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남자의 자리(1990)

구하구하 2022. 11. 22. 13:09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기념으로 아니 에르노 주간을 시작했다

도서관에 있는 아니 에르노 책을 몽땅 빌려와 읽는 것이다

다행히 에르노는 책을 짧게 쓰는 편이라 그럭저럭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번째 주자는 <남자의 자리(La place)>

원어로는 그냥 '자리'인데 그렇게 번역하면 좀 임팩트가 없다고 생각했나?

남자의 자리는 아니 에르노가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뒤 그의 생전 모습을 기록하는 내용이다

애도나 추모처럼 애정이 섞인 글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랄한 비판의 성격을 가진 글도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천천히 쓴다. 일련의 사실들과 선택들 가운데에서 한 생애의 의미 있는 줄기를 들내려 애쓸 때, 나는 점차로 아버지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도식이 자리를 온통 차지해 버리고, 추상적인 생각이 제멋대로 달려가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는 반대로 추억의 이미지들이 미끄러져 들어오게 놔두면, 난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 그의 웃음과 그의 거동을 다시 보게 된다. 

 

에르노는 이렇게 글 중간중간에 그가 글을 쓰는 목적과 방식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나도 글을 쓸 때 주제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자주 하는데

이상하게 의미 부여를 하면 원래 내가 느꼈던 것과는 달라지는 것 같았다

'도식이 자리를 온통 차지해 버리고, 추상적인 생각이 제멋대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냥 좀 감동적이고 재밌는 영화를 봤는데, 감상문을 쓸 때는 괜히 그 영화의 사회적 의미를 찾느라

원래 재미있던 부분은 기억에서 날아가버리고 추상적인 얘기나 계속 하게 된다

물론 어떤 경험이나 작품에서 의미를 찾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에르노가 지적한 대로 그런 행위를 하면서 원래의 경험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의미 부여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데 아니 에르노는 그걸 해낸다 

감상적이지도, 신랄하지도 않게 묘사된 한 개인의 생애는 그 자체로서 

당시 하층 계급의 삶을 선명하게 재현하고 있다

의미부여를 멈춤으로서 모든 의미를 그대로 전달한다

쓰다보니 뭔소린가 싶은데 하여간에 읽다보면 이해된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왠지 좁은 길을 아슬아슬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이런 작업에 수반되는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에 낀 좁은 길 말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들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는 우리의 행복이기도 했지만, 또한 우리의 조건을 둘러싼 굴욕적인 장벽들(<우리 집은 그렇게 잘 살지 못해>라는 의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행복인 동시에 소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굉장히 개인적인데, 그 이유 때문에 상당히 사회적이다. 

기사나 통계에서는 흔히 지워지고는 하는 하층민의 삶, 그들의 생각과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나있기 때문이다

에르노는 이런 글을 쓰면서 '명예회복과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걷는 느낌'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못사는 사람들에 대해 비난하고 역겹게 생각하며 혹은 동정심을 보인다

그 어느 것도 당사자에게 달가운 반응은 아닐 것이다

에르노는 우리는 가난했지만 행복했었노라고 어린 시절의 작은 추억들을 소중히 꺼내어 놓는다

아버지는 가난하고 못배운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묘사될 가치가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작은 습관과 취향,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 따위를 건조한 말투로 그려내는 글에서는

에르노 나름의 애정이 담겨있는 것 같다

하지만 부르주아 예술인들이 흔히 하는 기만적인 '소박함에 대한 예찬'을 하지도 않는다

에르노는 그들이 얼마나 어렵고 부족하게 살았는지 묘사한다

 

난 프루스트나 모리아크를 읽을 때면, 이 작품들이 내 아버지가 아이였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버지의 환경은 중세였던 것이다. 

 

이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프루스트가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을 때, 에르노의 아버지는 벌레를 쫓기 위해 몸에 마늘을 지니고 다녔다

가난을 고발하면서도 변호하는 이런 태도는 에르노가 가난의 당사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관점인 것 같다

이런 점이야 말로 현대문학의 위대한 성취가 아닐까

현대 이전에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은 모두 귀족이거나 부르주아거나 귀족의 후원을 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런 환경에서는 가난을 비참하게 여겨 동정하는 태도나

가난을 동경하여 소박한 삶을 예찬하는 태도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

가난의 당사자였던 아니 에르노는 하층 계급을 묘사한 문학 작품의 세계에서

'명예회복과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셈이다

 

글을 쓰다보니까 에르노가 처음에 지적한대로 '도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디서 들었던 그럴듯한 얘기를 그대로 쓰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젠장

책을 읽을 때는 아니 에르노의 가족 이야기와 에르노의 감정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어느새 문학적인 의미 부여만 하고 있으니 원

하여튼 문학적 의미를 제외하고도 그냥 책이 이해하기도 쉽고 재미있다

같은 노벨상 수상 작가인 압둘 라자크 구르나 책은 더럽게 재미없어서 억지로 읽었는데

아르노 책은 아주 몰입감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얼마전에 읽은 <H마트에서 울다>가 생각나서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둘다 죽은 부모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얼마나 성격이 다른지...

H마트를 읽을 당시에는 꽤 어머니에 대해 신파없이 객관적으로 묘사한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비하면 그 책은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감정 가득한 책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그냥 같은 소재로 얼마나 다른 글을 쓸 수 있는지가 흥미로웠다

 

하....에르노처럼 글 쓰고 싶다 어떻게 저렇게 세련되게 글을 쓸까 

에르노를 읽고 이런 독후감이나 쓰니까 자괴감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