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2020)
버네사 우즈와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었다
제목은 힐링 에세이스러운데 사실 과학 서적으로 <사피엔스>나 <총균쇠>류의 책이다
이들은 인류가 성공적으로 번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 친화력이 있었음을 주장하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 대표되는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한다
1. 인간의 자기가축화
책의 전반부는 '자기가축화'라는 개념을 설명하는데 전부 할애된다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는 야생동물이 스스로 인간에게 친화적인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초기인류가 늑대중에 작고 사람에게 공격적이지 않은 개체만 골라서 계속 번식시켜 개가 됐다기엔 무리가 있다
사람들이 먹을 식량도 없는데 늑대에게 계속 먹이를 주면서,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미래의 개를 상상하며 번식시킨다는건 말이 안된다 애초에 야생동물이 사람 마음대로 번식이 되지도 않고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자기가축화인데, 사람과 가까운 곳에서 그들이 버린 쓰레기를 주워먹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었고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늑대들은 대부분 호기심이 많고 공격성보다는 친화력이 높은 놈들이었을 거다
이런 놈들끼리 번식해서 점점 친화력이 높은 개체가 되고, 모습도 변하는게 바로 자기가축화다
책의 저자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적고 친화력이 높은 여우만을 선택적으로 번식시켜서 그 결과를 관찰했는데
겨우 몇세대만에 더욱더 사람에게 친화적으로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외형의 변화까지도 일어났다
그러니까 이 실험의 결론은 교배과정에서 친화력이 선택될 때, 친화력 뿐 아니라 다른 특징적인 외형의 변화도 함께 일어난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가 인간 또한 자기가축화 되었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다른 사람에게 다정하고 협력적인 태도를 가질 수록 집단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오직 인간만이 고도의 사회적 능력을 발달시켰다는 것이다
친화력이 우리 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은 새롭지 않다. 하나의 종으로서의 우리가 더 똑똑해졌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이 두 생각 사이에 놓여 있는데, 사회적 관용이 높아지면서 인지능력, 특히 의사소통 및 협력과 관련한 기능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2. 친화력의 양면성: 비인간화
전반부에서 책이 끝났다면 인간 예찬론인가 싶었을 것 같은데, 후반부에 반전이 있다
바로 인간의 독특한 특성인 '친화력', 다른 말로는 '다정함'이 때로는 가장 잔혹한 행위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옥시토신은 임산부에게 많이 분비되며, 아이에 대한 애정과 보호욕구를 갖게하는 호르몬이다
이 옥시토신은 아이에게는 한없이 다정해지면서, 아이를 공격할 수 있는 외부인에게는 평소보다 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이러한 일이 고도의 친화력을 갖도록 진화한 인간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내집단에게는 다정하지만, 외집단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냉혹하게 구는 것이다
저자는 이 현상을 '비인간화(dehumanization)'로 설명하는데,
이를테면 '짐승같은 흑인들'이라는 말은 흔한 인종차별이자, 명백한 비인간화이다
자신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인간이 아닌, 열등하고 말이 통하지 않으며 야만적인 사람으로 칭하는 것이다
흑인이나 아시아인을 유인원, 원숭이에 비유하는 인종차별도 흔히 일어난다
많은 연구자들은 이 차별의 원인을 사회가 쌓은 편견에서 찾으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친화력의 쌍둥이인 비인간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간단히 말해서 자기 사람한테는 관용적이고, 자기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혹독하게 군다
앞에서는 인종을 예시로 들었지만 종교, 성별, 정치성향, 소득 등으로 나눠지는 집단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비인간화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바로 상대 집단이 자신의 집단에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다
실제로 그 위협이 일어나는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조선족에 대해 강력한 비인간화가 일어나고 있다
조선족이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한국인과 조선족이 동일한 수위의 반사회적인 행동을 했을 때 한국인에게 더 관대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인에게는 사정이 있었겠지라고 말하고, 조선족에는 역시 인간말종들이라며 전형적인 비인간화가 일어난다
책에 언급된 실험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보였다
백인들을 대상으로 백인 어린이와 흑인 어린이의 사진을 보여주고, 가상으로 그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고 설명했을때
백인 어린이에 대해서는 사연을 궁금해하거나 범죄에 책임이 없다고 했으며
흑인 어린이의 경우에는 범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압도적이라고 한다
동일한 행동에 대해서 자신의 내집단의 경우에는 관용을, 그렇지 않은 쪽에는 냉혹함을 보인다
외집단에 대한 비인간화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요소는 그들이 먼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인식이었다. 이것을 보복성 비인간화라고 한다.
