시킨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갔다 나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의해 쉽게 상처입는 나이로는 사춘기만한 것이 없다

때로는 너무나 자괴감이 들어 이런 상처를 주는 사람들 따위 존재하지 않았으면, 생각해버리기도 한다

어쩌면 에반게리온은 한 예민한 소년의 성장기에 대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 하지만 그것에 맞서야 어른이 될 수 있다

회피하지 말고 현실에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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