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1966)

구하구하 2022. 12. 14. 22:26

Sargasso Sea의 모습

이 책을 고른 것에는 근사하고 고독해보이는 제목의 영향이 컸다

'광활한'도 '드넓은'도 아닌 '광막한'이라는 생소한 어휘와 사르가소 바다라는 난생 처음 듣는 이름

나의 지적 허영심을 달래줄 근사한 책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사르가소 바다가 이 책과 무슨 연관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운이 좋게도 해양생물학을 전공한 어머니가 이에 대해 풍부한 설명을 들려주셨다

Sargassum(사가숨)은 한국어로는 '모자반'이라고 부르는 해조류의 라틴어 학명이다

특이하게도 서인도제도 근처의 바다 한 지역을 거의 덮다시피 한 모습에 그 바다를 Sargasso sea라고 명명한 것

모자반은 기본적으로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해조류이기 때문에 아주 깊은 바다에서 살지는 않는다

뿌리를 내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해안가에서 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르가소 바다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해안가가 없는 바다로, 여러 해류에 둘러쌓여 한가운데에 있는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해안에 주로 서식하는 모자반이 대체 이 바다에 어떻게 살고 있는가?

바로 해류에 휩쓸려 뿌리가 뽑혀 사르가소 바다로 유입되어 둥둥 떠다니면서 사는 것이다

모자반의 뿌리에는 육상 식물의 그것처럼 땅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이 아닌, 단지 땅에 줄기를 고정하는 기능만 존재한다

따라서 뿌리가 뽑혀도 영양 공급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동안 살 수 있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진 리스가 <제인 에어>에 등장하는 로체스터의 미친 아내 '버사'에 영감을 받고 쓴 작품이다

<제인 에어>에서 버사는 크리올(자메이카에서 태어난 백인 자손, 현재는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출신이고 그의 재산을 보고 로체스터가 결혼했으며,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쳐버렸다는 정보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책에서 그는 제인 에어의 심리적 공포와 당시 여성들에게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등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며,

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로체스터는 끊임없이 버사를 힐난하는 말(성적으로 타락함, 사나움, 악마적임, 광인)을 하면서 이런 미친 부인을 안고 사는 자신에 대한 연민에 젖어 피해의식이 가득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로체스터야말로 돈 때문에 아내와 결혼해놓고 아내 돈을 다 가로챈 다음, 가둬놓고 자기는 총각행세하는 미친놈이 아닌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저자인 진 리스는 예리한 시선으로 아무도 버사를 대변해주지 않음을 지적한다

이 이야기는 미친 아내 버사가 미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미쳐버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상상을 담고 있다

마치 해류에 휩쓸려 사르가소 바다에서 고립된 모자반같은 삶을 사는 버사, 혹은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앙투아네트 코즈웨이는 자메이카에서 대규모 노예 농장을 경영했던 백인의 딸이다

노예해방 후에 그들 가족은 본토 영국인들과 자메이카인들의 미움을 동시에 받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린다

노예제가 금지되고 나쁜 백인들은 모두 본토로 돌아가고, 흑인들은 자유롭게 살았답니다!라는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상상하고 있었는데, 나의 상상은 현실의 복잡함을 알지 못하는 매우 순진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식민지에서 노예 농장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백인들은 본토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들이다

본토에서 재산을 쌓거나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을 방법이 없었던 사람들이 기회의 땅으로 떠나 한 몫 단단히 잡은 것

노예제 철폐 당시 이미 자메이카에 정착한 노예제 부역 백인들과 본토 백인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히 차이가 났다

특히 본토 백인들은 노예제를 철폐에 성공했다는 도덕적 우위까지 탐내며, 자메이카의 대농장주들을 사악하다며 비난한다

물론 노예제 부역 백인들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행위를 하긴 했는데, 손안대고 코풀기만 했던 본토 백인들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 이건 참 어이없는 생각이다

이미 식민지의 황금으로 본토를 화려하게 발전시켰으면서 직접적으로 가담한 놈들만 나쁜놈! 하고 슬쩍 넘어가려는 거다

당연히 자메이카의 흑인들은 이런 백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을 증오하고 공격하려고 한다

노예 철폐 후에 대농장주들은 모두 몰락하여 나앉은 신세가 되었고 덕분에 수많은 농장들이 헐값에 시장에 나왔다

또 다른 백인들이 기회를 노리며 자메이카에 유입되어 농장을 산다

이들은 본인들이 기존 노예농장주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는 말들이 진짜 황당하다 ㅋㅋㅋㅋ

