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 타오르다(2020)
우사미 린의 <최애, 타오르다>를 읽었다
주인공 아카리는 늘 압도당해있는 기분을 느낀다
학업도 교우관계도, 미래 진로 설정도, 남들은 쉽게 하는 일이 아카리에게는 항상 어렵다
그런 아카리가 유일하게 숨을 쉬는 것 같을 때는 혼성 아이돌 그룹의 멤버 마사키를 좋아할 때다
같은 굿즈를 3개씩 사고, 무리를 해서라도 모든 콘서트와 팬미팅에 참석하며
앨범을 사면 주는 투표권으로 최애를 1위로 만들기 위해 무리한 소비를 감행하는 아카리
일반인 뿐만 아니라 아이돌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아카리는 맹목적으로 애정을 쏟아붓는다
아이돌을 좋아하느라 가족과 학교, 자신의 미래를 내버린 채 산다
덕질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일부 부모나 선생들은 덕질을 멈추게 하면 아이가 정상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과관계를 잘못 파악한 결론이다
"반년 넘게 시간이 있었지. 왜 아무것도 안 했니?"
"못 한 거야."
내가 대답하자 엄마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콘서트에 갈 여유는 있으면서."
어쨌든 나는 몸을 깎아 쏟아붓는 수밖에 없다. 최애는 내가 살기 위한 수단이었다. 생업이었다.
아이돌 때문에 아이가 이상해진 것이 아니라, 죽지못해 간신히 살고 있는데 아이돌이 겨우 삶을 붙들어 놓는 것이다
아카리의 어머니는 아카리가 여유가 있어서 콘서트에 간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갔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카리는 자신의 최애 마사키를 척추라고 표현한다
없으면 곧바로 쓰러져 버릴, 자신의 몸을 지탱하는 중심
일상에서 아카리는 늘 기력이 부족하고 모든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다
타고나길 그렇게 난 아카리는 세상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
다른 사람은 쉽게 해내는 일이 벅차서 게으르다고,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혼이 난다
최소한을 해내려고 힘을 짜내도 충분했던 적이 없었다. 언제나 최소한에 도달하기 전에 의지와 육체의 연결이 끊어진다.
깎아도 뽑아도 또 자라는 것과 왜 영원히 마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항상 그랬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그랬다.
이런 아카리의 고민에 공감이 갔다
남들은 쉽게하는 노력이 내게는 생각만 해도 막막하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정신머리를 고쳐먹으면 된다고 수백번을 다짐해도 결국 남는 건 난 할 수 없다는 자괴감 뿐이다
'넌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거야'라는 말이 자극이 되기 보다 아픔이 된다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일을 못하는 나는 병신인가하는 비뚤은 생각만 들고,
그걸 또 건강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뚤게만 보는 내가 등신같다
아카리가 유일하게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듣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곳은 덕질 뿐
아이돌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아카리가 심적으로 이해가 가는 이유다
언제나 자신이 관계를 망친다고 생각하는 아카리는 아이돌에게만큼은 무한한 애정을 걱정없이 쏟을 수 있어 좋아한다
내가 뭔가 저질러서 관계가 무너지지도 않는, 일정한 간격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끝없이 느끼는 것이 평온함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애를 응원할 때, 나라는 모든 것을 걸고서 빠져들 때, 일방적이라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충족된다.
나 또한 아이돌을 좋아할 때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것이 좋다
보통의 사람 관계에서는 내가 한 사람에게 애정을 가져도 그 사람이 똑같이 나를 좋아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연애 관계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친구 가족 등 모든 관계에 해당된다
아이돌과 팬의 일방적인 관계에는 거절당하는 상처가 없다
그런데 아카리를 지탱하던 유일한 척추인 아이돌 마사키가 어느 날 '타오른다'
일본에서는 사고를 쳐서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는 것을 '타오른다'고 한다고 한다
마사키가 팬을 때렸다 게다가 그 일에 대해 부정하지도 않는다
바로 여기서부터 책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카리의 중심이 서서히 무너지는 이야기
붕괴는 처음부터 빠르게 진전되지는 않는다
사고를 친 아이돌의 팬들이 으레 그렇듯이 오해가 있었을 거라며 정신승리를 하고,
최애를 공격하는 사람들로부터 최애를 보호하며 오히려 결속을 단단하게 다진다
얼핏보면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보인다
균열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그룹의 인기 투표 결과가 공개되었을 때부터다
언제나 1위 자리에서 환히 웃던 마사키가 최하위의 성적을 받자 아카리는 그제서야 무너져버리고 만다
최애가 사고를 친 순간에는 어떻게든 팬들끼리 똘똘 뭉쳐 했던 정신승리가 깨진다
최애가 아이돌로서 몰락했다는 객관적인 지표에 아카리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 와중에도 내가 앨범을 몇 장만 더 샀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아카리다
내가 봐도 환장스러운데 아카리와 함께 사는 가족들은 말도 못할 것이다
아카리가 이해가는 면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모두 이해받을 만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아카리는 학교에 너무 자주 빠져서 결국 중퇴를 결정하게 되고, 그 길로 가족들에게 떠밀려 독립한다
음식물에 곰팡이가 피고 물건에 먼지가 쌓이도록 치우지 않은 방에서 아카리는 최애만 본다
그룹이 해체를 발표하자 어쩐지 아카리는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다
아카리는 최애의 상징색인 파란색으로 온 몸을 감싸고 마지막 콘서트에 결연하게 향한다
파란 야광봉의 바다, 수천 명을 수용한 돔이 비좁게 느껴졌다. 최애가 우리를 따뜻한 빛으로 감싼다.
