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패자의 생명사(2022)

구하구하 2023. 3. 7. 17:20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패자의 생명사>를 읽었다

내가 책 중에 가장 좋아하는 분야는 역시나 문학이지만 생명과학 책도 가끔 읽으면 재밌다

살다보면 익숙한 관점으로만 생각하다 보니까 머리가 굳는 기분인데, 생명과학이야말로 가장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기본적으로 생명과학은 인간편의중심적인 오류를 지적하고 다른 생명의 관점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나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자의식 과잉'을 치료하고 건강한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생각을 환기해주는 역할이다

 

<패자의 생명사>는 지구 생물들의 진화과정을 쉽게 풀어쓴 책인데, 다만 관점에 있어서 차별점을 둔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꼭 더 강하고 큰 생명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책에서 나온 내용으로 예를 들자면, 포유류는 공룡들이 전성기를 누릴 때 작은 몸집으로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겨우 살아남은 생물이었다

반면 공룡들은 끊임없는 크기 경쟁을 통해 거대한 몸집을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지상을 지배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운석충돌에 의해 척박한 환경이 된 지구에서 거대한 공룡들은 필요한 열량을 채우기 힘들어 멸종하고 말았다

몸집이 작은 포유류는 살아남는데 많은 먹이가 필요하지 않았다

포유류는 살아남아 공룡이 모두 멸종한 지상에서 번성했다

저자는 이런 것을 두고 '패자의 승리'라고 말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냥 환경에 적응하는 쪽이 살아남는다는게 정확한 말이지 않을까 싶다

그치만 '패자의 승리' 쪽이 좀 더 드라마틱한 맛이 있으니까 그렇게 쓴 이유도 이해가 간다

 

저자가 식물학자라서 그런지 동물 이야기보단 식물 이야기가 디테일이 있고 재밌다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을 하나 꼽자면, 풀이 나무보다 더 진화된 형태라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나무가 훨씬 크고 복잡하게 생겼으니 나무가 후에 진화했을 것 같은데 사실은 반대다

나무는 위로 쑥쑥 자라서 초식동물의 피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만약 영양분과 물이 충분하지 않은 혹독한 환경에 있다면, 성장속도가 몹시 느려서 성장하기도 전에 동물에게 잡아먹힐 수 있다

몇십년에서 몇천년까지도 살아가는 나무와 달리 풀은 한해살이나 여러해살이 정도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짧은 삶을 살아가는 풀은 하찮아보인다 

하지만 풀은 혹독한 계절을 대비하는데 자신의 에너지를 쓰지 않는 대신, 빠른 사이클로 번식을 한다

개별 개체의 수명은 짧지만 종 전체는 몇천년이고 가는 셈이다

생존을 위해서 오히려 수명을 줄이고 구조를 단순화 시켰다는게 재밌다

 

풀 중에서 특히 벼같은 종류는 생장점이 줄기 위쪽이 아니라 아래쪽에 있다고 한다

생장점이 위쪽에 있는 경우 식물은 끊임없이 새로운 줄기를 뻗어나가며 키가 클 수 있지만 동시에 초식동물에게 먹혀 생장점이 파괴될 경우에는 더이상 새롭게 자라날 수 없어 죽게된다

그야말로 하나를 내주고 하나를 얻어가는 셈이다

벼같은 경우는 생장점이 아래에 있기 때문에 키가 크는데는 제한이 있지만 초식동물에게 먹혀도 아래의 생장점만 살아있으면 끊임없이 재생이 가능하다

저자가 책에서 강조하는 부분이 생존은 '넘버원'이 아닌 '온리원'이 한다는 것이었다

꼭 최강의 동물이나 식물이 되는 것이 방법이 아니라, 자신만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마치 온앤오프 노래 가사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생물들처럼 온앤오프도 1군 탑 아이돌은 아닐지라도 자신들만의 색깔로 대체불가능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가 보면 또 기회가 오는거다 별볼일없는 소동물이었던 포유류가 지상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 것처럼

 

솔직히 "자연에는 모든 답이 있다"라는 식의 얘기는 별로 안좋아한다

그건 "인간이 우월하다" 만큼이나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이 책도 좀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서, 메시지가 그다지 세련되지는 않다

글의 호흡도 너무 짧다 조금 집중하려고 하면 어느새 끝나버린다

과학서적은 저자가 내놓는 이론을 근거 체크하면서 치열하게 머릿속으로 다투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그런 맛은 하나도 없다... 

아무래도 책의 가독성을 위해서 근거의 디테일을 와장창 잘라먹은 것 같다

물론 짧고 쉽게 읽히며, 메시지도 단순하다는 점을 오히려 매력으로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같다

명작이라고 하긴 뭐한 책이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관점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