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록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2)

구하구하 2023. 1. 25. 14:37

 

화제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왔다

보고 온 친구들 마다 불타오르길래 대체 어떤 영환가 싶어서 별 생각 없이 봤는데

나도 불타오르게 돼버림... 

스포츠물을 별로 좋아해본적이 없는 나도 정말 재미있게 봤다

조목조목 따져봐도 어디하나 흠잡을데 없이 완성도 높게 만들어진 수작이다

농구를 소재로 한 작품 답게 농구 경기 연출에 있어서 알못이 봐도 디테일이 정말 뛰어나고 

실제 경기를 보는 것 마냥 가슴이 뛰도록 장난없게 만들었다

캐릭터별로 체형이나 근육의 묘사가 디테일하게 차이나고 움직임 스타일이나 습관까지 구현해냈다

집착적일정도로 공을 들였고, 중간 중간 깨알같은 선수들의 세레모니같은 것도 재밌었다

 

경기 연출이 작품에서 가장 걸출한 부분임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요소가 빠지는 것도 아니다

각 캐릭터의 매력과 서사가 짜임새있게 경기 중간중간 들어가 있어서 처음 접하는 사람도 푹 빠질 수 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신파로 가거나 뇌절하지도 않고 적당한 감동 코드를 넣어서 담백하게 경기 장면이랑 어우러진다

나는 원작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이 보러 가서 원래 송태섭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원래 원작에는 거의 서사가 없다시피 한 송태섭이라는 캐릭터를 주축으로 새롭게 극장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참 도전적인 시도인게 사실 원작 주인공 냅두고 다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써서 좋은 말 듣기가 쉽지 않다

자칫하면 원작의 인기 캐릭터들이 찬밥신세라는 팬들의 분노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원작에는 없던 오리지널 스토리로 신선함을 주면서, 다른 캐릭터들의 매력도 충분히 살렸다

나는 보면서 강백호가 제일 좋았는데 얘가 원래 주인공인 줄 몰랐음 ㅋㅋㅋㅋ

 

극장판의 장점을 논할 때 음악과 사운드가 빠지면 섭하다 

배경 음악은 따지고 보면 그렇게 많이 나오지도 않고, 대부분은 코트 위에서 뜀박질 하는 소리와 탕탕탕탕 드리블 소리만 많이 나지만 적재적소에 쓰여서 나올 때마다 강렬한 인상을 준다

특히 오프닝은... 그냥 미쳤다 한 오천원주고 오프닝만 다시 보고 나오고 싶다

종이에 연필로 러프하게 주전 선수들 한명한명이 스케치 되면서 낮은 프레임의 애니메이션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할 때

귀를 쨍하게 울리는 드럼소리로 오프닝 음악이 심장을 울린다

시청각적으로 너무나 만족스러운 동시에, 원작 팬들이었다면 종이 속에 있던 북산고 캐릭터들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전율에 몸을 떨었을 듯 하다(물론 TV판 애니메이션이 이미 존재하긴 하지만)

또 음악이 좋았던 부분은 바로 "송태섭 뚫어!!!" 부분

농구선수치고 매우 불리한 168의 체격을 가진 송태섭이 상대팀 세 명에게 둘러쌓여 존 프레스를 당하는데

어찌할 수 없이 답이 안보이는 그 순간에 그를 응원하는 "송태섭 뚫어!"라는 목소리와 함께 장벽을 뚫고 질주하는 부분

속도감과 역동성이 장난이 아니다

쬐끄맣고 야무진 녀석이 폭발적인 스피드로 상대팀을 돌파하는 이 장면을 보면 송태섭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됨

이 장면과 너무나 찰떡같이 쨍하고 거친 락 사운드가 플레이 되는데 햐... 

경기 중간중간 회상으로 나오는 송태섭의 우울하고 정적인 과거사가 마치 상대팀의 존 프레스처럼 느껴지면서

농구의 수비를 돌파하는 동시에 자신의 트라우마를 깨고 나오는 위대한 서사로 읽히는 거다

 

하여간에 정말 영화를 재밌게 봤는데 하나 걸렸던 부분은 송태섭의 가족사...?

빻았다기 보다는 그냥 아시아의 가부장제가 참 잘 재현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태섭네 가족은 일찍 아버지를 잃는데, 이 때 슬픔에 잠겨있는 어머니에게 태섭의 형인 준섭이 다가가 "이제 제가 우리집의 주장이 될게요."라고 말한다

주장이 된다는 말은 즉, 집안 가장 자리의 승계

준섭과 태섭은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지켜드려야 한다며 단단해지기로 마음 먹는다

참 기특한 아들들이긴 한데 좀 걸리는 부분이 있는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어머니에게 그 권력이 가는게 아니라

아들에게로 돌아가는것이 참 미묘하게 느껴졌다

가장이란 것은 아무래도 책임과 권력이 동시에 있는 위치이니깐

그리고 준섭이 태섭에게는 어머니를 지켜드리자며 이야기했지만 여동생인 아라에게는 그러지 않았다는 점

(물론 아라가 너무 어려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치면 준섭이나 태섭이도 겁나 어림)

어머니는 돌봐야할 연약한 존재고 아버지에서 아들로 가장의 승계가 이루어져야만 평안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가장의 자리를 승계했던 준섭은 얼마 안가 사고로 세상을 뜨고,

그 자리를 응당 물려받아야 할 태섭은 너무 어리고 철이 없어서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적합한 승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정은 위태로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물론 가족 구성원들의 줄초상으로 극심한 트라우마를 입은 가정의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렇다기엔 영화의 서사 자체가 태섭이가 형 준섭의 '가장'으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승계받고 어머니에게 든든한 아들이 된다는 서사긴 하다

왜 아버지의 빈 자리는 꼭 아들이 채워야 하는가? 그냥 어머니 자신 또는 딸이 채우거나 빈 채로 냅두면 안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가장의 부재는 반드시 가족 내의 모순으로 환원될 수 밖에 없다는 가부장제의 논리가 명확하게 보이는 대목이었다

(그 논리를 사회 대부분이 수용하고 있기에 이런 장면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고)

이런 비판적인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흑흑 태섭아 ㅠㅠㅠ하면서 우는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여성이었다...

 

하여튼 너무 재밌고 간만에 심장 뛰는 영화였다

각 캐릭터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각각 백만자정도 있지만 글이 길어질 것 같으므로 이만 줄인다

또 보러 가야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