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금순씨의 죽음에 대한 기억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를 읽으면서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가 떠올랐다
돌아가시기 전날에 외할머니가 웅크리고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는데
두툼하던 팔다리가 어찌나 앙상하고 창백해졌는지 마치 죽은 사람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외할머니가 숨은 쉬고 계시는 것이 맞는지 가슴의 작은 오르내림을 필사적으로 관찰했다
그럼에도 외할머니가 그 다음 날 새벽에 돌아가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의 심장 혈관이 막혀가고 있다는 사실은 이전에 여러 번 찾은 병원의 의사도 몰랐기 때문이다
늦잠에서 깨어났을 때 모든 일이 끝나 있었다
경황이 없어서 외할머니가 병원에 실려가는 동안 나를 깨운 이가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줄만큼 침착한 상태의 어른도 없었다
아무도 말은 해주지 않았지만 단순히 병원에 누군가 실려가 입원해 있는 상황과는 공기 자체가 달랐다
팽팽한 긴장감 따위는 없고 모든 것이 탁 하고 풀려있는 느낌이었다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정신없이 자개 옷장의 서랍을 뒤지는 엄마가 기억이 난다
내가 엄마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었는지 묻지 않았었는지 기억이 확실치 않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언젠가 찍었다고 말했던 영정사진을 찾고 있었다
마치 영정사진을 찾는 것이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미친듯이 이불장이며 옷장을 뒤졌지만, 영정사진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10여년 전쯤에 찍은 가족 사진을 가져가니 장례식장에서 그것을 확대하고 알맞은 비율로 잘라 그럴싸한 영정사진으로 만들어 주었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환하게 웃는 그 영정 사진을 보고 안도하며 다행이라고 모두에게 반복해서 말했다
마치 외할머니의 죽음보다 영정사진이 더 중요한 사람 같았다
영정 사진은 돌아가시기 전 외할머니의 모습보다 내 머릿속의 외할머니 이미지에 훨씬 가까웠다
약간 통통하고 동그랗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
건강한 풍채와 나를 여기저기 뜯어보며 지적할 거리가 있는지 찾아보던 커다랗고 선량한 눈
그는 생전에 활달하고 정이 많았고 고집불통이었으며 한결같이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막무가내였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전날 본 그의 모습은 마치 바람이 빠진 것처럼 마르고 하얘서 기분이 이상했다
어쨌든 영정사진이 그 야위고 힘없는 모습 대신에 건강한 모습으로 그를 기억할 수 있게 해주어서 다행이었다
영정사진을 무사히 찾은 후에는 이제 장례식장 직원들이 일을 알아서 했다
엄마는 할 일이 끝나서 더 이상 집중할 곳이 없었고, 그 틈을 타서 맹렬한 슬픔이 엄마를 덮쳤다
엄마가 우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나 끔찍했다
무엇보다 내가 엄마의 슬픔을 달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 최악이었다
그 순간 엄마와의 친밀했던 사이가 별과 별 사이의 거리만큼 멀어지는 것 같았고
엄마는 내가 결코 건너가 위로할 수 없는 거대한 슬픔의 골짜기를 만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엄마를 꼭 껴안고 '괜찮아', '울지마' 따위의 말을 했는데
주변 어른들이 "딸이 엄마도 위로할 줄 알고 기특하네" 같은 말을 아무리 해도
내가 엄마의 슬픔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했다
나는 서툰 위로를 포기했다
그런 일에 익숙한 나이든 친척 여자 어른들이 있었다
그들은 솜씨좋게 엄마를 어르고, 적당한 공감과 유머를 발휘했다
나는 위로에 대한 나의 무능을 인정하고 물러났다
그 때는 이상하리만치 외할머니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아서 슬픔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장례식장 구석에 있는 컴퓨터로 혼자 인터넷을 하고, 수능 대비 문제집도 풀었다
다만 외할머니를 관에 넣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까운 가족들이 그 모습을 보는 절차(이름이 무엇인지 모르겠다)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을 흘려야 할 것 같았고,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남들처럼 울부짖지 않으면 그 상황에 대단히 부적절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장의사가 외할머니의 얼굴에 화장을 해서 생전보다 훨씬 말끔하게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외할머니의 모습을 본 후에 장의사가 외할머니를 대단히 복잡한 방법으로 누런 마에 쌌다
곧 외할머니의 얼굴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천에 싸인 외할머니는 밧줄에 묶인 거대한 누에고치같이 보였다
그 모습이 좀 이상하고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그냥 그대로 관에 넣으면 안되는 걸까 생각을 했다
외할머니가 누에고치가 된 이후로도 장례식은 계속 되었다
밥공기와 육개장을 나르고, 떡과 반원형으로 썬 오렌지가 담긴 일회용 종이접시를 끊임없이 날랐다
엄마는 계속 슬픔에 빠져 있었지만 나머지 가족들은 우울한 분위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했다
아빠와 나, 그리고 사촌들은 눈감고 마시면 정말로 콜라와 사이다를 구분할 수 없는지 실험했다(눈을 감아도 아주 잘 구분되었다)
또 장례식장 주변을 돌며 산책하기도 했다
쓸쓸한 겨울이라서 그다지 위로가 되는 풍경은 아니었다
장례식 마지막 날에 목사와 그 밖의 외할머니가 다니던 교회의 여러 사람들이 와서 장례를 주도했다
나는 목사가 외할머니를 두고 '늦게 신앙을 가졌지만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거슬렸다
마치 외할머니가 잘못했다는 투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나빴다
외할머니는 젊은 시절에는 꽤 자주 절에 가셨는데, 불교를 믿으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교회에 다닌 것은 노인이 된 이후였는데 엄마 말로는 무릎이 아파서 더 이상 절이 있는 산에 가지 못하게 되어
가까운 교회에 가는 거라고 했다
할머니는 이따금 나에게 교회에 다닐 것을 강요하다가도 나의 탐탁찮은 반응에 쉽게 포기했다
우리 외할머니처럼 매력적인 사람이 늦게라도 자기네 종교에 입교했으면 감사한 줄로 알아야 할텐데
늦게왔다고 장례식장에서 타박을 하다니...