그렇게 콘서트가 끝나고 그룹은 해체, 마사키는 연예계를 은퇴한다
그러지 말아줘, 내게서 척추를 빼앗아가지 마. 최애가 사라지면 나는 정말로 살아갈 수 없다. 나는 나를 나라고 인정하지 못한다.
최애의 노래를 영원히 내 안에서 울리게 하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고 난 뒤 곁에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최애를 파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다. 최애 없는 인생은 여생일 뿐이다.
척추가 없어진 이제 아카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
무작정 최애의 집으로 달려간다
그 곳에서 최애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베란다로 빨래를 들고 나오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카리는 그 여자보다 빨래가 더 신경쓰인다
나를 명확하게 아프게 한 것은 그 여자가 안고 있던 빨래였다. 내 방에 있는 엄청난 양의 파일과 사진, CD, 필사적으로 긁어모은 수많은 것들보다 셔츠 단 한 장이, 겨우 양말 한 켤레가 한 사람의 현재를 느끼게 한다.
이 감정이 이해갈듯 말듯 슬펐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 사살 당하는 느낌
그래서 내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고 느끼는 감정
나도 덕질하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고 관둔 일이 있다
탈덕(연예인을 좋아하는 일을 그만 두는 것)의 순간은 항상 뜻밖이다
아이돌이 사고를 치거나, 무대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아니라
갑자기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구나, 그저 환상이었구나 느낄 때다
아카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몇달째 방치해서 엉망진창인 집을 치우기 시작한다
기어 다니면서, 이게 내가 사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이족보행은 맞지 않았던 것 같으니까 당분간은 이렇게 살아야겠다. 몸이 무겁다. 면봉을 주웠다.
자신의 척추라고 생각했던 최애를 떼어낸 아카리는 이제 기어다니는 수밖에 없다
언뜻 보면 절망적인 결말같지만, 그래도 희망적인 끝이다
늘 누워만 있던 아카리가 자신의 힘으로 아주 미약하지만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힘내라는 말 대신 아카리에게 그걸로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심스럽지만, 나 또한 저렇게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경험이 있기 때문에
움직일 용기를 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결심인지 안다
개판인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아카리가 책 마지막에 드디어 엉망진창인 방을 청소하기 시작한 일이 희망적이라고 생각한 이유다
여담으로 책을 읽으면서 아니 에르노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 에르노는 글을 통해 자신이 자라온 하층 계급의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회복과 고발을 동시에 하려고 한다
하층 계급이 마냥 천하다고 비난 받길 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현실과는 다르게 행복하기만 했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복합적인 입장을 가진 글은 쓰기가 어렵다
나쁘면 나쁘고 좋으면 좋은거지,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 라는 반응을 얻기가 쉽다
오타쿠 또한 사람들의 고운 시선을 받는 집단은 아니다
그들의 광적인 열광과 몰입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쉽게 비하되고는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타쿠들은 자기들 집단 내부의 곪아있는 이야기를 잘 꺼내지 못한다
꺼내는 순간,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면서 더 큰 비난과 편견으로 위협받는다
대부분의 오타쿠들은 자신을 열심히 변호하면서 글을 쓴다
"아이돌에게 유사 연애를 하지 않는다, 그저 건전한 취미 활동일 뿐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건강한 행위다"
그런 류의 글을 읽으면 내가 아는 덕질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덕질에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런 묘사가 내가 보았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았다
덕질을 하면서 미래 따위는 될 대로 되라는 태도로 대책없이 아이돌에 모든 자아를 위임한 사람들을 많이 봤다
솔직히 삶이 불행하고 애정이 결핍돼서 아이돌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사람도 많았다(당연히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우사미 린은 아니 에르노처럼 어떤 변형없이 오타쿠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무리한 소비를 하면서도 서로 어쩔 수 없었다고 다독이고, 현실을 내팽개치는 것을 훈장처럼 여기는 그들의 현실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시선에 비판만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지 집요한 심리 묘사로 독자에게 설득력을 제공한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이 태어날 때부터 무거웠던 아카리는 최애라는 척추로 겨우 살아가는 인물이다
덕질이 나를 망치고 있지만 동시에 나를 살려 놓는다
마치 무엇인가에 중독되는 심리와 비슷하다
(물론 일반적인 덕질이 그렇게 유해하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 병적인 덕질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
어떤 쾌락에 대한 중독은 사실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개판인 삶을 눈뜨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고, 쾌락을 차단하면 적나라한 현실이 드러나서 멈추기가 두려워진다
이런 안쓰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나친 미화나 비난 없이 균형을 맞추며 써내려가는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아이돌 덕후로서 공감가는 소재 때문에 책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현실을 묘사함에 있어 머리를 띵하게 만들 만큼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다
이렇게 무미건조한 문체로 강렬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사미 린의 다음 책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