이러한 비인간화의 반발로 보복성 비인간화가 일어나게 된다
극단적 우파와 극단적 좌파가 서로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적대 관계에 있는 두 나라가 서로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원리가 바로 이것이다
솔직히 이런 지적에는 나 또한 자유롭지 못했는데
인종차별자나 여성혐오자들을 인간이하라고 늘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일상적으로 비인간화를 하고 있었다
3. 비인간화의 해결책
저자는 끔찍한 학살 사건들의 배후에 비인간화라는 원리가 있다고 설명한다
독재자들은 외부의 적이 얼마나 잔인무도한가 과장되게 홍보한다
피지배자들은 독재자들에 의해 선전되는 외집단의 모습을 보고 공포에 빠져 독재자가 하자는대로 한다
평화주의자와 방산비리를 우려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저들은 짐승이므로' 쉽게 묵살된다
그 결과 독재자는 아무런 장애 없이 휘두룰 수 있는 권력을 얻는다
홀로코스트가 그랬고, 난징 대학살이 그랬고, 이라크 전쟁이 그랬다
모든 학살이 끝난 후, '인간도 아닌 것들'로 상정되었던 외부인들이 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음이 밝혀진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으로 저자는 흥미롭게도 교육의 한계를 지적한다
하지만 관용이 없는 사람들을 '교육'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애슐리 자디나가 설문조사에 참여한 백인들에게 흑인들이 수감과 사형 집행에서 부당하게 표적이 되고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이미 흑인을 인간 이하로 보던 사람들은 흑인을 더 비인간화하게 되고 흑인에 대한 징벌 정책을 더 지지하게 되었음을 기억하자. 앎이 문제를 더 악화시킨 것이다.
저자의 지적은 분명 일리가 있다
차별주의자에게 차별의 현실을 알려주면 오히려 화를 내면서 더욱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을 나는 자주 보았다
다른 사람의 말 한두마디로 바뀔 정도로 관용적인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차별주의자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다양성 교육이 가장 큰 효과를 보이는 것은 이미 관용적인 사람들임을 역설한다
한마디로 소귀에 경읽기이며, 더 이야기할 수록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만능 해결책으로 통하는 교육의 효율을, 그 정점에 서있는 석학들이 부정하는 것이 흥미롭다
루소가 학문과 기예의 발전이 인간의 본성을 순화하기는 커녕 악영향을 준다는 글을 발표하여 충격을 줬던 일이 떠오른다
하여간 나 또한 누군가를 계몽하려는 행동이 오히려 차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상황을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교육 대신에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책에서 언급하는 해결책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번째로, 이질적인 집단의 사람들이 서로 자주 만나고 친숙한 이웃으로 여기며 비인간화를 줄이고 내집단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유럽인들을 추적하여 조사한 결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인과 친하게 사귀었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친밀한 접촉은, 독재자들의 강력한 프로파간다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잊지 않도록 해주었다
두번째 해결책은 어릴 적부터 동물과의 친밀한 접촉을 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동물이 얼마나 존중받을 만한 생명체인지 안다
마트에서 파는 털 뽑힌 생닭만 본 아이와 꼬꼬댁거리며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닭을 본 아이 중 누가 더 닭을 생명으로서 존중하려 할까
당연히 후자의 존중이 더 클 것이다
이런 동물에 대한 존중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신성한 장벽이 있다는 오만함을 버릴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비인간화는 필연적인 인간의 본능이라지만, 애초에 비인간도 인간만큼이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비인간화의 파괴적인 속성도 자연히 약화될 것이다