자신들이 위대한 노예 철폐를 이뤘다고 하면서 마치 흑인들이 자신들에게 공격적일 이유가 없다는 듯이 군다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버사는 노예제 금지 이후에 영국에서 온 자신의 새 남편 메이슨에게 흑인들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설득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메이슨은 흑인들의 증오를 이해하지 못하고, 위험에 대비하지 않아 결국 습격당하게 된다

앙투아네트는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백인(크리올)으로, 흑인들에게 증오를 받는 동시에 백인들에게도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차별당한다

그를 다루는 시선에는 크리올을 변호하고 동정하는 시선이 엿보여서 조금 불편하기도 하다

불쌍하고 억울한 것으로 따지면 갑자기 아프리카에서 잡혀와 자메이카에서 노예로 살게된 흑인들이 제일이니까 말이다

노예제 부역하던 백인 후손이 철폐 후 몰락해서 징징거리는 내용으로 읽히는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식민지 착취를 통해 문화를 융성하게 발전시킨 영국 본토의 문학들은 아직까지 명작으로 취급받지 않는가

착취구조의 맨 위에서 손에 피묻힐 일 없었던 사람들이 쓴 문학은 괜찮고, 

아래에서 손에 직접 피를 묻힌 사람들 자손의 경험담은 읽을 가치도 없는 부정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당시의 본토 영국인들이 그랬듯이 다소 위선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다

 

 

앙투아네트는 확실히 순백의 피해자는 아니다

노예 농장주의 딸로서 그 반인륜적인 제도의 혜택을 받은 사람 중 하나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식민주의가 낳은 여성 피해자로서, 아무 이유없이 출신만으로 흑인들에게는 증오와 복수의 대상이, 백인들에게는 이방인이자 돈을 뜯어낼 대상이 된다

흑인들을 죽이고 압제한 것은 대부분 백인 남성인데도, 그 증오와 분노는 이상하게 만만한 여성과 아이에게 흘러간다

흑인 남성들은 무력해진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를 강간하며 화를 풀고, 그 사실을 알게된 백인 남성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의 혈통을 더럽다고 느끼며 앙투아네트를 힐난한다

그러니까 인류 최후의 식민지는 여성이라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다

한편 로체스터는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이 강한 인물이다

아름다운 아내랑 결혼해서 돈도 꿀꺽 다 먹은 주제에 '이 곳은 저주받은 곳이다, 공격받는 느낌이다.'라는 말을 끝도 없이 해서 사람 질리게 만든다

게다가 아내와 사랑에 빠졌다가 편지 한통에 홀랑 넘어가 아내를 증오하고 멸시한다

앙투아네트가 기어코 미쳐버리는 것은 자신의 나쁜 피 때문이 아니라 로체스터의 가증스러운 태도 때문이다

로체스터는 자신이 이 결혼을 속아서 했다고 생각하며 본인을 매우 불쌍하게 여긴다

그가 여기서 잃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돈도 얻었지, 아름다운 아내도 얻었지...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남편의 이유없는 변덕때문에 불안에 시달리고 사랑을 갈구하는 처지가 된다

정말 불쌍한 것은 앙투아네트인데 본인이 모든 일의 최대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제인 에어와의 비교를 하면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까 다 까먹어서 기억이 안난다

이 책이 원작의 공식적인 프리퀄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이런 다른 시각이 있구나 하면서 봤다

후기식민주의의 시선으로 고전에 새로운 상상력과 해석을 붙인 것은 참신한데

사실 문학적인 완성도로는 제인 에어가 훨씬 뛰어나다

집착적인 감정들의 묘사와 쫄깃한 대사들이 제인 에어의 매력인데 

사르가소 바다는 감정이 너무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다

배척받는 외부인의 느낌을 주인공에게 주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썼을 수도 있긴한데

그렇다기엔 좀 치밀함이 부족해서 직관적으로 '아 일부러 이렇게 썼구나!'라는 생각은 안들었다

그냥 단순한 필력의 부족이나 번역의 잘못이 커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메이카의 복잡한 식민지배 역사를 수박겉핥기로나마 알게 된 것은 재미있었고

또 백인도 흑인도 아닌 묘한 처지의 앙투아네트의 지위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세상은 참 흑백으로 나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백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를 가해자로 만들지만, 동시에 여성으로서는 피해자이다

책을 읽을 때 항상 누가 착한 놈이고 나쁜 놈인지 파악하면서 읽는 편인데, 

앙투아네타같은 경우는 한쪽으로 생각하기 힘든 정체성을 가져서 참 복잡한 마음으로 읽었다

책 자체는 좀 실망스러웠지만 머리굴리며 읽는 재미가 있었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