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투게더(1997)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를 봤다
기빨리는 내용일 것 같아서 안보고 미뤄두기를 어언 300년....
어쨌든 양조위와 장국영이 나오는데 안보는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영화는 생각외로 전혀 안잔잔하고 도파민 폭발하는 자극적인 내용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양조위랑 장국영이 연인인데 둘이 끊임없이 깨어졌다 붙었다 하는 내용
어떻게 보면 팬픽감성인데 또 어떻게 보면 무지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들같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보영(장국영)과 아휘(양조위)의 강렬한 베드신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 이런 영화니까 싫으면 보지 말라는 선전포고같다(정작 그뒤로는 베드신이 안나오지만)
연인인 그들은 대책없이 홍콩을 떠나 아르헨티나로 가서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간다
하지만 차는 고물인데다, GPS도 네비게이션도 없는 시대라 자꾸 딴길로 헤맨다
가장 문제인건 보영이다 뭐든 아휘가 다 하도록 시켜놓고 불평만 하는 보영은 최악의 길동무다
설상가상으로 차가 퍼져서 아휘가 차를 밀도록 시킨 뒤에 한참을 차를 타고 가버린다
완전히 가버린게 아니고 가다가 멈춘게 어디인가 싶지만, 그게 오히려 더 열받기도 함
왜 서로 싸웠을때 장난이랍시고 한 행동이 더 서운한 거 있잖음
하여튼 둘은 결국 이과수 폭포에 도달하지 못하고 헤어진다
헤어진 이후 아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싸구려 탱고바에서 호객꾼일을 한다
홍콩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티켓을 살 돈도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비참한 원룸에서 쪼들리며 돈을 모은다
나오는 풍경이라고는 하나같이 후줄구레한 뒷골목인데 왕가위 렌즈 뒤에서는 그것조차 분위기 있어 보이니 신기한 노릇이다
엉망진창 인생을 수습하려고 노력하는 아휘 앞에 야속하게도 다시 보영이 나타난다
그것도 연인이라기보단 물주처럼 보이는 남자를 옆에 낀 채로
보영은 아휘와 정반대의 성향이다
절망속에서도 어떻게든 계획을 세우고 미래를 생각하는 아휘와 달리 보영은 현재의 쾌락만을 쫓는 사람이다
MBTI로 치면 J형과 P형의 최악의 조합이다
아휘는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보영을 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생각대로 될 턱이 있나
아휘가 마음 굳게 먹어봤자 맞아터진채로 나타난 보영 얼굴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결국 아휘는 다친 보영을 돌봐주고 먹여주며 동거를 시작한다
가만 내버려두면 어디가서 혼자 죽어버릴 것같은 이 위태로운 남자를 아휘가 무슨 수로 내버려 둘 수 있을까
정말 상처인건 보영이 아휘가 자신을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그걸 이용한다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보영이 아파서 아휘를 떠날 수 없을 때 아휘는 가장 행복감을 느낀다
그야말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들
보영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다 아휘를 사랑하지만 습관적으로 아휘에게 상처주는 일을 한다
아휘는 보영을 사랑하는 것이 최악의 선택임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영화는 크게 보면 아휘의 성장영화기도 하다
보영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려고 한다
그런데 성장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최악의 상황에서 이상하게 행복감을 느낄 때도 있다
보영과 아휘는 함께할 때 가장 행복하지만 그건 그들의 관계가 건전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건전한 관계가 반드시 최상의 행복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보영과 아휘가 함께 탱고를 추는 장면은 그런 모순적인 행복의 극치다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은 위태롭고 둘은 절망적인데 서로를 너무나 사랑한다
후줄근한 나시며 남방을 입고서 지저분한 빌라 구석에서 추는 탱고가 그렇게 아름답다
영화의 재밌는 점은 보영이 망나니긴 하지만 또 그렇게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휘가 착하지만 또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부분이다
보영이 정말 열받는 건 아휘를 사랑하면서 자꾸 그따위로 행동을 한단거다
온갖 일탈은 다 저지르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면서 천사같은 얼굴로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용서하게 만든다
