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1. 케이건 드라카

키탈저 사냥꾼의 후예, 아라짓 왕족, 나가 살육자

각각의 정체성은 어우러지기 보다 책이 진행될 수록 더욱 더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모순된 정체성을 한 몸에 가진 인간. 칼 두개를 하나로 합한 바라기를 든 인간.

친절하면서도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이성적이면서도 돌아있는 것 같은 상반된 성격을 가진 

이 사람은 키탈저 사냥꾼들이 좋아하는 모순을 인간으로 만든 것 같다.

그의 이런 모습은 등장인물과 독자에게 끊임없는 혼란을 준다.

이 이야기가 주는 큰 과제 중 하나는 케이건 드라카라는 인물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케이건 드라카의 과거, 그가 사랑했던, 그리고 증오하는 대상에 대해 알게된다.

그가 증오했던 대상은 나가라는 종족 전체. 나가의 배신과 속임수로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내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남성. 어디서 백번쯤 본 내용 같지만 놀랍게도 케이건 드라카는

'자기연민에 빠진 추레한 중년남' 클리셰를 빗겨간다.

그가 뻔한 캐릭터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변명하거나 이해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도깨비 비형은 케이건이 나가를 죽이고 먹는다는 것을 알고, 그 행위를 비판하며 멈출 것을 요구한다.

케이건은 그의 비판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멈출 생각은 없다.

멈추고 싶다면 자신을 죽여 멈출 기회를 주겠다는 무서운 말을 한다.

그의 살짝 돌아버린 것 같은 섬뜩한 매력은 그 차분하게 무서운 소리를 하는 점에서 오는 것 같다.

 

2. 나가

각 종족들의 세계관이 그저 인간의 겉모습만 바꾼 피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꽤 구체적이고 있음직하게 그려져 있는 점이 좋았다. 

상상력은 세심한 관찰력과 결합될 때 가상의 세계에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도깨비라는 종족은 도깨비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날아다닐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종족이다.

그런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들이 다른 종족을 모두 정복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피를 무서워하기 때문.

레콘은 엄청난 괴력을 가진 호전적인 종족이나, 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자이기 때문에 국가를 이루지 않는다.

'판타지'라는 장르에 무책임하게 개연성을 묻어가는 대신 이 종족들이 하나의 대륙에 공존할 수 있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섬세한 관찰력으로 보고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여성이 가문의 상속자가 되는 나가들의 여존남비 세계관은 언뜻 이갈리아의 딸들을 떠올리게 되지만

남녀 구도를 뒤바꾼 풍자소설의 인상이 강한 이갈리아 딸에 비해, 

눈물을 마시는 새는 여성 상속제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설득력 있을지 고민한 흔적이 크다. 

아기의 성장속도가 아주 느린 인간의 경우 여성이 임신하고 아이를 기를 때

그를 보호하고 먹을 것을 구해올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결혼제도라는 것이 성립한다.

그러나 나가는 그러한 보호의 역할을 가문이 완전히 대신하기 때문에 결혼 제도가 필요 없다.

남성이 여성과의 결혼을 통해 종속되는 그림도 상상해볼 수 있겠으나, 그것은 그 세계에서 낭비일 수 있겠다. 

남성은 체액을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으나 여성의 임신은 몇달의 기간을 거치기 때문이다.

남성이라는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또한 그들에게 아무런 권위를 주지 않기 위해서

가문의 일원이 여성과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남성만으로 이루어진 모습이 흥미롭다.

 

나가라는 종족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발견되는 신화에서 따온 것같다.

나가는 신화에서 인간의 상체와 뱀의 하체, 또는 머리가 일곱개 달린 뱀으로 묘사되고는 한다.

그래서 나는 나가들의 도시를 머릿속에 그려볼 때 앙코르와트를 떠올리고는 했다.

열대 지방의 빽빽한 밀림 속에 있는 도시라 꽤 어울리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여행갔던 앙코르와트의 유적에는 돌로 조각된 나가가 꽤 많았다.

 

3. 눈물을 마시는 새

눈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빨리 죽는다고 한다. 몸에는 해로워서 모두 흘려버리는 것을 마시니 오래 살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세계관에서 눈물을 마시는 새는 곧 왕을 뜻한다.

모든 사람들의 원망이나 소망 따위를 받아내는 존재를 이 책에서는 진정한 왕이라고 하는 것 같다. 

왕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아니다. 

솔직히 읽으면서 그래서 왕이 왜 중요한데?? 라는 생각을 계속 했다. 

여전히 왜 사모페이가 왕이 되어야 하는지, 그것이 이야기에서 왜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4.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이야기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

세계관의 모두가 알고있는 오랜 격언 같은 것으로, 한 종족을 상대하려면 다른 세 종족이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격언은 현실의 물리 법칙처럼 이야기의 세계관에서 단단하게 작용하는 규칙이다.

말 그자체로 멋지기도 하지만, 이런 부분 때문에 세계관이 더욱 치밀하게 느껴졌다.

판타지는 작가의 상상을 마음대로 그려내기 때문에 쓰기 쉬울 것 같지만

오히려 정해져있는 규칙이 없으므로 어설퍼지기 십상이다.

이런 규칙 덕분에 이야기는 작가의 어설픈 망상이 아닌, 어딘가에 실존하는 견고한 세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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