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록

팬텀스레드(2017)

구하구하 2023. 3. 21. 15:49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팬텀스레드를 봤다

주로 PTA라고 불리는 이 감독은 괴랄하지만 취향에 맞는 사람은 또 엄청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 걸로 유명하다

예전에 궁금해서 펀치 드렁크 러브라는 영화를 봤는데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를 내용이라 당황스러웠다

이번이 PTA의 영화 두번째 시도인데 팬텀스레드는 펀치 드렁크 러브보다는 '비교적' 대중적인 스타일 같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대중적이란 거지 절대 모두에게 먹힐 스타일의 영화는 아니다

팬텀스레드는 소위 교양 변태(ex: 박찬욱)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꽤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음

 

남주인공 레이놀즈 우드콕은 런던에서 잘나가는 의상실을 가지고 있는 미중년(노년?) 디자이너로, 젊은 여자를 주기적으로 갈아치우며 독신으로 산다

그러다가 전 여자에 질려서 새로운 애인을 꼬시는데 이 사람이 여주인공인 알마 엘슨.

수줍으면서도 강단있는 성격인 알마 역시 레이놀즈가 마음에 드는지 순순히 따라온다

처음엔 세상을 다 줄 것처럼 굴던 레이놀즈는 제 버릇 못버리고 알마에게 또 지랄을 떨기 시작하는데

나가 떨어져버리던 다른 여자들과 달리 알마는 레이놀즈보다 더한 인간이다

알마한테 지랄떨면서 상처주는 말을 하면 알마는 조용히 뒷산에 가서 독버섯을 캐서 레이놀즈한테 몰래 먹인다

그럼 레이놀즈는 죽다가 살아나서 알마한테 아기처럼 의존하는데, 알마는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의 레이놀즈가 무척 마음에 드는 듯하다

더 어이없는 것은 레이놀즈도 이 관계를 좋아한다는 것

그냥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영화상에서 레이놀즈는 진짜 마조히스트가 맞음

장난이 아니라 정말 변태들의 사랑이고.. 보다보면 아름답다기보다는 이 미친놈년들이 어디까지하나보자 이런 시각으로 흥미롭게 지켜보게 된다

막판까지 가면 둘의 변태스러움에 완전히 질려버림

 

레이놀즈는 정해진 일상의 루틴을 절대 벗어나면 안되는 사람이다

애인이 깜짝 이벤트를 해주는 것에 마저 극도의 혐오감을 나타내는 놈이다

예술가다운 지랄맞은 예민함으로 주변 사람들을 달달 볶아대는데 그걸 받아주는 사람만 결국 곁에 남는 인생을 아주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런데 알마는 설설 기면서 레이놀즈 눈치를 보아 왔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맘에 안들면 그냥 맘에 안든다고 하는 사람이다

평온한 레이놀즈의 삶에 닥쳐온 거대한 해일같은 존재인거다

알마의 레이놀즈를 향한 사랑은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맹목적인 것인데, 그 안에 맹목적인 순종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다

맹목적이지만 애인이 맘에 안드는 짓을 하면 들이받아버리는 저돌적인 성향

다른 영화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여성 캐릭터라서 재밌었다

근데 레이놀즈는 또 막상 알마가 이런 짓을 해주니까 생각보다 취향임 

다른 사람 만나지 말고 서로 영원히 사랑해야 하는 위험한 커플이다...

 

흥미로운건 이 염병스러운 새디스트와 마조히스트의 사랑이 너무나 섬세하고 정교한 미쟝센과 음악으로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있단 것이다

추잡스러운 내용과 아름다운 껍데기에서 오는 괴리감이 재미있다

우드콕의 테마 멜로디가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데 우드콕 특유의 질서정연한 세계를 잘 표현한 것 같다

알마가 입고 나오는 레이놀즈의 드레스들도 정말 아름다움

레이놀즈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유행이나 변화를 혐오한다

일상의 아주 작은 변화에도 민감한 우드콕다운 디자인을 하는 셈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런 모든 요소가 인물들의 개성을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좋았다

 

영화가 너무 변태스러워서 명작, 세기의 아름다운 사랑! 이런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는 않고

우아한 손길로 만들어낸 그들만의 염병 정도로 정의하고 싶다

어떻게 보면 로맨틱 코미디가 따로 없었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