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말 혹은 침묵(1977)
아니 에르노의 1977년작 <그들의 말 혹은 침묵(Ce qu'ils disent ou rien)>을 읽었다
지난 번에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 <부끄러움>,<한 여자>를 읽고 나서, 나는 거의 아니 에르노를 숭배하게 되었다
그가 지구에서 현실을 가장 잘 재현하는 작가라는 확신에 차서 이 책 또한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내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했다
솔직히 1977년에 나왔는데 왜 올해 번역 됐는지 알 것 같다
전성기 작품들에 비해 좀 평범하고 특유의 현실을 날카롭게 관찰하는 눈과 솔직함에서 나오는 강렬한 감정도 없다
하... 그리고 무엇보다 지나치게 '프랑스'적이다
책은 '안'이라는 갓 중학교를 졸업하고 여름 방학을 가지는 사춘기 여자아이가 주인공인데
주된 내용은 안이 어떻게 하면 섹스 한번 해볼까 안달복달 하는 내용이다
주인공 안이 직접 있었던 일을 서술한다는 컨셉인데, 덕분에 시간도 뒤죽박죽이고 글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
안이 인상적으로 읽었다고 언급되는 까뮈의 <이방인>을 오마쥬한 느낌도 있다
근데 솔직히 난 그 형식이 그다지 헷갈리지도 않았고 딱히 어떤 문학적 효과를 불러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멋부린 느낌
어떻게든 촌스러운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가고 싶은 사춘기 여자애의 안달은 익숙한 소재지만
그게 프랑스 배경일때는 섹스가 빠지지 않게 되나 보다
유교국가의 흔한 유교걸로 자라온 나는 안의 이런 소망에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아서 그냥 떨더름하게 읽었다
안이 섹스를 대하는 태도는 좀 흥미롭긴 했다
이 아이는 섹스를 정말 하고 싶다기 보다는, 그냥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친구로부터 앞서간다는 인정을 받고 싶은 거다
사귀는 남자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도 안하면서 그 일에 대해서 엄마와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만 이야기한다
<한 여자>에서도 볼 수 있는, 아니 에르노가 어머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증은 이 소설에서도 선명히 드러난다
사실 너무 <한 여자>에서와 설정이 비슷해서 이것도 자전적 소설인 줄 알았다
에르노는 진짜 어머니와의 관계가 강렬하고 특별했나보다 ㄹㅇ다른 얘기 안하고 맨날 어머니 얘기만 함..
별로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없는데, 나쁜 방향으로 인상적이었던 건 있다
번역에서 자꾸 되도않는 유행어며 속어를 쓰는데 한번도 안써봤으면서 검색해서 넣은 것 같았다
그 단어는 그런 용법으로 쓰면 안된단말입니다 ㅠㅠ 찐사랑을 그렇게 쓰는 사람 없다고요
옮긴이의 말을 보니까 일부러 원문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어색함과 불편함이 들게 옮겼다는데,
그건 알겠지만 일부 속어들은 그냥 틀리게 썼고, 일단 배경이 1977년도인데 그런 말투가 어울릴 턱이 없다
속어에도 문법이 있다 '이건 찐사랑과 닮은 듯했다' 이렇게 쓰는 게 아니라
' A랑 B ㄹㅇ 찐사인듯ㅅㅂ' , '와 쟤네 찐사네' 이렇게 써야한다
아니 에르노도 이런 책을 썼다니
나의 문학적 우상도 초기에는 이런 글을 썼다는 것에 희망을 느낀다
글쓰기는 정말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거구나
나도 희망을 가지고 정진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