아휘는 보영이 다쳐서 왔을 때 속으로 그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영의 여권을 충동적으로 숨겨버리기도 한다
아휘의 소심한 반항은 결국 파국을 불러온다
보영은 여권을 내놓으라고 난장판을 만들고, 아휘는 그 모습에 속이 상한다
여권을 달라는 건 자신을 언제든지 떠나겠다는 선언이 아닌가
그렇게 둘의 동거는 끝나버린다
영화에서 가장 눈물 났던 장면은 둘이 헤어진 후 아휘가 녹음기를 들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우는 부분이다
주위에 아무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차마 말을 못한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시작하면 모조리 쏟아질까봐 억눌러 담는 것 같기도 하다
아휘는 그 녹음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꼭 <화양연화>마지막에 양조위가 앙코르와트의 어느 기둥에 자기 비밀을 털어놓는 장면이 떠오른다
못다한 말이 많은 양조위는 왕가위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테마다
보영과 아휘가 헤어진 후, 아휘는 홍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된 일을 하며 돈을 모은다
보영이 없는 아휘의 삶은 외롭고 행복하지 않지만 그것만이 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유일한 방법이다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은 삶의 아이러니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끊임없이 잘못된 선택을 할까?
왜냐하면 '해피투게더'라는 제목처럼 같이 있으면 행복하니깐
그 관계가 자신의 삶을 파멸로 몰고갈지라도 행복하니까
삶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아서 가끔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공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나는 아휘가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히 이과수 폭포로 갈 계획을 세우는 부분이 너무 슬펐다
보영과의 관계가 마치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는 평범한 관계인 것처럼,
든든한 연인처럼 그를 데리고 갈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혼자 너무나 행복해한다
함께 웃으며 여행을 할 미래는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외면하면서 최면을 걸듯이 말이다
보영이 사온 이과수 폭포가 그려진 스탠드의 두 사람처럼 그 곳에 함께 가는 것을 꿈꾸며 아휘는 얼마나 행복해 했나
스탠드 그림에는 두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결국 그 곳에 간 건 아휘 혼자였다
스탠드에 그려진 모습은 평온하고 아름다웠는데 막상 혼자 도착한 폭포는 아름답다기보다는 거대하고 파괴적이다
폭포에서 물이 눈도 못뜰 정도로 튀는데, 좀 뻔한 비유지만 아휘의 슬픔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휘의 말로 다 못할 슬픔이 거대한 폭포로 쏟아져내리는 것 같다
아휘가 진짜 폭포에 가있을때, 보영은 아휘가 없는 아휘의 방에 찾아와 폭포 스탠드를 멍하니 바라본다
폭포 앞에 있는 두 사람의 그림이 눈에 띈다
아휘는 이걸 해보고 싶었구나 문뜩 깨닫는다 뒤늦게 후회와 그리움이 몰려온다
악착같이 일해서 비행기 삯을 다 모은 아휘는 다 털고 홍콩으로 돌아간다
홍콩에 가기 전에 대만에 들러,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친구로 지냈던 장의 부모님 가게를 찾아가본다
장과 아휘는 중식당에서 같이 일했던 사이인데 외로운 타지 생활에서 서로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다
장은 왕가위 특유의 디테일이 묻어나는 캐릭터인데, 어렸을 때 눈이 좋지 않아서 소리를 아주 잘 듣는다는 설정이다
아휘가 전화하는 소리를 듣고 그에게 흥미를 가진다
영화 내에서 명확하게 장과 아휘의 관계를 정의내릴 단서는 없지만 뭔가 느낌상으로 서로를 좋아했던 것 같다
특히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눌 때 포옹하는게 묘하다
아휘가 장을 보러 대만에 갔던 것은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여지와 함께 그의 성장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상처만 주는 파괴적인 사랑을 떠나 이제는 조금 더 성숙하고 안정된 사랑을 할 준비가 된 것같다
하지만 그는 이제 행복할까? 마지막 부분을 보는데 끊임없이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보낸 한철이 대만의 화려한 야경 속에서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흐릿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