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1987)
아니 에르노 주간의 세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 <한 여자(Une femme)>
<남자의 자리>는 에르노가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난 후에 쓴 책이라면
<한 여자>는 어머니의 죽음 후에 쓴 책이다
거기에 <부끄러움>까지 읽고 나면 아니 에르노의 삶의 조각들이 어느 정도 맞춰진다
<남자의 자리>와 <부끄러움>도 나름 재밌게 봤는데 이 책이 제일 재밌음
다소 순응적으로 살았던 아버지와 달리 에르노의 어머니는 저항적이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쟁취하려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의 삶의 이야기는 더욱 역동적이고 감정의 오르내림이 크다
1.
나는 그녀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친 방식이 부끄러웠는데, 내가 얼마나 그녀와 닮았는지 느끼고 있는 만큼 더더욱 생생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에르노는 어머니를 다정하고 세심한 표현은 모르는, 거친 노르망디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는 많은 남매들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고 초등교육을 마치자마자 공장에 취직하여 집안에 돈을 보탰다
그러나 다른 남매들과는 다르게 비참한 환경에서 반드시 벗어나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그는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자식이 어떻게 비참한 상황을 맞이하는지 가까이서 지켜봐왔다
여자의 경우에는 예정에 없던 임신을 하고 남자의 경우는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려 교도소에 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흔했다
그의 삶은 하층민의 불행한 운명을 맞지 않기 위한 저항의 연속이다
미래를 위해 벌이를 저축하고 술 마시지 않는 남편을 선택한 것,
직공으로 계속 일하는 대신에 빚을 내어 카페 겸 식료품점을 매입한 것,
딸을 행복하게 키우기 위해 여럿을 낳는 대신 딱 한 명만 낳은 것,
동네에서 유일하게 딸을 사립학교에 보낸 것... 그의 모든 선택은 운명에 대한 저항이었다
내 어머니로서는 반항한다는 것의 유일한 의미는 가난을 거부한다는 것이었고, 그 유일한 형식은 노동하고 돈을 벌고 남들만큼 훌륭하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어머니가 나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나 역시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그 씁쓸한 비난이 비롯됨.
2.
청소년기에 들어선 나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고, 우리 둘 사이에는 투쟁만이 존재했다.
많은 자식들이 으레 사춘기에 그렇듯이 십대의 에르노는 어머니에게서 떨어져나오게 된다
어머니하고는 말귀가 도무지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
특히나 사립학교에 입학해서 '머리 좀 큰' 저자에게는 더더욱 배우지 못한 어머니가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어머니는 자기 고집으로 사립학교에 보낸 딸을 자랑스러워 하지만, 동시에 거리감도 느끼기 시작한다
딸이 대학교에 진학하고, 직공의 아들 대신 정치학을 전공한 사위를 얻으면서 그들 계급의 틈은 점점 더 벌어진다
에르노가 사립학교에서 배워온 말을 입에 붙을 때까지 써보는 것,
에르노가 올 때면 즐겨읽던 통속 소설을 몰래 숨기는 것,
어머니는 에르노를 선망하면서도 동시에 불편해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3.
책을 읽으면서 에르노는 어머니를 닮았구나 싶었다
저자는 나중에서야 자신이 기성사회에 가진 반항과 어머니가 가난에 대해 하는 반항이 동류임을 깨닫는다
둘은 모두 순응하는 부류가 아닌 반항하는 부류로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사람들이다
그 방향이 달라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
서로 성격이 무척 닮았음에도 너무나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는 이런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보면
꼭 우리 아빠와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둘은 정말 안맞는 사람들인데 그것은 둘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각각 좌파와 우파라 명절에 정치 얘기는 절대 금물이다
독립적이고 고집이 아주 세고, 남이 뭐라고 하든 자기 마음대로 해버리고
그러면서도 정이 무척 많고 때때로 낭만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까지 똑같다
문제는 정작 둘은 서로의 공통점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똑같은데...
그들은 과거에 무진장 많이 싸우고 요즘은 서로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정책을 펴고 있다
왜 부모와 자식은 자기들의 동질성을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걸까?
부모 자식 관계는 모든 관계 중에 가장 떼어놓고 파악하기 어렵다고 한다
가까운 탓에 객관성을 잃어버리기가 쉽다고
청소년기 내내,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비판하는 대상이 자신과 닮았다고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여간에 왜 생각이 이리로 튄지는 모르겠지만
에르노와 어머니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저항하는데 그 결과는 서로 전혀 다른 점이 참 흥미롭다
4.
책 초중반에 나오는 건장하고 자신감 넘치는 에르노의 어머니를 보다가
책 마지막에 나오는 쇠약해지고 외로워졌으며, 급기야 치매에 걸려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보면
저자가 겪었을 고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펼쳐진다
때문에 책 뒷부분은 상당히 우울하다
에르노는 글에서 감정적인 부분을 빼고 건조하게 쓰는 편이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절망과 슬픔이 여실히 드러났다
모두 어머니가 '호상'이라고 말하면서 치매로 인한 고통을 더 받기 전에 돌아가신게 잘 되었다고 말할 때
에르노는 속으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반문한다
에르노 그 자신이 어머니의 치매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고통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죽음이 '잘 되었다'라고 하는 것만큼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기록한 또 다른 책인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도 있는데
이 책은 너무 우울해보여서 도전하지도 않았다
책 초반에 나오는 어머니에 대한 묘사,
이를테면 씩씩하고 꼿꼿한 자세로 폭격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머니라든지
용감하게 가게를 사들여 자신의 삶을 바꿔보려고 했던 어머니
이런 모습을 모두 보고 죽기 직전의 어머니를 보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젊은 시절의 생기넘치던 사람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