외할머니도 그 목사가 자기 장례식장에서 그따위 말이나 할 것을 알았다면 교회에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목사가 하는 말은 죄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외할머니를 자꾸 죄인이라고 부르고 죄를 사한다고 하고 자비로운 주님의 어쩌고 저쩌고
자애롭고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목사가 가족이 아닌 만큼 외할머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예를 갖춘 것일 테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 마음속으로 드는 반항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 외할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 외할머니는 제멋대로 넘치는 정을 받는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이 쏟아붓는 사람이었고
화분과 꽃에 대한 광기어린 사랑을 보여주었으며
밥상은 언제나 밥공기를 손으로 들고 먹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꽉차게 차렸고
김치에는 청각과 갈치를 썰어넣어서 몹시 시원한 맛이 나게 했다
집은 도무지 치우지 않아서 언제 가도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 상태였고(하지만 나는 그 혼돈을 좋아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을 홈쇼핑으로 주문하는 엄청난 맥시멀리스트였다
이런 외할머니의 복잡한 성질을 일주일에 한 번 만날 뿐인 목사에게 알길 원하는 건 물론 말도 안되는 무리한 요구다
그치만... 하여튼... 내 기분이 그랬다 그건 나에게 제대로된 추모가 아니었다
우리 가족 중에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어쨌든 난생 처음 보는 찬송가를 더듬더듬 부르면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장례 절차가 또 하나 끝났다
기다란 나무관에 넣어진 외할머니를 집안 남자들이 짊어지고 화장을 하러갔다
우리가 간 화장장은 TV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크고 우아하지는 않았다
낡은 동사무소 건물처럼 썰렁했고 대기하는 장소는 유족들에게 경건함을 주기에 부족했다
집안 어른들은 화장을 보러 들어가겠다고 하는 엄마를 "여자는 그런 거 보는 거 아니야"라며 만류했다
엄마의 남자 형제들만 그 장면을 보러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공평하기 짝이 없다
엄마에게는 그 장면을 참관하고 고통스러워할 권리가 있었다
아무것도 못본채 바보같이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화장을 참관하지 못한 엄마는 나중에 가끔 농담을 했다
"외할머니를 화장할 때 분명 쇳조각이 잔뜩 나왔을 거야"
(관절염으로 고생하셨던 외할머니는 생전에 인공관절 수술을 비롯한 온갖 수술을 받으셨다)
외할머니의 인공관절이 정말 나왔는지는 우리에게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다
잿가루가 어떤 용기에 담겼는 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한 베이지 색에 고풍스러운 무늬가 있는 항아리였던 것 같기도 하고
원기둥 모양의 함같은 것에 담겼던 것 같기도 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집안의 장지에 그 기억나지 않는 유골함이 묻혔다
장지는 전망이랄 것 없는 밭 한가운데 어중간하게 있는 작은 언덕 위에 있는데
차를 타고 들어가면 진입로 근처 집에 묶여있는 개가 사납게 짖었다
외갓집이 있는 지역은 끝없는 평야가 있는 지역이라서 그 작은 언덕이 그나마 높은 지형이다
그다지 멋스럽지도 외할머니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지도 않는 비석이 세워졌다
앞에는 이름 석자가, 뒤에는 그의 가계도가 새겨져 있었다
맥시멀리스트였던 외할머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도 같은 생각인지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갈 때마다 화사하고 아름다운 꽃을 사서 무덤을 최대한 꾸미려고 노력한다
장례식이 완전히 끝나고 외갓집으로 돌아와 모두가 강박적으로 집을 치웠다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고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면 모든 슬픔이 사라지기라도 할 듯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할머니의 흔적들이 치워졌고 그 가운데에서 외할아버지는 멍하게, 그리고 좀 못마땅하게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가족들은 더이상 울지 않았고 가벼운 농담을 하며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삼촌은 사촌들을 데리고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사주었다
많이 힘들고 슬프겠지만 잘 해나가 보자고 희망찬 말을 하셨는데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나는 슬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웠다
미처 무슨 일이 일어난지 심적으로 파악하기도 전에 장례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묵은 먼지를 털어내듯이 슬픔을 치워버리고 있었다
나의 상실은 그로부터 2년쯤 후에, 내가 대학교에 진학한 후에 서서히 나타났던 것 같다
더 이상 나에게 "내쏴"버리라고 할 외할머니가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이상하고 막막했다
엄마의 상실감은 몇 년이고 지속되면서 엄마를 힘들게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 생각이 날 때 핸드폰으로 <천 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노래를 끊임없이 재생했다
그 노래를 들으면 엄마는 슬픔을 느끼면서도 조금 미소를 지었다
일본 노래를 번역한 그 노래에는 두 개의 가사 번역 버전이 있었는데 엄마가 항상 좋다고 하는 버전이 따로 있었다
위로에서만큼은 나보다 그 노래가 백배는 유능했기 때문에 나는 그 노래가 좋아지지 않았다
엄마가 외할머니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 때 감정적으로 더 의지하고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내가 아닌 그 노래 같았다
이제 엄마는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듣지 않는다
꽃집에 들러 가장 마음에 드는 꽃을 사들고 씩씩하게 외할머니를 보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