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건강법(1992)

아멜리 노통의 살인자의 건강법을 읽었다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대담하고 긴장감 넘치는 작품이었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괴팍하기로 유명한 한 작가가 희귀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극 소수의 기자들에게 인터뷰를 허락한다

이 작가는 인간혐오자로 유명하며 논쟁으로 상대를 너덜너덜하게 녹다운시키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다

심각한 비만에 잘 씻지 않아서 역겨운 냄새가 나고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 대해 성희롱을 일삼는 그야말로 혐오스러운 인간.

묘사만으로도 혐오스러운 이 작가를 인터뷰하는데 남기자들 여럿이 줄줄이 실패하는데,

이들은 작가의 헛소리에 무엇인가 의미가 있다고 믿으며 이를 캐내려다가 결국 작가 페이스에 끌려다니며 인터뷰를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인터뷰를 이미 마친 기자들이 입을 모아 이 작가는 끔찍하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아직 인터뷰를 하지 않은 기자들은 자신이라면 위대한 작가와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그리고 또 실패함)

유일하게 인터뷰다운 인터뷰를 하는데 성공하는 여기자 니나.

여성혐오자이기도 한 작가는 어떻게 여자가 자신을 인터뷰할 수 있느냐고 길길이 날뛰지만, 이미 작가의 본성을 간파한 니나는 작가에게 말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대담을 이끌어간다

거의 모든 장면이 대화체로 이어지는데, 서로 한마디를 안진다

그런 치열한 대담 속에서 작가의 과거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는 그런 내용

 

작가의 비밀은 그의 미완성 작품 <살인자의 건강법>에 숨어있다

작가의 유년시절 그는 사촌누이와 사랑에 빠져,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기로 맹세했다

둘은 2차 성징이 오지 않도록 극도로 적게 먹어서 성장을 늦추고, 하루 종일 물 속에 잠겨서 수영만 한다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한 둘만의 '건강법'이다

작가에 따르면 그들은 2차 성징이 시작되는 것을 배신이라고 보고, 배신한 사람을 다른 한 사람이 죽이기로 했다

물론 누이도 정말 그 발상에 동의했는지는 알 수 없음을 니나는 지적한다

둘 만의 기묘한 건강법을 실천하며 지내던 17살의 어느 날, 사촌누이의 초경이 시작됐다

작가는 그 즉시 사촌누이를 살해한다

듣기만 해도 역해지는 기괴한 이야기에 작가는 의미부여를 하며 영원이라는둥 진정한 사랑이라는둥 말을 하는데,

어쩐지 이 광경은 내로라하는 기성작가들의 소설이 떠오르게 한다

죄와 벌, 이방인, 적과 흑... 죄다 백인 남자가 약자를 살해(혹은 살인미수)하고 살인에 온갖 의미부여하는 내용 아닌가

문학적 완성도나 작품의 철학적 메시지를 떠나서, 솔직히 읽을 때마다 어쩌라고 싶었음

따지고 보면 이방인에서 제일 불쌍한 건 난데없이 총맞아 죽은 아랍인이지 감옥가서 징징대는 뫼르소가 아니다

책은 니나의 입을 빌려 작가의 끊임없는 의미부여 시도를 차단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문학을 통해 약자혐오를 일삼아놓고 갖은 의미부여를 하면서 정당화하고 예술로 찬양받는 수많은 작가들 귓싸대기를 팍 때리는 느낌이랄까

어릴 적 유명한 문학들을 읽으면서 이 집착적인 섹스타령과 가슴타령에는 대체 무슨 깊은 어른스러운 의미가 숨어있는 걸까 고민을 했었다

다 크고나서야 깨달았는데 거기에는 그냥 아무 의미도 없었다 작가들의 불필요한 성욕 전시일 뿐이었음

작품 초반에 작가와의 난해한 인터뷰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남기자들의 시도는 끊임없이 실패로 끝나는데, 마치 어릴 적 책을 읽으면서 고민하던 나의 모습 같았다

니나라는 캐릭터는 헛소리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애써 해석해주는 권위주의에 찌든 문학계를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책에서 가장 통쾌했던 장면은 마지막 즈음에 나온다

작가는 자신의 모든 과거를 꿰고 있는 니나가 자신과 어떤 혈연관계가 있어 복수를 하러 온 것이라 짐작한다

나 또한 읽으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고

그런데 알고보니 니나는 정말 작가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고 그냥 작가 엿먹이러 온거다

자신이 처한 위기에 서사를 부여해서 낭만화하려는 첫번째 시도가 실패하자, 작가는 갑자기 니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상황에 서사를 부여하려는 두번째 시도였다

 

"제가 선생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게 밝혀지자 낙담하시더니, 이제는 억지로 관계를 만들어내려 하시네요. 다급하게 사랑 이야기를 지어내려 하신다고요. 선생님께선 무의미한 것을 열렬히 증오하는 분이셔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만 있다면 어떤 거짓말도 불사하실 겁니다."

 

문학에서는 등장하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1장에 총이 등장하면 3장에서는 발사되어야한다는 격언처럼, 의미없이 등장하는 요소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선 그냥 이유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사실을 깨우쳐주자 작가는 정말인지 견딜 수 없어 하는데, 어차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작가에게는 최고의 복수이다

문학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참신한 발상이 근사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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