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피를 마시는 새

구하구하 2022. 10. 25. 18:18

8권짜리 소설의 후기를 쓰려니까 골치가 아프다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길고 메시지도 많고

무엇보다 초반에 읽었던 부분은 기억도 잘 안난다는게 문제다

그래서 그냥 대강 마음에 들었던 포인트만 정리하려고 함

 

1. 주제의식

인간의 자유의지와 행복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

대충 이런 주제였던 것 같다 

황제 라세는 사람이 죽고 죽이는 것을 그만두도록 하기 위해

1만 6천년동안 사람의 운명에 인위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두고 다투는 다양한 관계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마지막에 인물들은 황제가 사람에게 앗아가려고 하는 죄를 되찾는다는 결정을 한다

죄를 되찾는다니 조금 이상한 소리 같지만

물이 끓고 어는 것에 도덕을 따질 수 없듯이, 죄가 없으면 도덕도 없어진다는(?) 이야기 같다

죄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해준다는 것

주제의식이 작품에서 상당히 비중있게 언급되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쉽고 선명하게 나타나있지는 않아서 무슨 소리인지 계속 고민하면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치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모호함이 책의 매력 같았다

 

2. 여성캐릭터

이 책이 매력적이었던 이유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좋은 여성캐릭터들

전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는 아예 성별이 반전된 나가 사회를 보여줬는데,

이번에는 나가 이야기는 많지 않지만 중요하게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수는 더 많고 다채롭다

주인공 격인 엘시와 대적하는 장군 베로시 토프탈은 굳이 여자라고 말하지 않으면

전혀 알지 못할 정도로 성별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이 쓰여졌다

두억시니에 대한 학문적인 호기심이 강하고, 야망있으며 전술적으로 뛰어난 장군이다

또 니어엘 헨로는 툭하면 주정뱅이가 되지만 가공할만한 위력을 가진 활 기술을 가졌고

천재적인 작전 수행 솜씨를 가진 사람이다

책에서 가장 정이 많이 갔던 캐릭터다 짠한 가족사까지 있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캐릭터임 ㅠ

암살공의 사생아로 등장하는 헤어릿은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떠날 수 없는 묘한 처지의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도깨비감투를 가지고 더는 이용당하지 않고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려한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낮은 신분의 소녀를 지키겠다 맹세하는 이이타를 보고

그를 돕겠다고 스스로의 결정을 내린다

배다른 형제인 스카리 빌파가 도깨비감투를 가지고 망나니짓만 하고 다니는 것과 대조적이다

비나간의 왕으로 스스로를 추대한 지키멜 퍼스도 중반부 부터 상당히 비중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치밀한 음모로 할아버지를 끌어내리고 스스로 왕이 된 손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도덕이고 목숨이고 뭐든 이용하는 추진력이 대단하다

특히 후반부에 납치극 벌이는 장면이 인상적... 완전 도라이같은 인물이다

 

3. 세계관

탄탄한 세계관이란 표현이 진부하지만 그보다 어울리는 말이 없다

탄탄하다 못해 단단해서 어딘가 실존할 것 같은 세계관이다

암살성이 있는 도둑들의 고장인 발케네, 무사들의 고장인 무향 규리하

제국 전역으로 세력을 넓힌 유료도료당과 그에 경쟁하는 자유무역당

단순한 선악구도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개성과 신념을 가진 세력들이

서로 반목하고 협력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동양이나 한국의 전통적인 요소가 분명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중세부터 이미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각 지방을 쥐고있는 권력자가 각각 따로 있는 아라짓 제국과는 성격이 다르게 느껴졌다

 

하늘치라는 소재를 허투루 쓰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든다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을 보면 꼭 거대한 하늘을 나는 동물을 넣어놓고 멋있는척하다가

결국 그냥 간지나는 배경 아니면 생긴 것만 멋진 전용기정도의 역할만 부여한다

껍데기만 조금 바꿔놓고 판타지라고 우기는 이런 작태를 매우 싫어하는 편인데

이 책에서는 하늘치의 역할을 깊이 생각하다 못해 끝없이 파고 들어간 것 같았다

사람이 올라갈 수 있으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생물이 하늘을 날아다닌다면 뭘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그렇다면 '제국의 수도를 그곳에 건설하여 고정된 중앙없는 제국을 건설한다'라고 대답을 내놓는다

판타지라는 장르는 뭐든 마음대로 상상해서 쓸  수 있으니 쉬울 것 같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장르보다 구축하기 어렵다. 

세계를 이루는 법칙을 대강 만들면 이야기는 붕 떠보이고 설득력이 없다

소재 하나하나를 선택할 때 그 소재가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작품에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지 깊게 고민한 흔적이 있어서 좋았다