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2017)
정보라 작가의 단편집 <저주토끼>를 읽었다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없이 빌렸는데 빌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판타지였다
개인적으로는 구병모 책이 많이 떠올랐다
동유럽 느낌의 어두운 환상소설인데 이제 한국식 노란장판을 섞은 그런 느낌
근데 구병모는 조금 팬픽스러운 감성이 있는데 정보라 작가한테는 없다
책을 읽고 나서 작가 이력을 보는데 러시아 및 동유럽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는 걸 보고 뭔가 이해가 됐다
솔직히 동유럽 환상 문학에 대해 뭐 아는 게 있냐고 하면 쥐뿔도 없긴 하지만
어렸을 때 크라바트라는 동화책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런 으스스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분위기가 가장 매력적이었던 작품은 책 제목이기도 한 단편 저주토끼였다
<저주토끼>의 주인공은 대대로 저주 물건을 만드는 집안 출신이다
주인공은 어느 늦은 밤, 할아버지에게 예쁜 토끼 스탠드에 관한 피비린내나는 이야기를 듣는다
동네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던 할아버지의 친구는 전통 방식으로 좋은 술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성실한 사업가였다
하지만 싸구려 알콜로 술을 대량생산하는 경쟁 기업에서 친구의 회사에서 공업용 알콜을 쓴다는 헛소문을 퍼트린다
회사는 부도나고, 좋은 전통주의 명맥은 끊기고, 친구의 일가족은 모두 참담한 최후를 맞이하고...
산업이 한창 발달할 시기에 한국에서 어느 동네서나 있었을 법한 비열하지만 흔한 이야기
그러나 이 책의 희생자는 범상치 않은 친구를 두고 있었으니, 바로 주인공의 할아버지였다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를 사용하지 말라는 집안의 금기가 있지만 이런 일을 겪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저주에 쓰일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버릇대로 아주 예쁜 토끼 스탠드가 어느 날 경쟁 회사의 사장실로 배달된다
보통 토끼는 순하고 귀엽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내가 키워봐서 아는데 토끼들이 참 정신사납다
풀어놓으면 완전히 정신나간 것처럼 발정을 하면서 짝짓기를 하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잠깐 사이에 우리집 화초를 다 갉아먹어버리고 온 구석에 똥을 갈겨놓는다
작가가 토끼를 저주의 테마로 써먹은게 되게 기묘하면서도 위트있었다
토끼가 회사의 중요한 문서를 모조리 갉아먹어서 회사가 기울어버리고
토끼 스탠드를 만진 사람들은 서서히 아파지게 되면서 잘 때 토끼처럼 코를 찡긋거리면서 숨을 쉰다든지
왜 옛날 동화보면 꼭 사람이 죄를 지으면 동물이 된다는 테마가 있지 않은가
그런 으스스하면서도 웃긴 동화를 보는 분위기가 났다
토끼의 저주는 지독한 연좌제로, 잘못한 사장뿐 아니라 잘못없는 직원들과 가족, 특히 어린아이에게까지 잔혹한 복수를 한다
알다시피 연좌제는 근대 이후로 없어졌고, 잘못한 사람 이외의 죄없는 사람을 징벌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게 여겨진다
하지만 '저주'는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근대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개념이다
마치 사소한 실수로 일가족을 멸해버리곤 했던 그리스로마신화의 신들처럼,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무시무시한 벌
멀쩡하던 아기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하루아침에 농사가 망하고, 자연재해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런 일들에 원인이 있다고 밝혀진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그 전에는 불행한 일이 있으면 그저 신의 형벌이구나하고 하늘에 싹싹 빌어야 했던 것이다
원인도 알 수 없고 해결도 불가능한 무시무시한 저주라는 점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오싹하게 만들었다
<저주토끼>이외에 다른 단편 중에서는 <흉터>와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가 좋았다
<머리>라는 단편은 읽다가 비위가 상해서 중단했는데 잘한것같다.... 정말 기분이 나빠진다
<흉터>는 괴물에게 산 제물로 바쳐진 소년이 복수하는 이야기인데, 복수 후에 반전이 묘했다
마을과 괴물의 관계는 대체 뭐였을까 선악조차 흐릿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이야기였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모래사막과 황금배라는 어휘가 주는 몽환적인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동화처럼 사랑에 빠져 저주에 걸린 왕자를 구하기 위해 몸소 나서는 용감한 공주,
힘겨운 모험을 떠난 끝에 저주를 풀지만 결국 왕자에게 배신당한다
역경을 헤치고 결혼으로 가부장제에 안정적으로 편입되는 결말이 아닌,
가부장제에 배신당하고 새로운 자신의 길을 찾는 공주의 이야기라는 점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