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들(2019)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을 읽었다
<증언들>은 <시녀이야기>의 후속작으로, 전작에서는 시녀 오브프레드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아주머니' 계급을 전면에 등장시켜 독자들에게 길리어드라는 국가의 속사정을 조금 더 깊이 보여준다
또한 전작에서 여성 혐오의 답답한 현실을 디스토피아 세계관으로 풀어냈다면,
<증언들>은 제도화된 여성 혐오를 넘어서기 위한 여성들의 연대를 벅차게 보여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전작의 고구마를 뛰어넘는 사이다가 있다고나 할까
<시녀이야기>가 쓰여진 1985년의 사회적 분위기와는 확실히 많이 달라진 세태의 반영이 있는 것 같다
절망적 전망 대신 희망과 연대에 대한 여성들의 욕구가 느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사라졌던 낙태죄가 다시 부활하는 등 오히려 '길리어드'처럼 퇴보한 모습도 있으니 아이러니 하다
작품은 세 여성의 증언을 담고 있다
전작에서 다른 여성들을 탄압하는 철혈의 '아주머니' 계급으로 등장하는 리디아 아주머니,
사령관의 딸로 태어났지만 '아내'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아주머니가 된 아그네스,
캐나다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열여섯 생일에 자신이 알던 세상이 뒤바뀌게 되는 데이지
같은 여성을 박해하는 '나쁜 년'이었던 리디아 아주머니가 반전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 가장 재밌었다
<시녀이야기>에서는 여성들간의 분열과 시기, 질투가 꽤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아내는 남편과 대신 성행위를 하는 시녀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아주머니들은 다른 모든 여성을 잔혹하게 탄압한다
물론 그러한 분열이 일어날 수 밖에 없도록 여성들의 소통을 금지하고 서로를 감시하는 분위기 또한 잘 묘사되어 있어 납득이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 사회가 세뇌 수준으로 질투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이미 만들고 있는데 페미니즘 소설에서까지 이런 묘사를 봐야할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었다
내 생각에는 작가도 후에 그러한 아쉬움을 가지고 <증언들>을 써내려 갔던 것 같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겉으로는 남성권력에 기생하며 권세를 누리는 중년여성이지만, 사실은 지하 여성 단체인 메이데이와 몰래 내통하는 스파이의 역할도 하고 있다
무간도 같은 언더커버물인 셈이다
길리어드를 설립한 사령관 남성들은 공포와 무력만으로는 여성들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부 여성들을 '아주머니'로 포섭하여 여성들을 내면에서부터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여러가지 규율을 만들도록 한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길리어드 건국 이전에는 판사로 일했지만, 자신앞에 죽음 혹은 사령관들과의 협력만이 놓이자 협력을 선택한 인물이다
일단 첫발을 내디디면, 그 결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다음 발을 내딛게 된다. 우리가 사는 이런 시대에는 방향이 딱 두 개밖에 없다. 위로 올라가거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그는 긴 세월동안 길리어드에 충성하며 물밑에서 온갖 더러운 일에 손을 대며 국가의 존속에 기여한다
사령관들의 더러운 뒷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수집하며 길리어드의 종말을 계획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채 말이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자신이 저질러온 악행들에 대해 변호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아그네스가 증언하는 사령관 딸의 삶은 초반에는 마치 행복한 삶처럼 보인다
태어날 때부터 순종의 미덕을 주입당한 소녀들은 자신의 삶에 꽤 만족하며 살아가는 듯하다
그들은 하녀를 거느리고 보살핌을 받으며 학교에도 다닌다
하지만 평범한 듯이 증언하는 일상 곳곳에는 기괴함이 엿보인다
여성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집을 지키고 있는 '천사'들, 여성에게 글이나 학문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 학교
배를 갈라 아기를 꺼내고 죽음을 맞이한 시녀
결정적으로 어린나이에 늙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정해지자 아그네스는 참을 수 없어진다
전작에서 특권 계층으로 그려졌던 '아내' 계급 또한 말도 안되는 조혼풍습과 순종의 의무로 억압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봉건 사회에서
아그네스는 결국 결혼시장에서 이탈하여 아주머니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아주머니들이 생활하는 아르두아 홀에서 리디아 아주머니와 데이지를 만나게 된다
데이지는 주인공스러운 설정을 다 가지고 있는 캐릭터다
길리어드에서 십몇년전에 아기를 데리고 탈출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아기 니콜
아기 니콜은 길리어드 반대자들 사이에서는 저항과 자유의 상징이고
길리어드 측에서는 납치당한 불행한 아기로, 아기 성자 취급이다
길리어드 요원들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한 이 아기를 찾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데이지의 열여섯번째 생일에 부모님이 상당히 의문스러운 사고로 사망하고
그는 자신의 세계가 송두리채 바뀌는 한 마디를 듣는다 "네가 아기 니콜이란다"
마치 해리포터에서 해리가 "넌 마법사란다 해리"를 듣는 장면과 비슷하달까
물론 해리는 학대로 얼룩진 프리벳가에서 벗어나 마법학교에서 멋진 모험을 시작하지만
데이지는 자신의 양부모를 잃고 생명을 위협받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모험을 떠난다는 서사 구조는 전형적인 것이지만 아는 맛이 더 맛있다고 상당히 재미있다
이렇게 해서 작가는 전작에서 독자가 궁금해했던 설정들에 대한 설명을 다 내놓는다
아주머니 계급과 아내 계급, 지하여성조직 메이데이와 길리어드 국외의 상황까지
초반에는 서로 상관없어보이던 세 인물의 이야기가 얽히고 섥히며 종장을 향해 달려간다
보통 메시지가 지나치게 선명해지면 이야기가 촌스럽고 유치해지는데, <증언들>에는 해당이 안되는 이야기다
세련되게 잘 닦인 서사와 정말 길리어드라는 나라가 실존하지 않는지 착각하게 만드는 생생한 캐릭터들
글빨은 또 얼마나 좋은지 후반부에서는 눈물을 끊임없이 닦으며 읽었다
600페이지짜리를 쉼없이 읽도록 만드는 작가의 저력에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