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브레터(1995)
- 영화록
- 2022. 12. 15. 00:51
이와이 슌지 감독의 1995년작 러브레터를 보았다
제목만 보고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는데
지고지순하게 사랑을 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는 다르다고 느꼈다
로맨스 장르를 기대하고 영화를 보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러브레터는 오히려 상실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기 성장을 이루는 두 여자의 이야기이다
물론 그 극복의 과정에는 사랑 이야기도 나오지만, 사랑이 메인이 아님은 분명하다
마치 러브레터인줄 알고 받았지만 아니었던 편지처럼, 이 영화도 겉보기에는 로맨스같지만 실은 성장영화다
히로코는 3년전 죽은 연인 이츠키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의 기일에 펼쳐본 졸업 앨범에서 히로코는 이츠키의 옛 주소를 찾고,
무슨 마음인지 그 주소로 편지를 한 장 부친다
편지는 눈덮힌 오타루의 한 고즈넉한 주택에 도착해서 후지이 이츠키의 손에 들어온다
죽은 연인인 이츠키(남)와는 다른 이츠키(여)다
동명이인이라는 소재와 1인 2역이라는 설정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헷갈려서 열심히 추리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츠키(여)는 다짜고짜 잘 지내냐는 내용이 적혀있는 영문모를 편지가
자신에게 잘못 온 것임을 알고있지만, 장난삼아 답장을 보낸다
잘 지내지만 감기에 걸려있다고
이츠키는 좀처럼 낫지 않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있다
그의 아버지는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되어 돌아가셨다
그러니 감기는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영화에서 아버지와의 상징적인 연결점이 있는 듯 하다
그 연결점이 어떤 것인지는 각자 다른 짐작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기를 나으려면 병원에 가야하는데, 이츠키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장소인 병원이 너무나 무섭다
감기가 나을 턱이 없다
이츠키의 편지에, 히로코는 당연히 깜짝 놀란다
답장을 바라지 않고 쓴 편지에 답장이라니!
뭔가 수상하지만 히로코는 죽은 연인의 일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어쩌면 천국에서 편지가 온 걸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렇게 히로코와 이츠키는 몇 차례 편지를 주고 받는다
편지는 늘 "하이케 ....사마"라는 말로 시작한다
한국어로는 "....님께"라는 뜻인데, 또랑또랑한 말투로 하이케라고 또박또박 읽는 느낌이 명랑하다
그러다가 히로코의 현재 연인 미만 친구 이상쯤 되는 남자가 편지가 오는 오타루에 가보자고 한다
후지이 이츠키의 정체를 밝혀야만 한다면서!
이 남자는 히로코를 사랑하는데, 히로코가 이츠키(남)를 잊지 못해서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는데 항상 안달이 나있다
말투가 뭔가 거칠고 히로코한테 자꾸 이거하자 저거하자 주장해서 왠지 재수없다
히로코와 남자는 오타루에 있는 정체불명의 이츠키를 찾으러 가는데, 결국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히로코가 이츠키에게 남긴 편지를 통해서, 둘은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풀게되고
이츠키는 히로코에게 자신이 이츠키(남)의 중학교 동창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며 그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해준다
이츠키(여)와 이츠키(남)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사귀라며 아이들이 놀려대는 탓에 친해질 겨를도 없이
서로 불편함만 가득한 사이였다
둘은 도서관을 관리하는 일을 했는데, 이때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책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어렵고 재미없는 책의 대출카드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취미인 이츠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역시 그의 취미의 대상이 된다
책에서 마르셀은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 먹다가, 그 맛을 느꼈던 아득한 과거의 기억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감각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하는데,
이 영화에서 프루스트 효과를 유발하는 것은 바로 영화 제목이기도 한 러브레터다
편지 한 장으로 잊고있었던 과거의 기억을 서서히 되찾는 것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기억'의 역할이다
보통 과거의 아픈 기억들은 잊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영화는 기억을 들춰내고 상처에 다시 맞서게 한다
연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상처를 품고 있는 히로코는 그가 죽은 산에 가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친다
히로코는 늘 이츠키를 마주하기를 두려워했다
그의 죽음을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이, 기일에도 끝까지 남는 대신 집에 돌아오고
오타루에서 이츠키를 만나기 직전에 자신은 하지 못할 것 같다며 망설인다
그만큼 히로코에게 이츠키(남)는 너무나 큰 존재라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어렵게 느끼는 듯하다
마침내 이츠키가 죽은 산에 가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설산에 안부를 묻는 히로코
그의 모습은 깊은 슬픔을 담고 있으면서도 후련해보인다
감기로 아버지를 잃은 이츠키의 가족들은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보인다
할아버지는 조금 정신이 오락가락한 것으로, 어머니는 옛 집을 버리고 새 아파트로 이사가려는 것으로, 이츠키에게는 끝나지 않는 감기로 나타난다
어느 폭설이 내리는 날, 이츠키는 고열 때문에 쓰러져 버린다
눈 때문에 구급차는 최소 한시간이 걸린다
아버지때와 너무도 똑같은 상황에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은 지경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도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체되어 아버지는 결국 살아나지 못했다
'이번에도 똑같으면 어떡하지?'
미칠 것 같은 불안감이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엄습한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손녀를 업고 병원까지 뛰어가겠다고 우긴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설득을 하면서
하지만 어머니는 이번에는 딸을 잃을까봐 할아버지에 반대한다
치열한 갈등 끝에 결국 어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설득되어 병원까지 40분의 달림박질 여정을 함께하게 된다
영화에서 가장 긴박한 장면이다
할아버지가 지쳐서 눈밭에 대자로 쓰러져버리는 장면은 코믹하면서도 너무 슬프다
이번에는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겠다는 결의...
그것은 아들을 살리지 못했다는, 심지어는 아들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에 기인한 것일테다
결국 할아버지의 초인적인 집념으로 병원에 40분도 아닌 38분만에 도착한 일행
이번에는 이츠키를 살렸다는 안도감에 가족 모두가 긴장이 풀린다
또 다른 죽음의 목전에서 다 함께 이츠키를 살려낸 가족들은 비로소 아버지 죽음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 제목은 영화의 주요 테마를 관통하는 셈이다
고통스러워서 차마 마주하지 못했던 과거를 다시 마주한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따가운 소독약을 바르고 살을 꿰어 봉합해야한다
아픈 과정이지만 하지 않으면 상처가 서서히 곪아버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과거는 잊고 새로운 삶을 살자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러브레터의 작동기제는 아플지라도 잊고있던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성장하는 것이다
과거의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 현재의 나를 사랑할 수 없다
두 여자의 성장통에 함께 울고 또 웃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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