4. 책의 한계점
이 책은 솔직히 엄청난 명저까지는 아니다
여기저기 허술한 부분도 많이 보인다
전반부는 저자들의 전공 이야기이기 때문에 확실히 전문적인데
비인간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후반부는 사실 학문적으로 깊지는 않다는 인상이었다(대신 재밌긴 함)
저자들 역시 마지막에 자신의 전공분야도 아닌 복잡한 조사를 많이 해야 했던 고충을 토로한다
학문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대이니만큼 이런 책의 구성을 환영해야 마땅하겠으나, 그래도 허술한건 허술한거다
구체적으로 허술함을 느꼈던 부분은, 평화시위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서였다
폭력시위보다 평화시위의 성공확률이 더 높다는 통계를 근거로 평화시위가 사실 갈등을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임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 갈등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본 것이 아닌가 싶었다
많은 사회적 갈등의 주요 동기는 경제적 문제인데 이것을 간과하는 것 같았다
평화시위가 때때로 폭력보다 강할지는 몰라도, 돈은 못 이긴다
노골적으로 임금을 차별받고 해고당하는 여성 또는 유색인종이 회사한테 '평화적'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들어주겠는가?
임대아파트 들어오면 집값 떨어진다고 반대하는 사람들한테 '평화적'으로 이야기한다고 그들이 집값을 포기할까?
경제적 동기는 가장 강력하고 솔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들이 이런 부분을 놓친 것인지, 책이 지나치게 복잡해질 것을 우려하여 뺀 것인지,
또는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님을 겸허히 인정하며 굳이 언급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여튼 평화시위 부분은 근거도 좀 허술하고, 백인 저자들의 나이브함이 보였던 것 같다
물론 지금 시대에는 극단에 극단으로 맞서지 말라는 이야기가 꼭 필요하긴 한데
그런 이야기는 사실 차별당하는 당사자들이 해야 더 큰 설득력을 가질 것 같다
마치 간디가 비폭력 시위를 했던 것처럼 말이다
먼저 때린 놈이 "싸우지 마,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라고 해봤자 부아만 치미는 거다
몇 가지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갈등이나 차별을 문화와 교육으로 설명하는 대신에
호르몬이나 진화를 통해 획득한 기제로 설명한 것은 독창적이며 흥미로웠다
그리고 솔직히 완전하지 않은 책을 볼 때가 더 재밌는 것 같다
<총균쇠>같은 경우에는 독자가 잡을 수 있는 모든 트집을 원천 차단한다
내가 "엥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하는데?"하면 다음 장에서 그 얘기를 한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논리가 완전하고 아직까지도 베스트셀러로 읽히겠지만....
그 덕분에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반박할 준비가 되어있는 겁나 똑똑하고 짜증나는 교수랑 얘기하는 기분이 든다
내가 궁금한 점과 아직 궁금하지 않은 점까지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다 이야기해주니까
내가 머리 굴릴 틈이 없이 그냥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 책 마지막 저자의 말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조금 더 읽기 쉬운 책이 되도록 하기 위해 자신들 이론에 대한 반박은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론의 정밀함을 포기하고 가독성을 택한 것이다 대중 과학 서적으로서 나쁜 선택은 아니다
<총균쇠>는 이름값이라도 있어서 700페이지를 다 읽어주는거지
보통의 대중 과학 서적을 700페이지로 내는 것은 독자와 출판사를 모두 불행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저자들이 반박에 대한 반박을 하지 않은 덕분에 책을 읽는 동안 나의 반박은 점점 쌓여갔다
어디를 별로라고 깔지 열심히 생각하면서 읽게 되고, 논리의 허점을 내 생각으로 채워넣으려고 노력하게 됐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