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2021)

구하구하 2022. 12. 28. 11:45

 

천선란 작가의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를 읽었다

기본적으로 뱀파이어 이야기고, 세 명의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고, 사랑과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다

철마재활병원에서 일어나는 연쇄 자살사건을 조사하는 형사 수연

그 사건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는 듯한 완다

빚쟁이에게 쫓기며 뭔가 수상한 일을 벌이는 간호사 난주

주인공 세 명 중에 흡혈귀는 없지만, 모두 흡혈귀와 관련된 강렬한 사건들을 겪는다

 

재활병원에 입원되어 가족도 찾아오지 않는 외로운 치매 노인들에게 흡혈귀가 접근한다는 설정이다

흡혈귀라는 설정은 참 오랫동안 이리저리 변주되면서 재미있게 쓰이는 것 같다

오리지널인 <드라큘라>에서는 남성들의 성적 공포의 화신으로 등장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사람들의 외로움을 파고드는 매혹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외로운 노인들은 이미 괴로운 삶에 지쳐, 자신을 죽여주겠다는 흡혈귀의 제안을 구원으로 느낀다

흡혈귀를 무서워하기는 커녕,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주지 않겠다는 협박에 벌벌 떤다

죽음보다 끝나지 않는 외로운 삶이 더 무서운 사람들이라니 좀 서글펐다

책에는 여러가지 테마들이 나오지만 재활병원 이야기가 가장 감정적으로 와닿았는데

작가의 말을 들어보니 직접 재활병원을 겪어보고 쓴 이야기라고 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역시 자신의 경험에서 가장 진정성 있는 울림이 나오는 것 같다

 

주인공 중 한명인 완다는 릴리라는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지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나온다

 

고작 며칠을 같이했을 뿐인데 평생 그리워하는 건 벌이나 다름없다고, 모든 관계는 처음부터 불평등하다. 더 오래 사는 쪽이 불리했다. 언제나. 

 

서로의 피를 나누어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건 가히 로맨틱한 설정이라 할 수 있다. 개나 고양이가 소설을 썼다면 그들도 이런 내용을 쓰지 않았을까. 주인을 물면 주인과 수명이 같아질 수 있어. 주인을 물어서 오래도록 함께 살자, 하는. 

 

자신이 되어보지 않은 입장에서 글을 쓸 때, 글이 쉽게 허세스럽고 텅비게 된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데

작가는 어떻게 뱀파이어가 되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이런 입장에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신기했다

어쩌면 반려동물을 떠내보내고 그리워했던 경험에서 느꼈던 감정을 풀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천선란 작가는 쓸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련하게 풀어내는 일을 잘한다

이번 작품에서도 북받혀 오르는 감정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전해졌다

조금 아쉬웠던 건, 어쨌든 수사물이고 뱀파이어물인데 이 장르에 기대되는 긴장감이나 흡입력이 부족했다

사건을 전개하는 방식이 좀 전형적인 수사물들을 어설프게 따라가는 느낌이었다

또 완다가 입양갔던 해외에서의 에피소드는 뭔가 서프라이즈 외국인 배우들의 어색한 재연 연기를 보는 듯한 인상

서양식 이름을 가졌고 곳곳에 서양 문화를 집어넣지만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너무 한국인스럽다

하여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모든 단점을 뛰어넘을 만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